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놀자선생 Oct 19. 2020

생존엔 필수품이지만 창의성을 방해하는 것

오늘도 어제와 같이 살아가면 무난하다. 생존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선입관에 근거해서 살아간다. 선입관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생존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다. 어제와 전혀 다르게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고 위험요소가 많겠는가? 코로나19 이후 삶이 불안하고 힘든 이유는 느닷없는 돌발변수가 생겨 선입관대로 삶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선입관이란 인류가 생존을 위한 오랜 세월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유사한 판단을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내리도록 돕는 고등한 정보처리 작용이다. 선입관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해당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이기에 천차만별이지만 인류의 보편성에서 보면 거의 유사하다 하겠다.      



시시때때로 따져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건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반복되는 일상의 유사한 상황이 닥치면 이전에 반복하여 판단하고 행동했던 걸 아예 저장해놓고 자동화시키는 게 훨씬 경제적이기에 영리한 두뇌는 ‘선입관’이란 것을 아예 심어놓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고정관념이라고도 한다. 뇌는 몸무게의 2%밖에 안 되지만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전체 소모량의 20%나 차지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소비를 절약하거나 없애기 위해 반복되는 행동은 자동화시키는 전략으로 진화된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친 사람은 나를 해칠 가능성이 많기에 안 좋은 선입관이 생기고 착한 행위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좋은 선입관을 갖게 되는 건 나에게도 그럴 거라는 예측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속하게 판단하기 위한 ‘선입관’은 선거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가장 먼저는 인상 보고 찍는다. 쉽게 말하면 좋고 싫음에 따라 단순하게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다음 내 편인가 아닌가를 따진다. 아주 오래전 우리 조상들은 내편과는 손을 잡고 아닌 편에게는 돌멩이나 창을 던지면서 싸웠을 것이다. 이 판단은 매우 오래된 고정관념으로 우리 뇌에 알게 모르게 새겨져 있다. 그래서 후보들은 최대한 유권자들에게 호감형이 되고자 외모와 말투 등에 신경 쓴다. 그리고 서로 유리한 프레임으로 편을 갈라 자신의 편을 규합한다. 이런 건 가장 원시적인 방법 같지만 가장 확실한 선거운동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DNA에 새겨진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선입관이 가진 프로그램의 적중률은 83%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동물행동학자들은 일상생활에서는 동물이 95% 이상 선입관에 따라 매일 반복된 행동을 한다고 한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 나머지 5%의 비일상적인 행위는 엉뚱하거나 뜬금없는 것이어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말입니다.

    

인류의 진화와 발전은 선거에서 선입관이 아닌 나머지 17%나 평상시 거의 쓰지 않던 5%의 뇌를 써온 결과 이루어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어제까지 해보지 않은 일을 오늘 시도해본다는 건 두렵기도 하고 어쩜 생존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인류에게 그런 호기심과 모험이 없었다면 그닥 재미도 발전도 없는 밋밋한 삶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조상들은 우연히 나무끼리 부딪혀 불이 생기는 걸 봤을 것이다. 돌멩이를 바위에 던졌더니 불꽃이 튀는 걸 우연히 보고는 이런저런 시도와 시행착오 끝에 누군가 최초로 불을 만들어(발견) 추위를 견디고 질긴 고기를 구워 먹게 되었을 것이다. 근대에 와서는 억압과 착취 세상을 끝장내기 위해 프랑스혁명으로 구체제를 무너뜨리기도 하였고 마르크스 이론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것을 언제부턴가 진보라고 명명하였다. 이에 반해 현 상태를 지키고자 하는 세력은 보수라고 명칭 하였다. 우리는 진보하면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를 떠올리는데 이 또한 선입관으로 굳혀진 것이다.          



진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19세기나 20세기의 이념을 붙잡고 교조 하면서 진보주의 행세를 하는 사람이나 80년대 민주화 세력이었던 586의 불공정한 행위는 어폐가 있는 말이긴 하나 ‘낡은 진보’라고 불린다. 낡은 진보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식을 동원하고 진보를 입으로만 말할 뿐 새로운 것에 대해 탐구하거나 도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입진보’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무탈하기를 바라기에 지적으로 게으르다. 지금까지 없었던 낯설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실행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다. 신자유주의와 자원의 고갈로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한 인류에게 새로운 대안이 무엇인지 인문학적 통찰을 통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는 것이 진정한 진보라는 생각이다.       

    


놀이 활동을 관찰해보면 놀이강사들은 아이들에게 놀이를 설명해 준대로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안전하게 놀이 활동이 되기를 바란다. 평소에 창의성을 강조하던 강사들도 ‘안전’과 시간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듯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전혀 다르다. 호기심으로 눈빛을 반짝이며 시답잖은 질문부터 귀찮은 질문까지 말문이 닫히지 않는다. 실제 놀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르쳐 준대로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든가 거꾸로 가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아이들은 선입관이 확고하게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슬픈 일은 이들도 자라면서 차츰 선입관으로 고정되어 갈 것이라는 것이다. 부모님 말씀이나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면 크게 손해날 일 없이 무탈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다만 내일의 삶은 오늘의 삶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선입관은 생존에는 필요하지만 창의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미국의 컬럽비아대 조지랜드&베스자르민은 어린이 1,600명을 조사했는데 2~5세 때 98%가 창의적 천재로 밝혀졌다. 이 어린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8~10세가 되면 32%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학교 생활을 시작한 나이란 걸 알 수 있다.  <학교가 창의성을 죽인다>고  TED 강연에서 말한 영국의 교육학자인 켄 로빈슨의 주장과 딱 맞아떨어진다. 13~15세에 10%, 25세 이상이 되면 창의성은 고작 2%밖에 남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다. 필자가 볼 때 이는 선입관과 깊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2~5세 때는 선입관이란 게 형성되지 않은 나이이다. 그러다가 성인(25세)이 되면 선입관이 98%로 채워졌다고 거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선입관은 분명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선입관은 역설적으로 창의성을 가장 크게 방해한다. 현생 인류가 가진 선입관 중 ‘성장’과 ‘발전’이라는 단어는 진보와 연결되는데 이것 또한 선입관이다. 이건 자본주의(산업화)가 만들어낸 선입관(이데올로기)으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인류사상 가장 거대한 프레임의 덫이라는 생각이다. 40여 전에 인류사에 없었던 GNH(국민행복지수)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시행하고 있는 히말라야 산악국가인 부탄은 당시에는 비웃음과 무시를 당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 지구적 위기에 맞닥뜨린 인류의 대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선입관에서 벗어난 얼토당토않은 것 같은 사고와 주장이 대안이고 진보일 수도 있다. 칼 융은 "새로운 것의 창조는 지성이 아니라 놀이 충동에서 생겨난다." 고 말했다. 놀이는 실재 삶과 죽음이라는 선입관과 달리 죽었다가도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잠재된 창의력이 드러나도록 도와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미래인 놀이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작가의 이전글 팔자 고치는 아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