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노는 건 계절 탓이고 조상 탓이다
2024년 9월에 1,300개, 10월엔 1,900개의 ○○이 있다. ○○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요? 네, 바로 ‘축제’입니다. 가을은 실로 노는 계절입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건 겨울이 물놀이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쌉소리일 것입니다. 누가 봐도 가을에 놀지 않으면 언제 노느냐는 상식적인 의문점이 생길 법도 한데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에 의문점이나 문제 제기가 없는 거 같습니다. 그건 아마 그렇잖아도 일 년에 책 한 권 안 읽는 사람들이 많아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은 책이 안 팔리는 가을에 매출을 늘리기 위해 출판사와 관계기관이 합작하여 만들어 냈다는 음모설이 있는데, 이게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초콜릿 회사에서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만들어 냈다는 말이 일리가 있듯 꽤나 상당하고도 합리적인 의심이 듭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 아니란 걸 증명하려면 가을에 얼마나 책을 안 읽는지를 실제 통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책 판매량을 보면 추측할 수 있는데 일 년 중 도서 판매량이 연평균 매출에 미치지 못하는 달은 4~6월과 10월~11월로 주로 봄과 가을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책이 반짝 잘 팔리는 달은 신학기를 맞이한 3월인데 이건 순전히 학교 교과서와 관련된 책일 겁니다. 책이 잘 팔리는 계절은 12~2월에 해당하는 겨울, 7~8월에 해당하는 여름의 매출량은 연평균 매출보다 높다는 통계입니다. 2학기가 시작되는 9월엔 반짝 팔리다가 가을이 되면 급격히 떨어지는데 이는 도서 대출 데이터와도 비례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2016년 484개 공공도서관 대출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우리나라 국민은 가을에 책을 가장 적게 읽는다는 통계입니다. 대출량이 가장 적은 달은 일명 독서의 계절인 9월부터 11월까지입니다. 독서의 계절이 쥐구멍을 찾을 정도로 무안해집니다.
이건 우리 자신을 탓할 일도 아니고 날씨가 너무 좋으니 순전히 계절 탓입니다. 또한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수천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가을엔 맨날 놀아왔으니 조상 탓이라고 말하는 게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그러니 가을에 책을 안 읽었다고 자책하거나 부끄러워할 건 1도 없습니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이라는 단어를 알 것입니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밤낮으로 술 마시고 춤추며 노래했는데 이를 무천이라 했다(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아침저녁으로 남녀 무리들이 노래를 불렀다. 시월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모임을 갖는데 동맹이라 한다.(暮夜輒男女群聚爲倡樂 當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마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노래 부르고 춤추며 술을 마셔 밤낮을 쉬지 않았다(馬韓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는 기록이 있습니다.
각설하여,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계절은 독서의 계절이 아닌 오히려 겨울(1월)과 여름(8월)입니다. 황진이 말마따나 동짓달 기나긴 밤 심심함이 극심해지면 책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처럼 밤이 긴 나라가 문학이 발달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고 오곡이 맛나게 익어 가는 계절에 인간만이 등불 밑에서 책을 붙잡고 파리하게 여위어 갈 필요는 없습니다. 지구온난화로 40도에 가까운 폭염을 버텨 낸 우리 몸이야말로 휴식과 놀이가 꼭 필요합니다. 지금 책을 읽고 있다면 당장 집어던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축제장이라도 찾아 실컷 노시기 바랍니다. “만국기 날리는 푸른 하늘에 오늘도 놀면서 우리 자란다. 하늘 높이 휘날리는 깃발 아래서 달려라 이겨라 우리 청(백)군아”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 아래 응원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곳이 한국의 가을입니다. 청량하게 들리는 계곡의 물소리와 토실토실 익어 가는 가을을 만끽하며 독서의 계절이 아닌 “놀이의 계절”을 맘껏 누리셔야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만수무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