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놀자선생 Sep 28. 2020

강강술래는 고대사회의 짝짓기 놀이였다

10여 전 지인의 소개로 옥천 가산사(충북 옥천군 안내면)라는 사찰에서 열리는 단군제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필자가 도착했을 때는 밤이 늦어 제사 의식이 끝나고 노래하고 춤추며 시끌벅적 난장이 한창이었다. 아는 사람들이 권하는 막걸리를 몇 잔 들이키자 취기가 거나해졌다. 음주가무는 갈수록 무르익어갔다. 막걸리를 가득 담은 항아리가 곳곳에 놓여 있었고 밤새워 음식을 나눠 먹고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는 우리나라에 고대로부터 내려온 본래의 축제라는 말을 들었다. 그중 어떤 어른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여자와 눈이 맞거나(필자가 남자니까) 맘에 든 사람이 있으면 둘이서 이곳을 벗어나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즉, 짝짓기를 해도 누가 비난하지 않는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젠가 장길산인가 하는 소설에서 그런 장면이 묘사된 걸 본 적은 있었지만 필자가 그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진실을 말하면 그날 밤 어떤 여인과 뜻은 맞았지만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어르신들은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자들을 감시하는 눈초리를 치켜세웠고 더 주요한 건 아마 고대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팔월 한가위가 되면 누구랄 것 없이 하얀 송편과 함께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즐기는 강강술래를 떠올린다. 강강술래는 풍년을 축원하며 평화와 안녕을 구가하는 여성의 놀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에 다음과 같은 기준을 충족시켰다고 기술하였다. R1: 공연자들이 일체감을 가지고 있으며, 세대를 이어온 여인들의 자유로운 표현 경로를 제공하였다. 위에서 말한 ‘여인들의 자유로운 표현 경로’라는 말은 여성들의 놀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다. 강강술래는 과연 여성들의 놀이였을까? 먼저 이것부터 살펴보자.          


필자가 블로그 등에 올린 글이나 곧 출간될 책인 『놀이인문학』에서도 얘기하고 있듯이 강강술래는 진도와 해남을 중심지로 한 여성들의 놀이문화로 알려져 왔던 건 사실이지만 결코 여성만의 놀이가 아니었다. 근래에 일명 <뜀뛰기 강강술래>라고 부르는 비금도 강강술래는 지금까지 우리가 추상적으로만 알았던 강강술래의 역동적인 모습들을 드러내 주고 있는데 여성전용 놀이가 아닌 청춘남녀들의 성적 에너지가 넘치는 놀이라는 점과 더 나아가서는 근세까지도 이 놀이판에서 남녀의 역동적 짝짓기가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졌다. 우리가 강강술래를 여성들의 놀이로 알고 있는 건 1966년 국가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면서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진 부녀자들의 집단놀이로 주로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추석을 전후하여 달밤에 행해졌다」라는 해설 때문이기도 하고 실재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놀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전의 의식이나 풍습이 더 오랫동안 남아 있을 개연성이 큰 섬 지방인 비금도 강강술래를 보면 여성의 놀이로 단정 짓는 건 무리라는 생각에 미친다.           


강강술래는 가장 오래된(最古놀이이다.

강강술래는 원시 공동체 사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문헌들이 꽤 있는데 동북아의 고대사를 기록한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조>>, <<양서>>, <<열전>> 등을 들 수 있다. 이 기록들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춤추고 술 마시고 노는데 춤을 출 때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서로 뒤를 따르면서 땅을 밟고 높이 뛰고 놀았다는 것이다. 강강술래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대사회에 남녀가 음주가무 하는 것은 제천대회(祭天大會)가 끝난 뒤 가무 하는 것으로 서로 즐겁게 노는 것은 신령의 효험을 얻으려는 음복(飮福) 의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기제사 뒤 음복과 같은 것으로 500년의 유교사회를 거치면서 춤추고 노래 부르는 건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본다면 소위 임진왜란 기원설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왔던 강강술래를 활용한 것으로 여겨진다.(疑兵說) 따라서 원시종합예술 기원설을 근거로 강강술래를 보자면 ‘여러 사람이 둥글게 손잡고 돌아가며 노래 부르고 춤추며 노는 놀이’로 정의할 수 있겠다. 즉, 본연의 강강술래에 기와밟기나 고사리꺾기, 꼬리따기, 청어엮기, 남생아 등이 나중에 첨가되거나 추가되면서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워졌다고 볼 수 있겠다.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이 조사하여 펴낸 『조선의 향토오락(1941)』을 보아도 강강술래와 기와밟기, 고사리따기, 덕석말이 등을 따로 구분하여 기록해 놓은걸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나 전국체전 등에 참가하면서 연출, 안무되면서 풍성해지지 않았나 싶다.           



 옛날 놀이는 짝짓기 놀이였다. 

우리나라에는 유감스럽게 짝춤(커플댄스)이 없고 대신에 집단무(원무)가 발달되어 있다. 서양에서 춤이라 하면 커플댄스가 주를 이루는데 우리나라에 커플댄스가 전무한 건 아마 기나긴 유교사회를 통과하면서 사라진 게 아닌가 한다. 그래서 강강술래가 짝짓기 놀이였다는 얘기가 느닷없고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겠다.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밤마다 여럿이 모여서 노래하고 노는 것은 물론이고 풍속이 문란하여 남녀가 서로 도망가고 유인하기도 했다(<<양서>> 基俗好淫 男女多相奔誘)는 기록이 있다. 중국 한족들의 이런 평가는 조선시대에 고려시대의 노래(가사)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평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 시대의 지향성이나 이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서양의 커플댄스를 보았다면 세상 말세니 인류 역사상 최고로 타락했느니 하며 기겁을 했을 것이다.      


옛 사회에서 국중제의(國中祭儀) 때 손을 마주 잡고 뜀뛰기 하는 원무나 남녀가 무리 지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유인하는 일은 고대사회의 난혼(亂婚)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즉, 교접 결합의 굿판으로 구애와 짝짓기의 혼례라는 것이다. 최덕원은 『강강술래考』(1990)에서 “만월은 생식과 풍요와 풍만을 상징한다. 또한 둥근달은 만물을 생성하는 태양과 더불어 생산의 형상이며 서로 사랑하는 남녀 합일의 모습이다. 이런 달을 모의하면서 무리 지어 뛰고 소리하는 것은 감염주력(感染呪力)으로 생식의 성취를 축원하는 생산 의례라 할 수 있다. 하나로 엮고 다시 풀어주는 문 열기와 가마타기 등은 상사, 정애의 풀이이며 구애와 화합의 발원적인 굿판이라 할 수 있다. 수족 상응하도록 손과 발을 맞추고 땅에서 하늘로 도약하는 굿놀이는 천우신조를 얻어 향복과 남녀 결합을 기구하는 축수(祝手) 행위다. 윤무의 원 놀이인 강강술래는  생성과 번식을 위한 짝짓기의 구혼 행위로써 남녀가 공동으로 연희하는 결합 의례와 굿판이라 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비금도 강강술래를 조사한 걸 보면 근래까지 짝짓기 놀이가 이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강강술래판을 뜨겁게 달군 가장 큰 요인은 여러 마을의 청춘 미혼자들이 서로 어울려 한 자리에 모여 가무 한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평소 관심 있는 이성에게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술래판이다. 미혼남녀가 그 날만은 아무 거리낌 없이 막 얘기하고 장난하고 밀치고 붙잡고 손잡고 뛰고 노는 젊음과 성의 난장판이다. 상대가 마음에 들면 끄는 손을 따라 술래판을 벗어난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 아무개 아무개 손잡고 나간다고 흉을 보았다."(「비금도 강강술래의 사회사」 목포대 나승만, 2003년)

대학 축제의 쌍쌍파티가 이와 뭐가 다르며 클럽에서 맘에 드는 이성에게 접근하여 춤을 같이 추고 둘이 손잡고 나가는 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상대방을 선택하는 기회를 여성들도 자유롭게 활용한다. 여성들도 좋아하는 남성이 있으면 손잡고 뛰어보기 위해 술래판에 끼어든다. 그리고 손잡고 뛰면서 손수건을 건넨다. 손수건은 애정을 전하는 상징물로 이용된다.”          



짝짓기 놀이는 이웃 나라에도 있었다.

일본에 우타가끼(歌垣)라는 것이 있는데 특정한 날에 젊은 남녀가 모여 서로 구애 가요를 부르던 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만엽집(万葉集)』 등에 기록이 있다. 봄이나 가을밤에 젊은 남녀가 모여서 일대일로 서로 구애 노래를 번갈아 부르던 미혼 남녀의 집단 성년(청혼)식에서 기원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자는 15~16세, 남자는 16~17세가 되면 참가할 수 있으며 60~70쌍의 연인이 모여서 서로 마주 앉아 손을 잡고, 가볍게 가성으로 연가를 대창하면서 애정을 전달하고 다른 쌍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런 풍습은 중국 귀주성 미야오족이나 베트남 북부의 베크닌성 등 중국 남부에서 베트남을 거쳐 인도차이나 북부의 산악 지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필리핀 및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비슷한 풍습이 보인다. 이들은 집회소에서의 의식이 끝난 후에 젊은 사람들은 마을 문 옆의 나무 아래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쌍을 이루어서 부르며 그 내용은 사랑을 테마로 하였다. 그 후에 연인들은 은밀한 곳에 가서 성관계를 맺었는데, 그때 소녀의 동의 없이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친밀해진 두 사람은 혼약을 하고 그 후 대부분의 경우 수확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가원(歌垣)의 기원으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예는 1896년 진도에 유배되어 1907년까지 12년간 진도에서 생활하면서 쓴 무정(茂亭) 정만조가 쓴 『은파유필』에도 나타나는데 “젊은 여인들의 마음에는 사내 오길 기다리네. 강강술래를 하니 때맞추어 역시 사내들이 찾아오네. 이날 밤 집집마다 여자들이 두루 모여서 달을 밟으며 노래하는데, 한 여성이 선창을 하면 여러 여성들이 느릿느릿 소리를 받기를 강강술래라 한다.” 다름 아닌 강강술래를 통해 노래하고 놀이하는 이면은 사내와의 만남을 희구하는 절차로 '남자를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놀이는 원시 고대사회에서 성적 주술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는 우리가 보기에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이색적인 축제가 있는데 바로 가나마라 축제(かなまら まつり)다. 축제장에서 여성들은 거대한 남근 모형 위에 올라타서 사진을 찍고, 남근 모양의 아이스크림이나 음식을 먹으며 장식품, 술병, 양초 등 모든 기념품이 남근으로 되어있다. 남근이 상징하는 것은 자손 번성과 풍년 등 고대사회로부터 내려온 성의 주술성이다. 성에 대해서 한국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노골적인 일본의 이색적인 가나마라 축제는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은데 고대사회의 우타가끼(歌垣)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을 은근하게 표현하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문화의 차이는 어느 것이 더 우월하고 어느 것이 더 낙후하다고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문화란 서로 다른 사회집단을 구별 짓는 가치관과 행동양식으로 우리가 속해있는 주변의 행동방식이기 때문이다. 여성 중심의 진도 강강술래와 청춘남녀가 발랄하게 어울리는 비금도 강강술래에 대해 우열을 가리는 건 무모하다. 각각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놀이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369 놀이와 매미의 수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