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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Jul 13. 2022

미치도록 떠나고 싶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도시, 부산

고2 겨울 방학, 아껴 놓은 용돈으로 무궁화편 서울행 기차표를 샀다. 메이사 고모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메이사 고모는 다음카페 자미로콰이 팬클럽의 시삽이었는데 제1회 자미로콰이 팬클럽 정모를 주최하고 나를 서울에서 재워주기로 한 사람이다. 메이사 고모는 생면부지의 부산여고생을 데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도 데려가고 경복궁에도 데려가고 호프집에서 열린 자미로콰이 정모에도 데려가 주었다. 1박 2일을 꽉꽉 채워 놀고나서 돌아가는 서울역에서 메이사 고모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은 영국의 밴드들이었는데 내한공연은 인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였고, 팬클럽 정모 마저도 서울에서만 열렸다. 느린 인터넷으로 다음카페를 들락날락하는 것으로 겨우 정보를 얻는 처지에서 서울에서 음감회라도 열린다고 하면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서울에 가고 싶었다. 청소년이었던 내게 부산에 사는 것의 가장 열받는 점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보는 것이 부산에서는 너무 어렵다는 점이었다.



서울에 가면 꼭 미술관에 들린다. 서울의 미술관은 수적으로도 규모에서도 부산의 미술관들을 압도한다. 최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부산의 현대미술관은 해운대에 단 한 곳 있었다. 그 마저도 상설전시만 주구장창해서 한번 가면 2년은 다시 안가도 되는 수준이었다. 부산의 이런 문화적 결핍성은 10대와 20대 한창 감성이 예민한 시기에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30대가 되면서 부산이라는 도시에 드는 아쉬운 감정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한창 결혼 적령기라고 불리는 때에 나도 한때 미치도록 결혼이 하고싶었을 때가 있었다. 하루에 두세번씩 선을 본적도 있고 매주 주말 선약속을 잡아 꽤 긴 기간을 선과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이 지역 남자를 수도 없이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은 참 괜찮은 사람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몇 년 뒤에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이 현상이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똑같이 성적이 좋은 딸과 아들이 있으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는 것은 아들 쪽이 훨씬 많다. 성적이 모든 사람의 됨됨이와 모두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소한 사회, 경제적 지위와 관계가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나와 비슷한 사회, 경제적 수준의 남자를 만나는 것이 이 곳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30대 후반, 현재 이 도시에 가장 짜증나는 점은 운전과 관련된 것이다. 차를 운전한지 8년째인데 경차로 바꾼 이후, 매일 도로에서 짜증나는 일이 생긴다. 초록불로 바뀐 지 0.1초만에 안 간다고 뒤에서 경적 울리기, 깜빡이도 안켜고 갑자기 끼어들기, 깜빡이 넣고 차선변경하려면 갑자기 속도내기, 차선 변경한다고 욕하기, 뭐 조금 실수하면 차창 내리고 욕하기….이 도시에서 여자가 경차를 몬다는 것은 매일 짜증날 일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이고 조금이라도 친환경적이어서 일부러 경차로 바꿨는데 이 놈들 논리대로 비싼 외제차를 사버려? 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이렇게 푹푹 찌는 계절이 오면 말이다.



미치도록 떠나고 싶다가도 다시 주저 앉게 되는 이유는 바로 바다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가 제 2의 도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바르셀로나, 마르세유, 포르투, 상하이 등) 한 미국 친구가 말한대로 부산은 ‘세컨드 시티 바이브’가 있다. 대도시이면서도 여유가 있다. 350만명이 복작대는 도시이지만 공간의 여유가 있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무래도 바다가 있어서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고민이 있을 땐 본능이 이끄는 대로 바다로 갔다. 지금은 빽빽한 건물들 때문에 너무 도시적이지만, 내가 자라는 시기의 해운대는 누구라도 반겨주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중학교 2학년때 아빠와 싸우고 처음 가출했을 때 버스비밖에 없으면서 무작정 간 곳이 해운대였다. 그렇게 백사장에 털썩 앉아 바다를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다가 무슨 고민이라도 받아줄 것 같았다. (2시간을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어떤 할머니가 불쌍하다고 핫도그를 하나 사줬다. 용왕 할매였는지도? 핫도그 하나 먹고 정신차리고 집에 기어 들어갔다.) 고등학교때도 친구와 학교를 조퇴하고 무작정 해운대에 간 적이 몇 번 있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그냥 벌렁 백사장에 누워 두어시간 파도소리를 듣는다. 그러고 나면 얼굴은 새까맣게 타지만 갑갑한 마음에 숨구멍이 생긴다. 여름 방학식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친구들끼리 무작정 해운대에 가면 체육복 반바지만 입고 풍덩 들어가 한나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이런 추억들 때문에 아무래도 나는 산보다는 바다가 좋다. 바다가 보이는 곳은 언제나 반갑고 따뜻한 느낌이 난다.



바다 말고도 나를 다시 부산으로 오게 한 다른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다른 가족은 안 보고 살아도 엄마는 안 보고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가 너무 지긋해서 아예 엄마가 절대 오지 못할 지구촌 어딘가로 숨을 계획을 어렸을 때부터 내 방에 붙어있는 세계지도를 보면서 짜왔는데 막상 그 계획을 실행하면, 엄마가 사무치게 그립고 엄마만이 나의 외로움을 이해해줄 것 같았다. 영국에서 석사를 하면서 엄마에게 국제전화를 하는 날에 엄마는 항상 긴장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해서 울면서 삶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또 엄마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이 미해결 감정이 나를 미치도록 떠나게 싶게 하다가 또 다시 미치도록 다시 돌아오고 싶게 했다. 아내가 생기면서 엄마와 적당한 거리가 생긴 이후 부터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회귀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까르마의 끈 같은 것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나에게 부산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렸고, 부산을 버리고 다른 곳에 살 용기가 이번엔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유목민에서 다시 토착민이 되고 있다.



부산에 대한 나의 양가감정은 미래엔 어떻게 변할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된다고 하니 아마도 부산에 대한 애착이 더 커지겠지. 하지만 또 모른다. 부산이 또 미치도록 지겨워져서 훌쩍 떠나게 될지. 그러면 또 부산이 미치도록 그리워서 방바닥을 긁겠지. 나와 부산은 그런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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