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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May 26. 2022

분노클 1 - 가장 슬펐던 날

친족 성폭력에 대해 말하다 

초등학교 여름방학마다 엄마는 우리 남매를 외할머니집에 파양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2~3주 머물다 오는 건데 나도 동생도 좋아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하루를 멀다 하고 싸우고, 깨고, 터지고, 무거웠고 동네에 친구도 많이 없었는데 외할머니 집인 전포동 달동네에 가면 같이 놀 수 있는 사촌언니, 오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그 동네 애들이 우리를 노는 데 끼워주어서 골목 놀이(무궁화 꽃, 술래잡기, 다망구 등)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동네애들은 아파트에 살고 학원을 다녀서 그런지 잘 모이지도 않았고, 또 나는 우리 집이 허구한 날 싸워 대서 기를 못 펴고 다녔는데, 전포동에 가면 신분세탁을 싹 하고 신나는 골목놀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집에 홍콩 할매 귀신류의 성인 비디오 테이프들이 있어서 동네 아이들과 떼관람을 하기도 했고, 외삼촌의 담배 꽁초를 같이 돌아가며 피워보기도 했다. 사촌 오빠의 소중한 386 컴퓨터로 페르시아의 왕자같은 게임을 옆에서 관람하거나 어쩌다 그가 기분 좋으면 한번씩 시켜 주기도 하여 게임을 하는 것이 하루의 하일라이트였다. 왕년에 분식집을 하셨던 외할머니 덕에 기름진 싸구려 음식도 듬뿍 먹을 수 있었다. 친가쪽 친척집에선 더 고급 음식을 먹지만 항상 체할 것 같았는데, 외가에선 눈치 볼 일 없이 편하게 먹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곳은 내게 천국이었다.




그 일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일때에 일어났다. 사촌 오빠는 중학교에 갓 입학했었다. 사촌 오빠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는데, 크니까 더 까칠해져서 누가 자기 컴퓨터를 쓸라치면 고함을 치고 발로 배를 차기도 했다. 11년동안 나는 모부의 고함과 폭력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그 정도 냉대야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그 날은 그해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집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이었다. 내게 늘 퉁명스럽던 사촌 오빠가 안방에서 낮잠을 자는 내 옆에 스며들었다. ‘뭐지?’ 하는 순간 이미 그의 손이 내 바지 안에 들어왔다. 나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신호는 그의 묘하게 쑥스러워 하는 미소였다. 몇 년간 미소조차 볼 수 없었던 그의 얼굴엔 비굴함이 기름때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낑낑거리며 뿌리쳤는데, 더러운 손가락이 내 바지속을 헤집었다.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내 옆에 없었다.




어떻게 그 집에 더 이상 안 가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름 방학 때 가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가 거부했는지 모부가 불편한 낌새를 챘는지 알 수가 없다.




다음의 기억은 이것이다. 내가 25살일 때, 엄마와 별로 친하지 않던 둘째 외숙모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야기인 즉슨, 둘째 외삼촌 네 외사촌동생 둘이 그때가 되어서 사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전포동의 사촌오빠가 그 애들이 초등학생일 때 만졌다는 것을 엄마에게 말했다. ‘민지도 당했대요? 물어봐요.’ 엄마가 자뭇 심각하게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엄마가 잘 대응하지 못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날 만약 그렇다고 했는데, 엄마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미어졌을 것이다. 나는 더 실망하지 않기 위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30대가 되어서 엄마와 싸우다가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역시나 엄마는 ‘그걸 지금 말해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라고 말했다. 기묘한 승리감 마저 들었다. 참고로 그는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 잘 먹고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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