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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May 26. 2022

o 이야기

나와 ㅇ은 어떤 관계일까. 그녀와 절교한지 4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나의 관계 역사에서 부모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4부작의 레누와 릴라의 관계가 우리만큼 역동적일까. 삶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공유한 그녀는 지금 내 곁에 없다. 해마다 우리의 이별을 다시 한번 분석해보곤 하는데 올해는 지금인 것 같다. 




나는 ㅇ을 고등학교 2학년때 같은 반에서 만났다. 우리 반에서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친구라고 생각했고 그녀와 차츰 친해졌다. 불안정한 가정 때문에 어둡고 냉소적인 나를 ㅇ은 판단없이 수용해줬다. 여름방학엔 거의 한달씩 그녀의 다락방에서 지내곤 했다. 우리 부모와 달리 허용적이던 ㅇ의 부모님 덕에 나는 쉼터를 얻을 수 있었다. 다락방에서 일본 만화를 보고 윤상과 류이치 사카모토를 듣던 나날들은 고등학교 시절 가장 평화로운 순간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새벽 클래식 fm을 듣다가 ㅇ이 불쑥 내 잠옷에 손을 넣어 가슴을 만졌다. 사티의 짐노페디가 나오던 그 푸른 어스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놀란 나를 보고 키득 거리던 ㅇ의 웃음은 잊혀지지 않는 영화 스틸컷처럼 남아있다.




우리는 그렇게 입시를 치르고 같은 도시의 다른 대학을 다녔다. 여중 여고를 나온 우리들은 헤테로 연애 문화에 휩쓸려 화장을 하고 힐을 신고 남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첫경험을 했다. 서로의 남자에 대해 얘기하고 그렇게 점점 멀어져갔다. 아무리 남자를 만나도 ㅇ의 공백은 채울 수 없었다. 23살 임용고사를 붙고 축제처럼 매일 술을 마시던 2월, 나는 어떤 정신에서 인지 ㅇ에게 고백했고 사귀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잤다. 섹스가 행복하고 황홀할 줄 알았는데 자고나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렇게 가다 간 그녀를 영영 못 볼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친구로 돌아가기로 했고 신기하게도 그 일이 없었던 것 처럼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사이 ㅇ은 대학원에 갔고 지도교수와 사귀게 되었다. 40대 후반의 두자녀의 아버지인 그 놈은 아내와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주중엔 ㅇ을 집에 들이고 주말엔 아내를 속였다. 이중생활은 오래지 않아 발각되었고 나는 ㅇ에게 그와 헤어지라고 했다. ㅇ이 내게 물었다. “네가 날 책임질 수 있어?” 그때 나는 레즈비언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우물쭈물 순간을 지나쳤다.




ㅇ과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궤적을 그리며 살아갔다. 우리는 1년을 차이로 각자 영국과 노르웨이로 석사유학을 떠났고 둘다 정착에 실패했다. 2012년에 ㅇ은 나와 같은 학부에 수능을 쳐서 다시 들어가서 2016년부터 영어과로 임용고사를 쳤다. 몇 년간 시험에 낙방했다.   




교수놈은 이혼도 안하고 ㅇ을 십여년째 만나고 있었다. 30대 중반이 되자 나는 ㅇ이 슬슬 미워지기 시작했다. 변변한 직업없이 교수의 첩으로 살아가는 ㅇ은 내가 알던 ㅇ이 아니었다. 처음엔 돈으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ㅇ을 포함해 4명의 친구가 함께 하는 모임에서 ㅇ이 돈을 낼 때 자신의 상황을 내세워 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것을 꼬집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단톡방에서 따돌렸다. ㅇ가 울면서 내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했을 때 당황했다. ‘나는 미워한 적이 없는데?’ 걔가 오바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말도 안 받아준다고 말했다. 처음엔 미안하다고 했고 그녀가 받아주었지만 나는 그 뒤로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러자 그 애는 ‘너는 언제나 나를 질투했다’고 하면서 절교를 선언했다.




나는 왜 그녀를 미워하게 됐을까. 가능한 이유는 나는 그 애를 더 이상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십대 중반까지 알바조차 하지 않으며 그 유부남에 얹혀 살아가는 것이 내게 화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왜 그것이 그렇게 화가나는 것일까.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는 여성이 왜 나를 화나게 하나.




나의 엄마는 가정주부가 되기를 선택하고 아빠가 하는 어떤 부당한 대우도 참아가며 살았다. 폭력, 경제적 통제, 가스라이팅, 불륜을 감내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 화를 나에게 풀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여자가 돈이 없으면 이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적성에 맞지 않고 번아웃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직장에 꾸역꾸역 다녔다. 돈이 없으면 당하는 무시가 맞지 않는 직장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더 싫어서이다. 맞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데 ㅇ은 그 남자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질투가 났다. 그 아이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겪은 것처럼 같은 비굴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땐 그 아이의 고통보다 그 아이가 받는 것이 더 크게 고깝게 보였다.




“네가 날 책임질 수 있어?”라고 하는 순간으로 돌아가 그 아이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이 파국을 막을 수 있었을까. “너 책임질 수 있어. 그리고 관계란 두사람이 같이 책임지고 만들어가는 거야.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어.“ 라고 말할 용기를 지금에 서야 가진다. 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몇 년은 더 일찍 내 자신에 진실하게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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