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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Apr 16. 2023

머리 풀고 나대기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를 읽고)

"xx야 , 평범한 게 최고 행복한거야. 무난하고 평범한 삶이 제일 행복한 거야"



엄마는 저 말을 내게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하재영 작가가 어머니와 번갈아 가면서 쓴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의 첫 번째 장 '평범한 여자아이 되기'에서 나온 '무난하고 평범한 삶이 행복한 거란다' 라는 하재영 작가 어머니 말이 내 나이 또래 어머니들이 다 같이 하던 말이라는 것에 새삼 놀랐다. 어디서 다같이 교육을 받고 왔던걸까.



엄마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본 적이 있다.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똑같은 머리 길이에 똑같은 양갈래 머리를 하고 똑같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뿔테 안경을 썼나 안 썼나 정도 차이였다. 몸집이나 키도 엇비슷했다. 60명이 넘는 여학생들이 용두산 공원에서 한 프레임에 빼곡하고 가지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50년대 생인 엄마는 아마 외할머니에게, 또 커서는 초, 중, 고등학교에서 '나대지 않고 유순한' 여자이기를 주입받고 자랐다. 문제는 80년대생인 나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조금 줄어들어 40명 정도 있는 한 반 교실에서 나는 엄마보다 더 나댈 수 있었을까? 초등학교 때는 반장 선거에서 여자애들은 담임에 의해서 은근히 부반장으로 밀렸다. 여자 중학교를 갔는데 거긴 더 숨막혔다. 키크고 예쁜데 똑똑하기 까지 하면서 발표를 잘한다? 나와 이름만 같고 성이 달랐던 친구는 그 이유로 내내 왕따에 시달렸다. 한번은 너무 심적으로 고통을 받았는지 교실에서 생리현상과 관련된 실수를 하였는데 그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꼬리표를 달고 다니다가 결국 다른 동네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잔인한 아이들의 놀이에 나도 방관했다. 나도 왕따가 두려워서 가해자 편에 서있었다. 고등학교때는 달랐는가? 레즈비언이 좀 많았다는 것 빼고 비슷했다. 수학 교사는 수업시간에 '너희들(여고였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이화여대 가는 게 최고다. 왜냐하면 시집 잘 가는 게 여자한텐 제일 좋은 거다.'라는 말을 뱉었고 우리는 아무 말도 못했다. 중학교 때 그 아이를 괴롭혔던 가해 주동자는 인문계 여자 고등학교에 와서 오히려 튀는 입장이 되었다. 몇 가지 사건에 휘말리더니 교사들이 합심해서 그 아이를 퇴학시켜 버렸다. 우리는 좋든 나쁘든 중간만 살아남는 것을 체득했다. 



지방국립대 영어교육과에 진학했다. IMF 이후 사범대 인기가 치솟아서 나는 전교1등을 해서 영어교육과에 갈 수 있었다. 정원 30명 중 대학교 인문계열 탑이 모두 우리과 여학생들이었다. 남학생들은 믿기지 않는 낮은 점수로 진학했는데, 그 아이들은 모두 임용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사립학교에 정규직으로 채용 되었다. 믿기지 않는 높은 점수로 임용 고사를 합격한 전설의 선배들은 지금 워킹 맘으로 일과 육아로 피곤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운 좋게 임용고사에 합격한 남학생들은 30대 후반에 벌써 승진하여 장학사가 되었다. 평교사 대부분은 여자들이지만 교장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하재영 작가는 '선거 기간에 담벼락이 남성 정치인의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던 것이, 저녁 뉴스에 등장하는 유명인사가 남성이었던  것이, 그래서 공적 장소에 어쩌다 '불쑥' 여성이 나타났을 때 의아함을 느꼈던 것이 어떤 인식을 지니게 했을까? 그런 경험의 축적이 나를 더 작게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기게 만들지 않았을까?' 라고 말했다.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라도 바꿔보려고 수업 시간에 페미니즘을 주제로 수업을 했다. 활동 제목은 'Where are the women?' 이다. 아이들을 조별로 앉혀서 내가 구독하던 시사잡지를 나눠주고 사진에 나오는 여자와 남자의 수를 세어보라고 했다. 여성 정치인이든 범죄자든 모두 세어보라고 했다. 어떤 호든 결과는 비슷했다.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1:9이었다. '여자들이 더 많이 보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고 질문하니 여자아이들이 용기있게 '학교에서 평등하게 가르쳐야 한다', '강경화 장관 같은 사례가 많이 생겨야 한다' 등 의견을 내었다. 그 주가 끝나고 이 학교 페이스북 익명 게시판에 나를 저격하는 글이 올라왔다. '남자, 여자 나누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바로 선생님입니다.' 이 사건은 들불처럼 번져서 내가 한 남자아이에게 말 실수한 것이 타겟이 되어, 남학생들이 내 페이스북을 염탐하고, 내가 워마드 회원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 남자아이 어머니에게 '고소' 협박을 받았다. '교사가 그런 사이트 회원이라는 것이 말이 되나요?' 나는 워마드 회원이 아니었지만 설상 회원이었다고 해도 그게 고소당할 조건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고소협박에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이후 수업 시간에 페미니즘 자료를 꺼내지 못한다. 엄마가 자란 6-70년대, 내가 자란 90-00년대를 거쳐 2020년대를 살고 있는 여학생들은 아직도 '나대지 말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내가 이런 조건에서 여학생들을 나대게 할 수 있을까? 



학생들과 이 주제로 자유롭게 말할 수 없어서, 교사들을 모아서 성인지 개선 교사 동아리 공모에 신청하여 시교육청에서 2팀 뽑는데 선발되었다. 선발된 사실을 알자마자 너무 신나고 기뻐서, 내가 존경했던 페미니스트들을 강연으로 섭외 하려고 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페미니스트 교사인 최현희 선생님은 이미 번아웃이 너무 심하게 와서 더 이상 강연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분이 얼굴을 내걸고 페미니즘 발언을 하고, 얼마나 심한 박해를 받았는지 우리 교사들은 똑똑히 지켜봐왔다.) 다른 강연자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실패와 성공을 겪고 이 모든 과정을 동아리 회원들과 나누었다. 그랬더니 한 멤버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조증이세요? 걱정되서 하는 말이에요.' 물론 그 회원도 여자이고 우리 둘 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남으려 애쓰다가 정신병이 와서 후유증에 시달린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40살이 되어서도 나대면 안된다는 메세지를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씁쓸했다.한국 여자들은 언제 나댈 수 있을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의무를 다 할 때? 할머니가 되어서? 엄마와 할머니의 경우를 보면서 여자들은 아무리 늙고 현명해지고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나댈 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기다리지 말고 지금 나대자. 지금 안 나대면 영원히 나댈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언제 울증이 올지 모르지만 지금 조증이 왔을때 머리에 꽃 달고 나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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