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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Jun 07. 2023

최후 통첩: 퀴어 러브 리뷰

1. 여자친구와 나는 2021년 8월에 레즈비언 앱 조이를 통해 만났다. 내가 아는 레즈비언 중에 가장 밝고 눈부신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레즈비언들은 사귀자 마자 살림을 합친다는 속설이 있다. 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귀어본 여자는 지금 여자친구인데, 그 속설대로 사귄지 7개월만에 살림을 합쳤다. 그것도 둘 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전재산을 털어서 내가 사는 지역에서 거의 최고가의 대단지 30평대 아파트를 전세로 계약했다. 이 아파트는 초등학교가 붙어있는 소위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여서 신혼부부가 선호하는 아파트인데, 우리도 당당히 신혼부부처럼 살림을 시작했다. 가족과 친구, 동료들에게 우리 관계를 공표했다. 시작은 당당했고 축복이 가득한 것 같았다. 

 

2. 지금 같이 산지 1년 반이 되었고 전세 계약 종료까지 반년 정도가 남았다. 우리는 고민하고 있다. 전세 계약때문에 관계가 묶여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이 사람과 내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지. 법적으로 혼인을 할 수 없는 한국 레즈비언들은 '다음 단계'를 어떻게 밟는 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다음 단계'란 가족과 친구를 초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상속 유언장을 쓰는 것이다.(한국에서 동성애자들은 급사하면 큰 일 난다. 내 재산이 내가 가장 증오하는 형제자매에게 자동으로 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파트너에게 상속을 명시하는 유언장을 쓴다.) 그런데 다음 집을 알아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여자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언니, 우리 이번 전세 계약이 끝나면, 따로 살자. 그리고 각자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 정말 '결혼'할 건지 결정하지 않을래?' 

 

3. 여자친구가 일방적으로 '최후 통첩'을 한 것 처럼 들리지만, 사실 끊임없이 방황한 것은 나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던 부모 때문에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안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여자친구 덕에 기적적으로 2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여자친구 덕분에 10년 넘게 앓고 있던 우울증과 공황 장애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끊임없이 '이 사람이 그 단 한사람이 맞는지?'를 의심하고 여자친구를 괴롭혔다. 여자친구는 그 난리통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마지막으로 내게 최후 통첩을 날린 것이다. 사실 이건 여자친구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나도 늘 생각한 것인데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여자와 남자 모두 사귀어본 나는 이것이 흥미로운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내 감정이나 생각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다. 남자친구들과 있을 땐 내 감정이나 생각을 속이기가 쉽다. 하지만 여자는 불가능하다. 거의 뇌가 연동되는 수준이니 여자친구를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4. 여자친구가 최후통첩을 날리고 얼마 안 있어서 넷플릭스에 '최후 통첩: 퀴어 러브'가 나왔다. 포맷은 이렇다. 레즈비언 5쌍이 나오는데, 각 커플 중 한 명이 상대에게 '최후 통첩'을 날린다. 최후 통첩 한 사람은 주로 결혼이나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3주간의 다른 파트너와 '실험 결혼'을 거쳐 나나 상대방이 '단 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관계를 끝낸다.  5월 28일에 나온 이 시리즈는 아직 결말이 공개되지 않았다. 

 

5. 5쌍의 레즈비언 커플은 모두 매력적인 20~30대 여성들로 잰더(최후통첩 한 사람, 이하 최후통첩)-바네사, 맬-욜리(최후통첩), 티파니-밀드레드(최후통첩), 오시-샘(최후통첩), 렉시(최후통첩)-레이 이다. 이들은 잰더-욜리, 바네사-레이, 티파니-샘, 밀드레드-오시, 렉시-맬로 재분배되어 3주간 실험결혼을 해 본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3주도 못채워서 새 파트너가 이해가지 않는다고 집을 나간 사람도 있고, 장난스럽게 섹스한 뒤 친구처럼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단 3주 동안 새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진지하게 갈아탈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은 3주간 실험결혼을 마치고 원래 파트너와 더 불이 붙고 더 헌신하게 된다. 대체적으로 최후통첩 받은 사람들, 즉 확신 못했던 사람들이 헌신을 약속하며 최후통첩 한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게 된다. 

 

6.가장 흥미로운 '새' 커플은 잰더와 욜리였는데 둘다 최후통첩 한 사람들이고, 원래 관계에서 헌신을 담당하는 쪽이었다. 둘 다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가지는 계획을 가장 구체적으로 짜는 사람들이었다. (이 부분은 한국에서 불가능한 부분이라서 보면서 무척 부러웠다.) 잰더의 원래 파트너인 바네사는 이 시리즈의 최고의 빌런으로 4년이나 헌신한 잰더를 함부로 대하고, 아무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 거리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욜리의 원래 파트너는 맬인데, 이 사람 역시 말만 헌신을 약속하고 실제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잰더와 욜리는 만나고 3주만에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똑같이 이렇게 말한다. '새 파트너와 있으면 자연스럽고, 노력없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고. 

 

7. 이 시리즈를 같이보고 여자친구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녀는 울면서 말하길 '언니에게 더 맞는 - 자연스럽고 노력없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해? 그게 남자면?' 그건 내가 여자친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여자친구는 평생 남자에게 끌린 적이 없는 순도 100프로의 레즈비언인데, 나와 휴식기를 가지면 남자를 만나보겠다고 했다. 여자친구는 신체적으로 남자에게 끌린 적은 없으나, 무척 보수적인 사람이고,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이지만 화목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동성애자로서 소수자성'인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 어려운 길을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고민한다.

 

8. 나의 고민은 가끔씩 다른 사람- 주로 남자들- 에게 끌린 다는 것이다. 양성애자라고 하지만 대부분 남자와 연애를 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감각이 개발되어 있어서 일수도 있고, 나도 마음속 깊은 무의식 속에 그 소수자성이 두려워서 일 수도 있다. 나는 마치 이런 상태인 것 같다. 비건이 옳다고 생각해서 비건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씩 간절히 고기맛이 생각나는 상태. 그 고기를 인생 내내 씹고 별로 좋은 적이 없었는데도 한번 씩은 그 고기가 그리운 것이다.   

 

9. 이 시리즈는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 꼭 잰더와 욜리뿐만 아니라 다른 커플들을 보면서 얻은 교훈은, 오래된 커플이라고 잘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기 까지 와서 이걸 신청한 커플들에게서 대체적으로 '해로운 관계(toxic relationship)'의 요소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오시 와 렉시는 상대방에게 통제적(manipualtive)한 사람들이다. 오시는 당장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주체를 못하는데, 파트너인 샘이 헌신적으로 오시를 받아주고 있다. 렉시 역시 자신의 사랑 방식을 상대에게 요구하며 상대방을 질식하게 만드는데, 자존감이 낮은 레이가 렉시에게 붙들려 있다. 멀리서 보면 '왜 저 사람이 저 사람과 만날까?' 하지만 그 역학 구조가 그럴 수 밖에 없어서 만난다는 게 참 신기한 인간사다. 

 

10. 다시 돌아와서, 나와 여자친구는 실험 휴식 기간을 가지게 된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상대가 '단 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실험을 행복하게 종료 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욜리와 잰더처럼 더 맞는 짝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프로그램처럼 훌륭한 선택지들을 제공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혼자 있다가 혼자가 더 나은 것을 알게될 지도 모른다. 불확실성속에 선택을 해야하고, 우리는 거기에 책임을 져야한다. 나와 상대방의 인생을 존중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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