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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Jun 25. 2023

레즈비언 부트캠프 체험기

나는 어떻게 후천적으로 레즈비언이 되었나?


나는 후천적 레즈비언이다. 이 문장에 화가 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일단 내 여자친구는 그렇다. 정체성 혼란 때문에 사경을 헤매는 동성애자들이 있다. 정상성 세상에서 자신의 선천적 특수성을 끼워 맞추다가 온 몸이 고장이 나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회색분자이자 미꾸라지다. 



나는 스스로 양성애자라고 생각한다. 여자에게 처음 성적으로 끌림을 느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즘 이었다. 우리 그룹의 리더 격인 여자아이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얼굴은 예쁘장했는데 성격은 호방한 장군감이었다. 그 아이 집에는 당시 흔하지 않은 침대라는 물건이 있었는데, 밖에서 타던 퐁퐁(트렘펄린)을 안에서도 탈 수 있어서 우리는 흥분했다. 그 호방한 장군이 아이들 보고 '침대위에 올라온나!' 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장군네 부모의 더블 침대 위에 올라가서 뛰고 굴렀는데 그러다가 장군이 내 몸 위로 쓰러졌다.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영원히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은 유치원 때 한 남자 아이 손을 잡았을 때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동성애를 인식한 것은 고등학교때 부터이다. 이 여자고등학교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오랜 레즈비언 문화가 있었는데 레즈비언 소굴이었던 만화창작부부터 짝언니 문화까지 있었고, 레즈비언이 한 반에 하나 이상은 꼭 있었던 특이한 학교였다. 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때 체험한 여러가지 일들은 먼 훗날 할 결심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대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불안했다. 내 소중한 여자친구들이 하나 둘 남자친구를 사귀고 나는 순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들이 군대를 갈 때 즘 엔 그 아이들은 피임에 대해 걱정했고 나는 들어줬다. 나는 그 세계가 궁금하기도 했다. 무엇이 여자아이들을 변하게 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겨우 그 세계에 발을 담궜다. 



많은 남자들을 좋아하고 또 그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대부분 안정적인 관계를 가지는데 실패했다. 아버지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지만 번번이 아버지와 닮은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든 아니든 상처주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끊임없이 올라왔다. 



강남역 사건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로 여러가지 바람이 불었는데 그것이 부산에 사는 삼십대 후반인 나의 뺨에도 느껴졌다. 코로나가 시작될 즈음에 나는 본격적으로 레즈비언 만남 앱을 쓰고 있었는데, 그 때 만난 레즈비언이 L작가가 여는 글쓰기 강좌를 소개시켜 줬다. 



L작가의 글쓰기 강좌는 수업이라기 보다는 부트캠프(신병교육소)에 가까웠다. 거기 참가한 열 댓명의 부산의 페미니스트는 수업을 듣고 레즈비언 지망생이 되었다. L작가는 페미니즘을 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해 다음 단계인 레즈비어니즘을 실천하자는 혁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가 쓰고 번역한 5권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커리큘럼이었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끼리 불꽃이 일어났다. 글쓰기 강좌는 전국 수강생끼리 모이는 캠프로 확대 되었고, 나는 그 열기를 보존하기 위해 나의 아파트를 거점으로 삼아 1년간 레즈비언(지망생) 페미니스트 실험 공동체를 만들었다. 모계사회 ‘모쒀’족의 이름을 따 ‘매드 모쒀’라는 이름을 붙이고 한 달에 두 번씩 합숙하며 시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등산을 하고 서핑을 했고, 책을 만들었다.



이 실험 공동체를 운영하는 동안 나는 족외혼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레즈비언 지망생이어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 것을 지양했다. 그것은 그래야만 하는 규칙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이해된 이유가 한줌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자 레즈비언 지망생들)과의 관계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이다. 평생 우리의 욕구와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던 경상도의 장녀들은 그렇게 밥을 해먹고 같이 부대끼고 이상적으로 살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해받지 못한 장녀들끼리 모였다는 점에서 서로 힘이 될 수 있었으나, 그 안에도 여러가지 갈등이 있었다. 래디컬 페미니즘을 급하게 삼켜서 서로 자신이 완전히 소화한 것도 아닌 사상을 가지고 서로를 검열했다. 치마가 안된다면 여름에 원피스도 안될까? 레즈비언 관계를 지향하지만, 외모에 끌리는 것을 배제해야 하나? 래디컬 페미니스트면서 체중에 신경쓰는 것은 또 어떠한가? 이런 주제로 우리는 토론하기도 하고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페미니즘 외에는 공통 분모가 없는 여자들끼리 모여서 1년간 신나게 놀고 또 싸웠다. 



일년이 지나고 나는 조금 더 좁은 바운더리의 사람과 더 깊게 교류하고 싶었다. 그렇게 1년간 레즈비언 양성 과정을 거쳐 나는 진짜 레즈비언이 되었다. 양성애자라고 하였지만 여자와 진지하게 연애한 것은 만 37세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페미니즘 때문에 레즈비언이 된 내가 연애하고 살림을 차린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며 심지어 과한 페미니즘(래디컬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놀라운 모순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 다양하고 또 내 좁은 생각을 포용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현재 내 여자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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