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오늘 할 일 많으니 다 같이 야근입니다잉?
야 이주임, 길 건너 새로 생긴 중국집 맛있더라. 짜장면 사람수대로 시키고 탕수육은 대자로 주문해!"
아, 진짜 짜증이 확 올라왔다.
야근은 안 그래도 힘든데
예고도 없이 당일 퇴근시간 다되어 통보된 야근은
입안에 머금은 채 삼키기 싫어 버티는 사약이었다.
꼰대리는 항상 저런 식이었다.
본인이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은 굳이 야근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거리로 삼아서 밑에 직원들까지 가지 못하게 사서 일을 시켰다.
옆에 있는 직원을 남게 해서 같이 저녁 먹고 일을 시켜 먹는 못된 심보가 있었다.
저녁메이트와 야근동지까지 한꺼번에 만드는 스킬이었다.
꼰대리.
그는 20대 초반에 입사를 해서 사회물이 빨리 많이 들었고,
많지 않은 나이에 구닥다리 사고방식과 위계의식으로 무장한 젊은 꼰대, 일명 '젊꼰'이었다.
내가 꼰대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나이가 30대 중후반이었다.
그는 아내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내를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항상 집에 늦게 들어갔다.
물에 빠져도 입은 떠오를 것 같은 수다쟁이 꼰대리가 와이프 앞에선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는 건,
일부 남직원들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절대 상상도 못 했을 사실이었다.
그는 항상 집에 늦게 들어갈 핑계를 대며 사무실에 눌러앉거나 각종 모임을 찾아다녔다.
덕분에 퀵마우스 바당발 꼰대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항상 말을 따발총처럼 쏴댔기 때문에
안 해도 될 말, 안 하는 게 나은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필터 없이 쏟아냈다.
에너지의 대부분을 뇌가 아닌 입에서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야, 박주임! 너 오늘은 남직원 축구모임에 오는 거 맞지? 이번엔 빠지지 마, 임마!
형아들 다 오는데 넌 어째 맨날 빠질 궁리만 하냐."
그는 온갖 모임이란 모임은 다 섭렵하고 다니며 안 나오는 직원들에게 핀잔을 했다.
"야, 이주임! 넌 어떻게 선배가 술 마시자는데도 한 번을 안 오냐? 글러먹었어, 저거."
매일 자신과 술마셔주며 이야기 들어줄 직원들을 인형 뽑기 하듯이 집어내고 다녔다.
직원들은 처음엔 어느 정도 받아주다가 나중엔 슬금슬금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너 요새 뉴페이스 여자 생겼냐? 옆부서 은혜랑 한참 만나더니 요새는 찢어졌나 봐?"
남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방송을 하듯이 떠들어댔다.
그가 알게 된 순간, 비밀은 순식간에 공공재로 변했다.
"야, 노을! 넌 술 한 잔도 안 먹냐? 윗분들 다 드시는데 그건 예의가 없는 거야. 노래라도 불러! "
그는 사무실회식, 야유회, 소모임을 주도했고, 물론 음주가무도 매우 즐겼다.
직원들에게 늘 술을 강요했고 마시지 않으면 대놓고 구박을 했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나는 더더욱 보란 듯이 술을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기도 했지만, 괜히 더 오기가 났다.
나의 간기능을 꼰대리가 따라주는 술을 해독하는 일에 쓰고 싶지 않았다.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 꼰대리는 정치질에도 능했다.
사람 봐가며 상황 봐가며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만만한 상사들은 적당히 뭉개며 맞먹었고
깍듯하게 대해야 할 사람에겐 세상없이 예의를 차렸다.
회사의 모든 일과 모든 사건은 다 알고 있다는 듯 거들먹거렸다.
본인은 꼭 회사 임원이 될 거라는 말도 종종 하고 다녔다.
굳이 저런 이야기를 왜 공공연하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냄새가 나면 벌레가 꼬이는 것처럼
쓸데없는 말은 남의 반감을 사서 적을 만들기에 딱 알맞다.
저 사람은 그냥 입만 닫고 있어도 반은 갈 것 같은데,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부지런하게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다녔다.
흡사 모기처럼 옮겨 다니며 말을 전했다.
"야, 너 김대리랑 사이 안 좋냐? 걔가 너 아주 개무시하더라? 걔가 뭐라고 했냐면 어쩌고 저쩌고"
같은 말도 뉘앙스를 바꿔서 전달한다거나 절묘하게 부풀려서 이간질을 했다.
"그래 그래. 네가 거기서 고생한 거 모르는 사람 있냐. 걔가 너무했지."
편들어주는 척, 공감해 주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상대방에게 신뢰를 얻는 수법이었다.
"꼰대리가 하는 말 다 믿지 마. 쟤 하는 말 중에 반이상은 사실인지 알 수가 없어."
내가 처음 꼰대리와 일하게 됐을 때,
그와 오래 일하셨던 어떤 과장님이 해주신 말씀이다.
꼰대리와 지낸 지 단 며칠 만에 저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람한텐 이렇게,
저 사람한텐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이런 꼰대리에게 내가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건 그의 성희롱 컬렉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