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부장은 승진을 하면서 사내에서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웃으면서 뼈 있는 말을 하던 그는, 이젠 대놓고 권위적인 사람으로 탈바꿈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대리라는 여직원이 육아휴직을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반부장은 부서의 업무공백을 이유로 육아휴직을 요청한 여직원에게 대놓고 눈치를 줬다.
김대리와의 면담에서 애 봐줄 사람 없냐, 안 가면 안 되겠냐 하며 회유를 하다가 나중엔 가지 마라, 돌아오면 네 자리 보장 못한다 등의 말을 했다고 한다.
"여자들은 뽑아놓으면 꼭 저런다니까. 임신했다고 이 근무 저 근무 다 빠지고 야근도 못하고. 거기다 애 키운답시고 들어가 버리면 뭐 방법이 없어. 에잇."
김대리와 면담을 하고 나와서 씩씩대며 저런 말을 해대는 걸 듣고 있자면, 미혼인 나 조차도 너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
그 경고는 육아휴직을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김대리들'을 조준하고 있었다.
나도 그 사정거리에 있었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회사에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너무 모순적이었던 건,
자신의 딸이 출산했다며 휴가를 내고 딸과 손주를 보러 가던 그 모습이었다.
반부장의 딸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출산을 하고 육아휴직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당신 딸이 아기 낳고 키우는 건 챙겨줘야 하는 소중한 일이고,
남의 딸의 육아휴직은 회사에 피해를 주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중성에 반감이 절로 들었다.
김대리는 결국 싸우다시피 하며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그리고 육아휴직 이후에 복귀를 하지 않고 사표를 냈다.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줄 알고?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볼 거야.]
퇴사를 하는 김대리의 sns엔 저런 저격 글이 올라왔다.
그녀는 복귀를 해도 반부장과 계속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예 퇴사를 마음먹고 육아휴직을 사용한듯했다.
한 번은 연이어 이어지는 야근에 직원들이 불만을 토로한 일이 있었다.
몇 달째 이어지는 고강도의 야근이었고, 직원들의 피로도가 극에 당한 상황이었다.
시간 외 수당 제도가 제대로 정착이 안된 시기여서 초과근무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한 직원들의 불평이 이어졌다.
월례회의 시간에 반부장이 직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 중에 와서 일 좀 해달라고 누가 사정해서 온 사람 있습니까? 다들 본인이 일하겠다고 자진해서 온 거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은가 이 말이야!"
그는 회의 내내 열을 올렸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 정리를 하고 있는 내 귀에 반부장이 다른 부장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놈들은 정신상태가 글러먹었어. 더 굴려야 해. 허허허. 맞아야 말을 듣는다니까?"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권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저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싶어서 놀랍기도 하고 기운이 쭉 빠졌다.
저 사람에게 직원들은 그저 일하는 기계였고 부속품일 뿐이었다.
그의 삐뚤어진 오너마인드는 조금의 틈도 없이 냉정했다.
그 이후 반부장은 정년퇴직을 하게 됐다.
퇴임식을 하는 그의 얼굴엔 자부심과 함께 시원섭섭함이 보였다.
몇 달 후에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지나가다 들렀다며 사무실에 온 반부장을 만나게 됐다.
바쁘기도 했고 마땅히 준비된 게 없어서 노랑믹스커피를 타서 그의 앞에 내려두었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근황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순간 깜짝 놀랐다.
내가 나도 모르게 싸늘한 눈으로 반부장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와 눈이 딱 마주친 것이었다.
입은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 눈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인스턴트커피를 내오듯 그를 대하고 있었다.
예전에 웃으며 뼈 있는 말을 날리던 그를,
나도 똑같이 웃는 얼굴로 창백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는 적금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말과 행동은 계속 쌓여가고 언젠간 돌려받게 된다.
대체로 선보다는 악이 더 고금리이다.
반부장은 사람들에게 부은 게 없으니 돌려받을 게 없었다.
그가 받을 이자는 5초면 만들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 딱 그만큼이었다.
그가 자리의 무게로 사람들을 잠시 휘두를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마음까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강압은 빠른 방법일 수는 있어도 옳은 방법은 될 수 없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식어가듯, 금방 없어질 뜨거움이다.
마음에 없는 인사를 나누고 멀어져 가는 반부장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자리는 잠깐이지만 사람은 계속된다는 걸 말이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내가 저 나이가 됐을 때는
향기롭고 따뜻한 차를 정성껏 대접해주고 싶은 사람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두고두고 은은하게 생각나는 고마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