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이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모욕이 자존감으로 바뀌는 과정

by 놀마드놀








"노을씨, 내가 꼰대 같나?"









아침 7시 30분부터 시작된 직원회의.

동태눈을 하고 비몽사몽으로 앉아서 피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내게 대표가 질문을 던져온다.

그의 물음에 100개가 넘는 눈동자가 빙그르르하고 순식간에 나를 향한다.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네.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저 사람은 내가 다니는 회사의 대표다.

지금은 직원들이 다 모인 회의시간이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인 경우가 많다.

자만에 가득 찬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저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해줘야 했다.







"대표님은 꼰대 아니십니다."






만족한 듯한 대표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역류한다.

'이야 ~ 얼굴색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 잘하네!'라는 생각이 들지만,

생존을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변명을 해본다.






















나는 한 번도 대표에게 솔직한 마음을 말한 적이 없다.

11년 다닌 회사에 퇴사의사를 밝히고 그와 면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표는 나를 다독이며 어르고 달랬다.



"그래, 11년이면 지칠 때도 됐지. 좀 쉬었다 오도록 해."









단지 지쳐서만은 아니었다.


건강상의 이유가 가장 컸다.

몸의 건강, 마음의 건강, 그리고 자아의 건강.


나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

이 회사 안에서는 결코 나로 살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구구절절 내 속마음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 사람이 이해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굳이 이해를 얻을 문제도 아니었다.


이 안에서 저 사람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퇴사뿐이었다.







한 달 반 동안의 연차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퇴사결정엔 변함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사직서를 쓰고 인사를 하러 간 나에게 대표는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내가 봤을 때 네 내성적인 성격으로는 어딜 가도 적응 못해. 네가 여기에 있으니 이 정도나 일하고 있는 거지. 지금 네가 어딜 가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니?"


"지금 네 나이가 참 애매해. 너처럼 나간 얘들 몇 명 봤는데, 다 구멍가게 같은 회사 경리나 하면서 살더라. 너 여기 직원이 낫니, 구멍가게 경리가 낫니?"


"너 돈은 많이 모아놨어? 아니면 부모님 가업이라도 이어받을 게 있어? 없잖아. 미혼인 여자가 경제력도 없다? 너 금방 우울해지고 집에만 틀어박혀있다가 정말 큰일 난다."


"나도 이렇게 싫은 소리 안 하고 사표수리하면 편해. 딸 같아서 이렇게 기회를 주는 거야. 남 같지 않아서. 내 말 들어, 너."







대표는 정말 듣고 있기가 힘든 수위의 말들을 쏟아냈다.


말은 정말 간단하면서도 깊게 상처 줄 수 있는 효율적인 흉기이다.


그가 휘두르는 말이 마음을 찔러온다.

콸콸 분노가 쏟아졌고, 너무 아팠다.







그가 정말 나를 걱정해서 회사에 앉혀두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퇴사로 이어질 다른 직원들의 도미노 퇴사가 걱정됐을 것이고,

본인의 인사관리능력과 리더십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이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왕국에 그 어떤 작은 흠집도 허락할 수 없었으리라.









나는 퇴사한 후에도 그가 뱉은 말들을 주워 담아와서는 두고두고 꺼내보며 아파했다.


'웃기지 마. 내가 왜 그렇게 돼? 당신이 틀렸어.'


대표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오기가 났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흐려졌고, 더 이상 화가 나거나 열받지도 않는다.



이렇게 바뀐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생긴 덕분이다.

내게는 누군가가 단점이라 지적한 것들을 강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표의 말처럼 내성적인 성격에 애매한 나이의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혼자 있는 걸 즐기며 내적에너지가 가득한 나는, 글을 쓰는 게 정말 좋다.


짧지 않은 사회생활을 통해 물러터지고 여렸던 내면이 조금 더 단단해졌고, 그때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에 다른 걸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게 행복했고,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누군가 내게 단점이라고 꼬집었던 것들이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보물이었다.









아픈 말이 주는 분노와 상처로 나를 자극하고 채찍질해서 성과를 내고 싶지는 않다.


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진 덕분에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받아넘길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날카로운 말 때문에 아프다면, 따끔하게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는 약침정도로 생각해 버린다.


아니면 매달 들어오던 월급의 달콤함이 그리울 때 써먹기도 한다.

저런 마인드를 가진 대표가 이끄는 조직에서 나온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니, 월급이 없어진 불안은 안도로 바뀌었다.








누군가 나를 찔러오는 아픈 말을 던질 때, 아픈 만큼 나를 더 믿어본다면 좋겠다.


누군가 당신에게 모욕을 줬던 요소들이 당신을 빛나게 해 줄 멋진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모욕은 오히려 자존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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