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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마드 노을 Feb 08. 2024

스페인에서 고독한 대식가의 하루를 보내고 왔더니



먹순이인 나에게 호텔에서의 즐거움을 꼽으라면 '조식 먹기'가 단연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바르셀로나에서 5박을 머문 페럴렐호텔에서도 두 번이나 조식을 먹었다.


15유로 정도 하는 심플한 조식이지만, 눈곱만 떼고 내려와 조식 먹는 재미는 절대 심플하지 않다.

앗 그런데.

맛있어 보여서 갖고 온 햄과 베이컨이 젓갈 씹는 것처럼 너무 짜서 한입 먹고 다 남겼다.(아까워ㅠ_ㅠ)

스페인에서 음식을 먹을 때 존재감이 너무 강한 짠맛 때문에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나라 다른 건 모르겠고 소금하고 설탕 인심은 엄청 후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조식 메뉴 중에 제일 맛있었던 건 당도 염분도 첨가되어있지 않은 두유였다.

소금에 절여진 혀를 달래주는 담백한 두유맛에 반해서 유리컵에 한가득 따라 3잔을 마셨다.  








패럴렐호텔은 꽤 유명한 핀초거리 바로 옆에 있다.

핀초는 바게트나 빵 위에 식재료를 올리고 핀으로 꽂아서 고정해 놓은 스페인 음식이다.

오늘은 그동안 궁금했던 핀초를 비롯해 맛있는 걸 먹으며 고독한 대식가의 하루를 보낼 생각이다.

며칠 동안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았기 때문에 일단 영양제를 사러 가장 가까운 약국부터 갔다.

약사님께 스페인어 번역기를 동원해 열심히 내 상태를 설명하고 종합비타민과 철분제를 달라고 했다.


마이 해드 빙빙, 컨디션 이즈 헬헬, 아이 원츄 비타민! 


뭐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고 받은 게 저 주황색약이다.

두 종류의 약을 달라고 했는데 한 가지만 주셔서 의아해하니까 저거 하나면 된단다.

구글번역기로 성분을 대충 훑어보니 비타민과 철분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오히려 좋네 싶어서 고맙다고 했더니 약사님이 씩 웃으시며 엄지 척을 해 보이신다.

오미... 양심적이신데 귀여우시기까지 하다. (^_^)





그렇게 약을 사들고 나와서 미리 봐뒀던 핀초맛집에 들어갔다.

조식을 많이 먹어서 배가 불렀지만, 가보고 싶은 맛집이 많았기에 위에게 양해를 구하고 과식을 좀 했다.


여긴 어제저녁에 왔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로 나왔던 곳이다.

저 입구 옆에 벗겨진 페인트벽 때문인지, 뭔가 오래 영업을 해온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오픈시간에 딱 맞춰 들어갔더니 어떤 백인 할아버지가 이미 한 잔 하시고 계셔서 흠칫 놀랐다.

대낮부터 혼자 술 마시는 게 좀 뻘쭘했는데 뭔가 반갑다.

착한 가격에 가지런하고 먹음직스러운 핀초들이 엄청 많았다.

너무 귀여워서 은근 힐링이 된다.


조식 먹은 게 아직도 소화가 안 된 상태라서 귀요미 핀초 두 개랑 레몬맥주 끌라라를 시켰다.

나는 술을 즐기지 않지만 분위기가 좋으면 달달한 술 한 잔 정도는 마시기도 한다.

스페인 끌라라는 이런 나의 취향저격을 정확히 저격하는 달달하고 시원한 레몬맥주였다.

난 또띠야 안에 야채 고기 등이 들어있는 핀초를 골랐는데, 전자레인지에 돌려줘서인지 또띠야가 살짝 눅눅했다.

기대에 못 미치긴 했지만 운치 있는 바에서 레몬맥주 한 잔에 먹으니 그냥 분위기로 다했던 것 같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좀 돌아다니다가 계속 먹어보고 싶었던 젤라또 맛집에 들렀다.

구글평점을 안 찾아보고서 평점이 낮은 식당에 들어가 본 뒤로는 구글평점을 꼭 참고해서 맛집을 찾았다.

바르셀로나 메인거리인 람블라스거리에서 살짝 골목에 있는 젤라또집이었다.


젤로또 한 컵이 4유로가 안 되는 가격이었고 코코넛맛을 골랐다.

근데 직원 분이 컵 하나에 두 가지 맛을 섞을 수 있다며 한 가지를 더 고르라고 한다.

아하! 추천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헤이즐럿을 말씀하시기에 그걸로 달라고 했다.

그렇게 받아온 두 가지 아이스크림.

뭐가 더 맛있었을까.

역시 이런 곳에선 점원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난 코코넛을 좋아해서 당연히 코코넛이 더 맛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헤이즐럿이 더 맛있었다.

코코넛 젤라또는 코코넛이 계속 씹혔는데 그 식감이 생각보다 조화롭지는 않았다.

부드럽고 달달하면서 헤이즐럿이 바삭하게 씹히는 헤이즐럿 젤라또가 더 괜찮았다.

이런 소소하지만 의외의 상황에 은근한 즐거움느끼며 젤라또를 먹었다.








저녁식사는 람블라스거리 야외에서 하고 싶어서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지럼증이 계속되고 있어서 영양보충을 하고자 이틀 연속으로 소고기 스테이크를 시켰다.

난 사실 스테이크를 미디움웰던으로 익혀먹는 촌입맛인데, 거의 레어로 고기가 나왔다.

원래 피가 나오는 고기는 잘 못 먹지만 스페인에 와서 며칠 동안 어지럼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직원에게 더 익혀달라고 말하기가 귀찮아서 약이려니 생각하고 그냥 먹었더랬다.


람블라스 거리에는 이렇게 야외테이블이 많아서 분위기 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혼자 고기를 씹고 앉아있자니, 자연스레 주변을 관찰하게 된다.

계속 바뀌는 테이블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꽤 재미있다.


난 너무 추워서 따뜻한 차를 시켰는데 옆에선 맥주를 마셔대는 걸 보며, 대한민국 얼죽아의 스페인버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들어간 식당은 람블라스 거리에서 햇볕이 들어오는 쪽이라서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반면, 반대편 쪽은 건물에 해가 가려져있어서 영 사람이 없었다.

반대편 식당 직원이 굳은 표정으로 내가 앉아있는 식당 쪽을 쳐다보고 있어서, 저쪽으로도 손님들이 좀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은 고독한 대식가의 식도락투어로 하루를 보냈다.

원하는 분위기의 식당도 갔고 평소 먹어보고 싶었던 걸 많이 먹으며 궁금증도 해소했다.


그런데 하루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달달하고 맛있었던 레몬맥주도, 귀여운 핀초도, 입에서 살살 녹는 쫀득한 젤라또도, 분위기 있는 야외에서 먹은 스테이크도 아니었다.



연박을 하면서 짐을 이리저리 꺼내 놓고 다니는 바람에 귀걸이가 어딨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아끼는 귀걸이였는데 못 찾고 나와서 계속 찝찝했는데, 저녁 먹고 호텔에 들어와 보니 책상 위에 그 귀걸이가 놓여있는 것이었다 (!)

룸청소하시는 분께서 찾아서 올려놔주신 듯했다.


누군가는 '청소하다 발견했으면 저렇게 놔주는 게 당연한 거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호텔 들어가서 귀걸이 찾아봐야지 하고 신경 쓰고 있던 나에겐 뜻밖의 큰 선물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걸 경험하고 없었던 걸 손에 넣었던 즐거움도 컸고,

지금 갖고 있는 것의 귀중함을 한 번 더 확인했을 때의 감사함도 정말 진하게 느껴졌던 하루였다.



 해 가지면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늘 하루가 일찍 끝나는 것 같아서 항상 좀 아쉬웠다.

그러나 어지러움증을 해소시켜 줄 약도 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야외에서 분위기도 내고, 귀걸이까지 찾고 보니, 너무 좋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가득 차면서 아쉬운 마음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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