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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마드 노을 Aug 08. 2023

묻지 마 범죄의 가해자는 바로 나였다

물어봐야한다, 다 이유가있다

치안이 좋기로는 최고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에서 요 며칠사이 묻지 마 칼부림이 이어지고 있다.

끔찍한 뉴스를 접하며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역시 놀람과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총기사용이 규제되는 나라이기에 칼부림이지, 미국처럼 총기사용이 허용됐다면 바로 총이었을 것 같다는 섬뜩한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아무나 걸리면 다 죽인다는 식으로 휘두른 칼날에 누가 언제 어떻게 당할지 알 수 없고

피해자는 다름 아닌 '하필 재수 없게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이다.

매일 다니던 길을 걸으면서 '범죄자와 마주치지 않기'라는 복불복게임에서 살아남길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일상에 상상이상의 긴장과 공포를 몰고 온다.


범행동기는

사는 게 힘들어서

세상이 싫어서

나만 불행한 게 억울해서

남이 행복해 보이는 게 싫어서

였다.


허나 그 분노의 칼날에 희생당한 사람이 정말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너무 불행하고 좌절스러운 현실에서 열심히 살아보고자 하루하루 버텨내던 '그저 나 같은 사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참 모순인 것 같다.


봇물 터지듯 이어지는 모방범죄를 보며 자본주의 성과주의의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적 고립이 만들어낸 부러움과 좌절, 질투와 분노, 증오의 감정은 이제 대한민국의 지병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의 신음소리는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울려 퍼지고 있다.

떨어지지 않는 자살률과 떨어지기만 하는 출산율이 수치로 증명하고 있고

엄격한 잣대로 남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프로불편러들이 만연하며

'ㅇㅇ충'이라며 남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하고

무분별하게 타인을 비방하는 인터넷 악성댓글로 표출하기도 하다가

결국엔 세상을 향한 칼부림이라는 증오의 토악질에까지 이르렀다.


정상적인 사람들도, 사이코패스인 사람들도, 사이코패스가 된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 이 사회가 만든 평가의 영향권 속에서 크고 작은 비바람을 맞고 있는 것 같다.

그 안에서 풀뿌리처럼 굳건해지고 강해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꾸역꾸역 먹고 자라 세상에 분노를 게워내는 괴물이 되었다.


누군가를 괴물로 만든 이 사회와 현실이 안타깝고 슬펐다.

우리 사회는 맞다 틀리다의 선을 명확히 그어놓고 그 선을 밟으면 가차 없이 탈락시켜 버린다.

획일화된 성공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내집단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어 외톨이, 패배자를 만든다.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은 높고 투명한 계층이동의 장벽 앞에서 가진 자들이 사는 세상을 무기력하게 구경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특성과 개성,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갈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이 이런 너그럽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조금 덜 바쁜 일상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제도와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장애가 있든 없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예쁘든 예쁘지 않든, 뚱뚱하든 날씬하든,

어떤 지역출신인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나라사람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남자든 여자든, 피부색이 까맣든 하얗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나름의 신념을 갖고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자체가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생각과 색깔이 다르고 내 기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남에게 던진 비난의 눈초리와 말, 행동은 결국 칼이 되어 돌아온다. 비난의 눈빛 한 번, 말 한마디가 세상을 찌르는 흉기로 돌아온 게 아니었을까.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내 가족, 내 사람들을 위해서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만든 잣대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름 아닌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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