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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lnoc May 20. 2018

인문/게으름에 대한 찬양

쉬어도 괜찮다고, 조금 일해도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첫 챕터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In Praise of Idleness, Bertrand Russell)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게으름의 대한 찬양'이라는 제목만 보고 힐링, 휘게 등 휴식의 순기능에 관한 내용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게으름'에 관한 첫 챕터를 지나 쭉쭉 등장하는 철학적∙사회적 주제들을 접하며 적잖이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내용이 나에게는 정말 어려워서 책을 마치는데 생각보다 오랜시간이 걸렸다. 충분히 이해했다는 자신도 사실 없다. 이 책을 통한 수확은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똑똑한 철학자를 알아간다는 것이다. 일단 책을 다 읽긴 했지만 .. 좀 더 지나서 읽으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꼭 다시 도전해보고 싶고,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요약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선구안적인 견해를 묶은 논평집

감상
게으름에 대한 찬양: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운이 좋게도 내가 근무하고 있는 팀은 작년부터 유연근무제를 적용하고 있다. 유연근무제의 큰 틀은 매주 40시간을 자유롭게 근무하는 것이다. 이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내가 정해진 시간만 근무한다면 몇시에 출근을 하는지, 몇시에 퇴근을 하는지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근로자 입장에서 두 손들고 환영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제도 시행 전 나도 모르는 걱정이 들었다. 회의와 협업이 많은 업무 특성상 함께하는 멤버들과 출퇴근 패턴이 달라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에서부터 아무리 제도라지만 눈치를 보다보면 정시 출퇴근 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제도에 대한 의심까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제도가 시작되고, 일년여 지난 지금 그 걱정들은 모두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부쩍 느끼는 요즘이다. 

우선 우려했던 팀원간의 시간 조정은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좋은 방향으로 맞춰지고 있다. 함께 일할 수 있는 시간에 보다 집중해서 회의하고, 의사결정이 보다 빠르게 일어난다. 불필요한 회의가 줄고, 논의 시간을 정하는 데 서로의 스케줄을 묻는 것은 기본이 되어가고 있다. 가끔 야근을 하더라도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다른 날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들은 동료에게 양해만 구하면 반차를 쓰지 않고도 아이의 유치원 추첨 행사에 참석할 수 있다. 아침에 차가 막혀 어쩔 수 없이 출근이 지연되더라도 마음을 졸이거나 동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금요일의 아침 인사는 오늘 몇시에 퇴근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모든 공동업무는 금요일 오전에 마무리되는 분위기며 오후는적당히 일을 마무리하고 개인의 시간에 맞추어 퇴근한다. 간혹 주 40시간 이상 근무하더라도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회사와 직원 사이에서 융통성있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으로 여긴다. 이것 말고도 유연근무제의 장점은 차고 넘친다.

유연근무제를 겪으면서 가장 좋은 건 '자율적으로' 내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지각할까봐 맘졸이고, 야근한다고 투덜대는 것이 아니라 내 컨디션과 일의 상황에 따라 시간을 자율적으로 사용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느낌이 나의 삶의 질을 매우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40시간 근무제 시행을 앞두고 있다. 몇 년, 아니 몇 달만 지나도 '주 40시간 근무제 시행 그 후...'와 같은 기사가 쏟아질 것 같다. 직원의 '생산성'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생산성은 그 이전보다 높아지면 높아지지 낮아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오히려 이렇게 조직적으로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과정은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가는 과정이며, 직원들이 본능적으로 보다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찾아가도록 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금욕주의에 대하여: 아직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견뎌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다큐멘터리 <어느 의대생의 자살>은 인도 최고 명문 의대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 자살사건과 그 속에서 학생들이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에 대해 관찰한 내용을 다룬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며 놀랍도록 닮았던 나의 대학원 생활이 떠올랐다. 석사과정을 위해 진학한 학교는 한 때 수 많은 학생들이 자살하여 이슈가 된 곳이었다. 내가 입학했던 때는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난 후 였고, 외부 사람들에게 학교에서 일어난 자살사건은 마치 아주 과거의 일로 여겨지는 듯 했으며 나에게도 그랬다. 하지만 놀랍게도 학교 안에서의 자살사건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고, 내가 학교를 다니던 2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세 번의 자살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주로 학교 안에서 일어났다. 자살사건이 일어나면 소문은 아주 빠르게 퍼진다. 온 몸을 비닐로 감싼 감식반과 경찰차, 구급차가 최대한 빠르고 조용하게 현장을 수습하려는 듯 민첩하게 움직이지만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르며 주변의 공기는 아주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 날 저녁  총장이 쓴 편지, 상담센터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와 군것질 거리가 담긴 비닐 봉투가 기숙사 문 마다 끼워져 있다. 그런 경험이 처음에는 아주 충격적이다가도 두 번, 세 번째가 되자 아주 조금씩 무뎌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어느새 수 많은 할일에 파묻혀 그 기억을 잠시 밀어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왜 그런 수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의문을 가지며 너무나 쉽게 '학업 스트레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그리곤 '너무 똑똑해서 그래'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업 스트레스는 많은 학생들이 받고 있지만 유독 자살 사건이 많이 벌어졌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의 많은 학생들은 고등학교부터 명문 고등학교의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이 조기졸업을 하고 어린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며, 조기 졸업을 하지 못한 학생은 낙오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입학한 학교에서 학업 관련된 경쟁에 끊임없이 내몰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자살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린 학생들이 제한된 환경에서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너무 오랜기간동안 달려가도록 부추긴것이 큰 문제를 만든 것이 아닐까한다. 

사람은 주변의 환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생각을 넓힌다. 세상의 다양한 성공 혹은 실패 사례들과 셀 수 없이 다양한 삶의 방법들을 보고 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삶에는 다양한 길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발을 헛딛더라도 떨어진 그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떨어진 그 곳이 자갈밭 이더라도 폭신한 풀밭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경험이 좀 더 있었더라면, 비슷한 주변 친구들과 비슷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고 자랄 수 있었다면, 어린 시절 겪는 좌절의 감정이 삶의 큰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가 많다면, 오히려 공부 말고 세상 이런저런 일들에 한 눈을 팔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은 좀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불행이 삶을 덮쳤을 때, 그래도 아직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해야한다는 책의 문구가 유독 크게 와 닿았다. 아무리 큰 불행이 덮쳐와도 스스로 삶의 이유를 찾을 최소한의 여유 정도는 가질 수 있도록 나 스스로의 마음을 끊임없이 정비하고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야겠다. 그리고 성장한 마음의 넓이로 내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까지 조금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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