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 오즈 야스지로
책을 읽기 전에
제목부터 작가까지 처음 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선 책이었다. 책의 내용도 산문도, 소설도 아닌 것이 대체 이게 무슨 책이지 싶었다. 하지만 예쁜 책표지로 자꾸만 손이 가고 혹시 뒤에 무슨 흥미로운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계속 읽어 보게 된 책. 책은 오즈의 산문-종군일기-오즈의 인터뷰-<도쿄 이야기>작가용 대본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즈 야스지로라는 영화감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인터뷰-대본-종군일기-산문 순으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책을 통해 전혀 알지 못했던 오즈 야스지로라는 영화감독에 대해 관심 가지고 그의 작품관과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으며,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고민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더불어'서울아트시네마'에서 했던 오즈 야스지로 특별전 덕분에 더욱 풍부하게 그의 작품들을 즐길 수 있었던 것에 기쁘다.
요약
일본의 영화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생각을 담은 책. 일기, 대본, 인터뷰 등 그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이 모인 아카이빙 성격의 책이다. 그의 호방하면서도 인간적이고 고집있는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불렀을 정도의 초창기 영화감독들의 접근방식도 살펴볼 수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감상
단술을 마심. 장수를 해서 맛있는 것을 많이많이 먹고 싶다.
사실 앞의 종군일기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너무 낯설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상들의 반복이었다.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 지경.
중간 중간 종군위안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에게는 그리고 어떤 개인에게는 여태까지 아픔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 가해자에게는 별일 아닌 일상으로 그려져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종군일기'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오즈의 일상은 차를 마시고, 목욕을 하고, 잔업을 처리하고,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일들의 반복으로 그려진다. 누군가에게는 지우지 못할 공포의 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상의 일부라는 사실이 참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일상과 또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뉴스에서 불이 나고, 전쟁이 나고, 지진이 나고, 화산폭발이 발생해서 수십-수백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며 잠시 안타까워 하다가 친구를 만나러 나가 달콤한 케이크를 먹는 일상처럼.
종군일기에서 전체적으로 알 수 있었던 건 오즈가 참 호방하고 태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옛날이고 지금이고 사람들이 하는 생각과 행동은 별로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의 소소한 일기를 들여다보는 재미 정도 있었다는 것. 뭐든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쌓아 놓고 보면 다들 이야기가 된다.
인간 무리라는 것은 시시한 얘기는 늘 주고받지만
막상 중요한 얘기를 나누려 하면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오즈 야스지로가 이야기 하는 "시시한 얘기"는 무엇이고, "중요한 얘기"는 무엇일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만춘' 하나, 대본은 '도쿄 이야기'하나를 이 책에서 본 것이 전부이지만, 오즈가 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근대 사회의 해체라는 문제 의식인 점을 비추어 봤을 때 아마 그 "중요한 얘기" 라는 것이 "가족"가 아닐런지. 오즈의 많은 영화들이 우리 주변에서, 그리고 가족사회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 주로 담고 있는 내용은, 근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기에서 이전의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일어나는 가치관의 변화들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 일것 같다. 누구나 겪고 있지만, 누구도 굳이 꺼내서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오즈는 굳이 꺼내서 아주 잘게 보여주고 있는 달까. 그래서인지 소소한 느낌의 영화 제목이 많다. 이사하는 부부, 대학은 나왔지만, 회사원 생활, 결혼학 입문, 숙녀와 수염, 태어나기는 했지만, 지나가는 마음, 오차즈케의 맛, 꽁치의 맛 이런 것들.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낯설어서 쉽지 않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오즈의 영화 몇 가지는 더 찾아봐야겠다.
복잡해 보여도 인생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것일지 모른다
위의 문장이 오즈 야스지로라는 사람의 삶의 태도와 그의 작품 속에 담아내고 싶은 메세지를 가장 집약하여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종군일기를 통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와중에 매우 단순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쟁도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처럼. 그의 대표작 <도쿄 이야기> 에서도 모든 복잡한 관계의 끝에서 남겨진 것은 결국 외로움이라는 것, 혼자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마친 타이밍에 영화 <1987>을 보았다. 굉장히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정의를 지켜야 하는가-권력에 굴복해야 하는가' 라는 갈등 사이에서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들과 맺어진 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때론 신념을 놓아버리게 하는 약점이 되기도 하고, '어쩌다 맺어진 관계'가 신념을 바꾸게 하는 원인이 되어 광장으로 이끌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은 가족, 친구, 연인 등 관계를 통해서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가 단순하면 인생이 좀 더 단순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 관계가 주는 행복감과 안정감이 과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걱정, 근심, 위험보다 더 큰 것일까라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인간이 자꾸만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걱정거리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즈 야스지로의 생각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고' 단순히 생각해보았다. 결국엔 '사랑'이라는 감정만이 '관계를 형성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다는 결론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로맨틱 하지만 어쩌면 서로를 보듬고, 신경쓰고, 보호하고, 그리고 보호받기 위한 오랜 생존의 과정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건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보호할 필요도, 서로를 신경쓸 필요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생존을 위해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견디기 힘들도록, 경계하도록 진화되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심플한 인간관계에 대해 부쩍 생각이 많던 와중에 읽게 된 오즈 관련된 책과 영화. 덕분에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 조금은 건조하게, 한편으로는 "그래도 가족이니까" 라는 따뜻한 결론을 내리며 내 주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소중히 여기며 신경쓰는 내 가족과 내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감사함을 느꼈다. 조금은 거창한 결론과 너무 멀리까지 이어진 생각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에게 평소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매력인 것 같다.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 도움도 된 것 같고. 책은 복잡했는데 어찌된게 내 마음은 한 방향으로 이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