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에 대한 단상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by 노마 장윤석

기후위기는 사무치게 무거운 주제여야 한다.

나는 환경‧생태문제를 둘러싼 시선들이 두렵다.

목요일 기후위기 비상행동 참가를 독려하는 학내 피케팅에서 얼떨결에 구호를 외치게 되었다. 자신감이 없어서 목소리가 모기만치 기어들어갔다. 놀랄만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바깥의 저들이 우리를 어떤 시선으로 볼지가 너무 의식되었다.

사실 그런 시선 따위 의식할 필요 하나 없는데 말이다. 구호를 좀 더 당당하게 외칠걸,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면서 고작 시선 따위를 의식한 내가 못나게 여겨졌다.

어느새 이년 남짓 이어오고 있는 녹색 공부모임 GPS(Green Peace Slow)의 이번학기 주제는 기후위기다. 엊그제 첫모임을 가졌다.


쪽글에는 이렇게 썼다.

‘울리히 벡의『위험사회』에서 저자는 계급사회에서 위험사회로 도래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계급에 관계없이 근대의 부산물에 ‘공평하게’ 노출된다고 썼다고 한다. 물론 맞다. 일면 동의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초래되는 수많은 자연재해와 치닫는 미세먼지는 한 공간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동시에 닥친다. 하지만 과연 ‘공평하게’ 노출되는가?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한 현재, 유례없던 폭염이 그 신호를 알린다. 옥탑의 단칸방 독거노인은 낡은 선풍기 하나로 폭염을 맞이하지만 타워펠리스 꼭대기 층 주민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켜고 그마저 춥다며 보일러도 켠다. 시야를 세계로 확장하면 한국의 사람들은 무더위에 버티고 버티다 은행 같은 안전지대로 도망가지만, 미얀마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폭염에 쓰러진다. 기후위기라는 파국 앞에서 불평등‧계급문제가 빠져서는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위험에 공평하게 노출되지 않는다. 계급에 따른 위기대응력이 다르다. 막강한 방패로 위험을 막아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이가 있다. 무엇보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파국이 공평하게 닥친다는 것 자체가 불공평이다. 위험이 공평하게 찾아오는 게 이 사태가 불공평하다는 증거다. 그럼에, 위험사회가 닥쳐도 계급사회다.’


9.21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가며 조마조마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왔을까. 이 운동에 가망은 있을까.

울컥했다. 이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함께 가야 할 사람들이구나 싶어서.

철학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이 전지구적 파국을 아우를 이론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구호를 목청껏 외쳤고 두 팔에 힘주어 피켓을 올렸다. 눈에 힘을 주었다.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뻔한 이야기 하는 거라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식상한 것으로 취급하는 시선에 맞서, 지금 이 사태보다 중요한 사태가 어디있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눈으로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니 절망이 보였다. 언론은 놀랄만큼 관심을 주지 않았다. 모든 신문의 일면에는 조국과 망언 내뱉은 자한당 의원 뿐이다. 조‧중‧동은 기사의 7~8할이 조국 공격에 나서고 있다. 씨발.

한겨레고 경향을 다 들어가봤다. 일면에 실린 건 프레시안 뿐이다.

이 싸늘한 시선. 나는 이 시선이 두려웠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우매한 저들따위 신경쓸 필요가 뭐가 있겠냐만은, 이 냉소는 사람을 굉장히 움츠려들게 한다.

나는 막막해진다.

댓글 하나 없다. 놀랄 만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고 체감하는 것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 같이 섬세하고 연약한 이들 뿐이던가.

이 파국에서 무엇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오천명의 시민이 한 자리에 모였더라도, 보신각까지 행진하며 목소리를 외쳤더라도 변화의 희망은 보이지 않던가.


가망-없음에 대해서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승산이 없다는 걸 인지하면서 무엇 할 수 있는가. 섣부른 회의인가. 모든 변화는 다 이런 시작을 가졌던가. 그럼에도 해야 하는가. 한순간에 일진보를 바라는 것은 주제넘은 욕심에 불과한가? 함께하는 과정과 할 수 있음에 대한 낙관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나 적다. 적게는 8년. 최악의 시간이 아니라 최대의 시간을 가정하더라도 변화의 속도는 너무 늦다.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에 실력을 키워야 하는가. 나는 무엇해야하는가.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과 무관심 속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마냥 해맑게 앉아있을수는 없지만. 홀로 외따로 비상에 걸려 불안과 공포에 떠는 것은. 어쩌면 안전을 위해서 뇌의 일부분을 무감한 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감하지 않으려는 움직임과 무감하려는 움직임이 동행한다. 빨간약을 먹고 자각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파란약을 통해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도 맞으니까. 이럴 때일수록 ‘너’를 상기해야 한다. 그래야 비관에 먹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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