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2020.5.18. (月)
노 마
“생각하는 것이 감사하는 것이라면, 감사하는 것은 이어가는 것이다. 그런즉 감사 속에서 이론과 실천은 하나로 만나게 된다. 5.18을 생각하고 5.18에 감사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중략)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시작된 새로운 나라에 대한 동경이 오랜 저항과 항쟁의 역사 속에서 물과 불의 시련으로 정화되어 눈물의 보석으로 맺힌 사건이 바로 5.18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이 땅의 민중이 그리도 염원하던 하늘나라의 계시였던 것이다.*”
5월 18일이 되면 늘 마음이 아리다. 삼 년 전 오월 나는 마음이 온통 광주에 가 있었다.
그때 썼던 글이 있다. 처음으로 붙여봤던 대자보기도 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라고 제목을 붙였었다. 이렇게 썼었다. “악인은 악을 저질러서 한 번, 그 악을 뉘우치지 않아서 다시 한번 죄를 저지릅니다. 뉘우침 없는 역사는 반복이 되기에 그 다시 한번 저지르는 그 ‘죄’는 감히 저질러서는 안 되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때는 전두환이 회고록을 냈었다. 도서관에도 있다. 차마 저따위 걸 도서관에 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 악행을 똑똑히 새겨두어야 할 성 싶어서 내가 신청했다. 비밀이지만 그 때 너무 분해서 책 앞장에 만년필로 정갈한 욕을 휘갈겨놓고 귀퉁이도 찢어놓았다. 누군가 저 궤변을 곧이곧대로 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랬던 것 같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가끔 피켓 들고 광장에 나가면 우리는 적어도 총 맞아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세상이 조금은 좋아졌나 싶으면서도, 전두환 저놈이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걸 볼 때면 아직 멀었다 싶다.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살인마가 당당히 다니는 걸 자라나는 아이들이 보지 않아야 하는데.. 아, 자라나는 나에게도 심히 해롭다. 얼른 최종발포명령자 관련 진실이 낱낱이 드러나 그가 감옥에서 죽기를 빈다.
광주에 갔을 때 전남도청 주위를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내가 젖어있던 착잡하고 풀리지 않는 “도대체 그들은 왜 전남도청에 남았나”하는 물음. 죽을 게 뻔했다. 헬기와 탱크를 동원한 계엄군이 밀려오는데 시민군의 손에는 구식 소총과 주먹밥뿐이었다.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지 않나. 저 잔혹한 악마들과 상종하지 않겠다며 산에 들어간다 해도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때도 지금도 풀리지 않은 물음이 매해 5월 18일이 돌아올 때마다 내 앞에 나타난다. 아마 나는 이 물음을 바탕으로 계속 걸어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 피와 용기로 다져진 역사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월을 기억하는 것은 전남도청에 남았던 광주의 시민들이 그날 밤 미래의 역사에 넘겨준 꿈을 이어가는 일이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상상하고 구현해 보였던 천국의 상을 이어받아 그리는 일이다. “타인의 고통에 목숨을 걸고 응답하려는 용기 위에 기초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이자 서로 주체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보이는 일이겠다.
덴마크와 스웨덴 등지를 우리가 가야 할 상으로 섣부르게 그리고 확고하게 두는 것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설령 그 복지국가의 풍요로움이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식민 지배 시대의 가시화된 착취와 전 지구적 개발 시대의 비가시화된 착취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나는 차라리 여기 헬조선을 긍정하겠다. 그들에게는 당해온 역사가, 광주가 없다. 모진 핍박과 억눌림으로 가득한 불모지에서 피어난 꽃과 어딘가에서 수탈해온 양분을 바탕삼아 화려하게 피워낸 꽃을 비교하는 일은 사양이다. 서구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나는 헬조선 이라는 낱말에 동화되면서도 불화하는데, 왠지 모르게 그날 광주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인 것 같아 그렇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천국을 상상하고 피 흘려가며 만들어왔던 이 땅을 우리가 지옥이라 부른다면 몹쓸 짓이지 않나. 물론 이 땅은 아직도 매일 비보가 들려오는, 비탄 섞인 한숨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현실의 부조리를 직시하되 체념 섞인 한탄을 내뱉지는 말자. 모든 혁명은 이어달리기고 우리의 손에는 바통이 들려있으니까. 계속 달려가는 게 광주에 진 빚을 갚는 법이겠다. 나는 광주를 생각하고, 광주에 감사하고, 광주를 이어가겠다. 생각하는 것은 감사하는 것이고 감사하는 것은 이어가는 것이기에.
* 김상봉, 『철학의 헌정』, 도서출판 길, 2015, 머리말, 15p
** 김상봉, 같은 책, 「응답으로서의 역사」, 3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