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코로나, 기후위기, 그린뉴딜] 기획의 세 편 중 마지막 글로, 그린뉴딜에 대해서 썼다. 앞의 글들에서 코로나 사태로 사회정치경제 지평에서 겪을 국면을 짚어낸 후 본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후위기와 함께 분석한 바 있다. 경고·고발과 원인진단 다음에는 대안이 따라와야 한다. 닥쳐오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저감과 적응’의 전환책으로써 그린뉴딜을 고민했다. 한국판 뉴딜에 대한 비판, 그린뉴딜의 정의와 원칙, 그린뉴딜 담론의 소개, 그린뉴딜의 방향성에 대한 제언을 담았다.
0. 들어가며 - 정명(正名)이 아니면 실명(失名)한다
1. 코로나가 보인 것들
2. 한국판 ‘구린’ 뉴딜
3. 그린뉴딜의 정의와 원칙
4. 그린뉴딜의 담론 – 제러미 리프킨, 나오미 클라인, 앤 페티포의 그린뉴딜
5. 그린뉴딜의 방향성에 대한 제언 혹은 화두들
6. 나가며 - 빼앗긴 언어 되찾기, 반 년 동안 글을 미뤄오며
온 곳에서 그린뉴딜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그간 내가 알고 배우고 말하던 그린뉴딜은 온데간데없는 듯하다. 전환책으로써 그린뉴딜을 말해온 지 어느덧 이 년, 언어를 빼앗기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린뉴딜이라는 낱말을 버려야 하나? 아니면 그럼에도 다시 되찾아 우리의 깃발에 내걸고 구호로 외쳐야 하나.
정부의 한국판 뉴딜 발표 후 그린뉴딜을 말해온 활동가와 시민들은 낙담에 빠졌다. 온갖 화려한 단어가 난무했지만, 그 포장지를 벗겨내고 보면 닥쳐오는 위기를 막아낼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했던가, 이번 한국판 뉴딜의 기획은 그린뉴딜이라는 비전을 훔쳐다가 지옥으로 가는 녹색 아스팔트를 깐 것이나 다름없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생각이 많이 났다. 한국판 뉴딜의 종착지에는 그곳이 있을 것 같다.
그런 까닭에 그린뉴딜을 버릴지 살릴지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지금 세간에서 말해지는 그린뉴딜과 이에 연동된 시장 추이는, 기후위기를 막아내고 불평등을 해결해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전환하자는 그린뉴딜의 원초 기획과 ‘상반’된다. 정부와 경제계가 그린뉴딜의 빛깔만 취하고 실질적인 목표나 내용을 팽개친다면, 우리는 아예 그린뉴딜이라는 낱말을 버리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녹색성장 꼴 나기 전에.
우리 앞에 더 잦은 기후재난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이전까지의 위험과는 질적으로 다른 위험 속에서 재난의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 출처 : cottonbro
그러나 기후위기의 절박함에 바탕을 두고 전 지구적으로 부상하는 그린뉴딜이 가진 함의와 방향성을 대체할 수 있는 개념이 이 시점에 또 있을까? 그린뉴딜을 공론장으로 옮겨오기까지의 과정과, 세계적으로 그린뉴딜에 실린 힘을 생각할 때 포기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언어의 초심을 되찾아 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어본다.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급속한 전환, 그리고 전환의 방향으로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위기의 해소, 이 축을 분명히 원칙으로 삼아 지금 나오고 있는 구리디 구린 뉴딜에 “그것은 그린뉴딜이 아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정명(正名)이 아니면 실명(失名)한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서. 언어는 그릇이기에 누가 어떤 맥락으로 쓰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빼앗긴 그린뉴딜을 되찾아 이 이름으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위기를 헤쳐나갈 전환의 방향을 그려보자.
다시 코로나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반년 전 사회가 공포로 뒤덮여가던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조차 익숙해졌다는 점이겠다. 익숙함에 저항하며 코로나가 보인 것들을 다시 살펴보자. 앞선 글들에서 말하고자 한 바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자연적 질병이지만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재난이고, 그 속에서 위험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짙게 전가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필자는 지난 「[코로나, 기후위기, 그린뉴딜] ②코로나와 기후위기」글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총체적인 원인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으로 진단했다. 서식지 파괴, 공장식 축산, 자유무역과 같은 자연적 원인으로 빚어진 감염‘증’이 불평등과 빈곤, 밀집도, 이동률·이동거리, 불안과 공포 등과 같은 사회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총체적인 재난이 됨을 보았다. 이 원인들은 기후위기를 초래한 원인이자, 기후위기에 취약한 원인이기에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위기는 기후위기의 일환이다. 우리는 그렇기에 사회정치경제의 향방에 있어, 기후위기와 코로나는 동떨어지지 않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면을 주의해야 한다.
코로나를 사유할 때 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하나에만 눈을 두어서는 언젠가 찾아올 다른 이름의 재난을 상상하지 못한다. 코로나는 기후위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얼마 전 연일 폭우를 퍼부으며 각지에 피해를 낳았던 장마도 마찬가지다.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다.
울리히 벡이 1985년 썼던 ‘위험사회’라는 개념은 불행히도 적확한 전망이었다. 위험의 사회화를 넘어 위험의 지구화가 보편적으로 진행되어가고 있다. 지구가 하나의 질병으로 한 해가 넘어가도록 앓으리란 걸 작년의 우리가 상상이나 했을까. 앞으로 닥칠 위험의 종류와 속성은 지구 단위이고, 불확실하고, 예측불가능하다. 이게 기후위기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앞에 더 잦고 이전까지의 위험과는 질적으로 다른 위험 속에서 재난의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케이트 레이워스가 『도넛경제학』(2018, 학고재)에서 제시한 도넛형태의 경제모델.
이러한 진단은 대안 모색에 있어 다음을 시사한다. 당장 앞으로의 기후위기를 탄소배출의 ‘저감’을 통해 근본적으로 막아야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닥쳐올 코로나와 같은 재난들에 대비해 사회적 안전망 확보, 대응 시스템 구축 등 ‘적응’의 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기에 저감과 적응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전환책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자연적 원인들은 탄소배출의 ‘저감’과 함께 바꾸어나가고, 사회적 원인들은 동시에 사회적 안전망을 만드는 ‘적응’으로 대처하면 된다.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그림처럼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사회적 기본권을 지키는 안전망을 함께 확립해나가면 된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기획 혹은 트랙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지구사회경제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세세한 사안과 사항에 대해서는 더욱 열띤 논의와 토론이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전환이 시급하다는 것에서 이견이 있을 수 없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방향에 대한 합의다. 앞으로 위험사회가 닥치리라는 건 분명한 일이다. 지구한계를 넘지 않는 선으로 자연적‧사회적 재난과 질병을 막는 적응형 사회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이 방향성에 따라 그린뉴딜을 제시하려 한다. 그린뉴딜은 큰 그릇이고, 지금 당장 직면한 우리의 위험과 앞으로 닥쳐올 위험을 함께 풀어갈 해결책을 담아낼 수 있다.
한국판 뉴딜이 발표되는 날, 장마의 초입경에 부산역에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해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던 적이 있다. 한 여성 노인 노숙인이 역 출구 바로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마스크도 없었고, 짐과 옷은 젖었고, 우산은 부러진 채 옆에 뒹굴어 다녔다. 한참을 서 있다가 도움을 드리고 올라오는 길, 실시간으로 대통령과 부총리의 한국판 뉴딜 발표를 보며, 그들이 내건 가치와 돈은 이 분에게 해당하지도 쓰이지도 않겠구나 싶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미래의 재난에 대비하지도 대응하지도 못하겠구나 싶었다. 이 뉴딜은 누구를 위한 뉴딜일까? 뉴딜이긴 할까.
한국판 뉴딜은 7월 14일 자축, 비전, 계획의 순서로 발표됐다. 먼저 자축, 우리가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했다는 증거가 경제성장률로 제시됐다.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적은 폭으로 하락했고 외신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성공의 증거가 아니라 무엇이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축배를 들기에는 비극이 너무 많지 않았나. 눈물이 벌써 말랐나 보다.
다음으로 비전, 사회적 안전망의 긴급함에 대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 덕인지 이번 발표에는 (1)디지털 뉴딜과 (2)그린뉴딜에 이어 떡하니 ‘(3)고용사회안전망’이 들어가 있다. 더해서 내거는 단어들도 ‘포용’, ‘그린’, ‘복지’, ‘안전망’, ‘복원력’ 등 오래간 회복과 전환을 말해온 시민 사회가 바라는 가치는 다 걸려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설 때 한국판 뉴딜의 내용은 몇 달 아니, 그린뉴딜은 몇 주 만에 급조한 티가 확연히 드러난다. 비대면+스마트그린 산업을 육성하고, 전기차 개발에 자금을 쏟고,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디지털화하고, 가장 빠른 5G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 이것들이 전환의 골자다. 이 그린뉴딜에 농업정책은 스마트농업과 농촌 5G 통신망 설치뿐이고, 교육정책도 교실 5G 통신망을 설치하는 것뿐이다.
이것들로 과연 안전망을 만들고 복원력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쓰겠다고 약속한 돈과 자원들이 지금 중첩되는 위기와 재난으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갈 수 있을까? 국가적 열등감에 푹 젖어 ‘선도’와 ‘혁신’, ‘차세대 리더’를 남발하고 K-방역을 칭송하는 것만으로는 단언컨대 아무도 구할 수 없다.
비판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국판 뉴딜 속) ‘그린 뉴딜’은 녹색시장 부흥을 통한 또 다른 개발론에 더 가깝다(이광석).”2 “한국판 뉴딜에는 디지털화의 위험(실업과 불안정노동, 정보인권 침해, 환경 파괴 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미약하며 디지털 기술의 밝은 면만 보는 첨단기술 숭배주의가 뚜렷하다(이병천).”3 “문재인 정부의 그린뉴딜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을 혼합한 수준으로 공공이 책임을 진다기보다 ‘민간 대기업 주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김병권).” “이 정도라면 굳이 ‘뉴딜’이라고 명명하지 말고 녹색 경기부양책 정도로 발표하는 것이 맞았다(이유진).”4 등 그린뉴딜을 꺼내어 전환 담론을 만들어왔던 이들의 평은 이와 같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맥락들을 따라 한국판 뉴딜의 비판 지점들을 조목조목 살펴본다.
첫째, 개발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흔적은 정부의 발표 곳곳마다 짙게 스며들어 있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 국제적인 협력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모색해야 할 시점에, 아직도 후기 냉전 시대에 GDP 숫자로 경쟁하던 관성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때 맞지 않게 선도와 혁신을 남발하는 것도 “영원한 2등 국가”의 콤플렉스와 열등감이 드러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여성학자 정희진의 분석대로, 전도된 한국의 ‘식민지 남성성’인지도 모르겠다. 식민 지배와 약소국의 열등감을 국가 가부장 성장주의에 투사하는 전도된 권력, 우리를 지금 여기로 데려온 그 기조와 전면적으로 결별해야 한다. 그 태도로는 기후위기 못 막는다.
또한, 코로나로 돌봄과 보살핌의 중요성과 사회적 공백이 여실히 드러났고, 보건과 공공의료 설비·인프라·제도개선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는데 왜 (자기들이 하지도 않은)방역 성공을 자축하기에만 바쁘고 실질적인 지원은 전무한가. 국력과 성장에만 몰두하는 이런 면면은 참으로 낡아빠졌다. 박정희 때부터 내려오는 ‘정부가 혁신 방향을 지정한다. 유망한 산업을 골라낸다. 자원을 몰아준다’는 진부한 성장 시나리오다.
둘째, 기업 지원에 방점이 찍힌 것도 문제다. 그린뉴딜의 주체로 정부는 네이버와 현대차를 불렀다. 발표 당일 현대차는 기업 PR마냥 수소차와 전기차를 늘여놓았고 네이버는 데이터 댐과 클라우드 시스템을 자랑했다. 그린뉴딜의 주체로 누구를 상정하고 있는지 극명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더해서 정보 데이터를 독점하게 된 기업은 누가 견제하는가.) 마찬가지로 한국판 뉴딜 안에는 ‘녹색 선도 유망기업 육성과 저탄소·녹색산단 조성’ 등 기업 대책은 부지기수지만 그 가운데 정의로운 전환의 방책은 전무하다. 정부는 사측은 불렀지만 노측은 생각도 않았다. “그린뉴딜의 기반인 노동자, 농민, 지역주민, 여성, 장애인, 이주민, 소수자 등이 빠진 채 진행되는 게 가장 큰 문제다(김선철).”5 양극화에 대응한 안전망 강화, 사람투자 확대를 구호로는 내걸었지만, 이 이골날 불평등을 해결할 구체적인 방법은 없다. 이 기업들이 세상을 녹색으로 만들어 주리라 믿는가? 결국에는 녹색으로 분칠된 산업단지만 남을 것이다. 사회적 뉴딜이 부재한 것이다. 새로운 노동형태를 어떻게 보호하고, 노동시장 이중화를 어떻게 해결할지 등은 고민에서 빠져있다. “디지털자본주의에서 지워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을 어떻게 인간적인 삶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 그 어떤 고민의 흔적도 없는 낡아빠진 헌딜이다. 정부가 허둥대는 사이 ‘국민안전’이란 탈을 쓰고 자본은 이제 날개를 달았다(이승윤).”6
셋째, 수소가 친환경이라는 상상도 헛되다. 현재 수소연료는 화석연료에서 만들어지는 부생수소에 의존해 친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에너지 효율도 떨어지고 경제성도 없어 대형운송수단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수소를 친환경 전환에 포함시키는 경우는 드물다.7 정부의 전환 계획은 ‘잔치가 끝난’ 대기업들의 사료를 챙겨주는 것 같다. 산업화 과정에서 중화학공업 기업들이 수소에 비교우위가 있고, 화학산업단지의 부산물을 재활용할 방안도 생기니 수소를 치켜세우는 듯하다. 한국판 뉴딜이 발표되기 2주 전에는 무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8개 부처 장관과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수소경제위원회가 출범했다. 이들은 수소경제법을 제정하고, 수소신도시 건설계획 및 수소전문기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8 그린뉴딜은 아직 위원회는커녕 그린뉴딜 기본법도 제정이 안 된 상태다. 그런데 수소경제위원회는 이렇게 착착 진행되다니, 어떤 내막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봐도 비디오겠다.
수소가 친환경이라는 말은 억측이다. 수소연료는 화석연료에서 만들어지는 부생수소에 의존해 친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에너지 효율도 떨어지고 경제성도 없어 대형운송수단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수소를 친환경 전환에 포함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사진은 전시중인 도요타 수소차.
사진 출처 : Darren Halstead
전기차, 수소차가 그린모빌리티의 전부라는 것도 한숨만 나오는 부분이다. 그마저도 전체 차량 대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량의 보급계획은 이미 ‘간판 바꾸기’ 혹은 ‘포대갈이’에 그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과다하고 비효율적인 운송망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기에는 현대차 팔아주기에 정신이 쏠려있나 보다.
넷째, 언택트(비대면)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도 터무니없다. 우리는 앞으로 펜데믹에만 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감염병에는 거리두기가 필요하겠지만, 당장 이번 장마(라 쓰고 기후위기라 읽는다)처럼 지진과 해일과 태풍과 같은 재난들을 거리두기로 대비할 수가 있을까? 이번 수재에서 드러났듯이 재난은 결코 홀로, 비대면으로 이겨낼 수 없다. 비대면은 만능키가 아니다. 디지털 팔아먹으려고 안전과 생명에 대한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에 선을 긋는다. 비대면 산업과 4차 산업혁명, D.N.A(Data, Network, AI) 등 디지털 뉴딜을 계속 꺼내는 것은 성장을 향한 마지막 집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디지털 뉴딜과 그린뉴딜이 같이 갈 수 있을까? 정부가 애초에 내건 한국판 뉴딜의 두 기둥이 서로 부딪힌다면? 근본적 모순이 있어 같이 갈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려고 하나. 이 물음들은 생태사상가 김종철 선생의 마지막 녹색평론 ‘코로나, 그린뉴딜, 기후위기’(이 글의 표제와 같아 마음이 묘했다)에도 짙게 새겨져 있다. 173호 『녹색평론』에서는 한국판 뉴딜의 기술적 방법과 허구적인 비전을 비판하는 글을 여럿 소개한다. 메리 와일드파이어의 「기후변화에 대한 거짓 해결책들」에서는 기술적인 방법론과 전기차, 재생에너지 등 (주류)그린뉴딜의 기획 자체에 비판을 던지고 케이티 싱어의「스크린의 배후-인터넷 접속의 진정한 비용」에서는 디지털의 에너지 사용량과 온실가스 배출량, 독성 폐기물과 노동환경을 조명한다. 이에 따르면 ‘2030년에 정보 통신 기술 영역은 전 세계 에너지 사용량의 51%, 온실가스 총량의 23%를 배출할 수 있고’, ‘2040년에 이르면 컴퓨터가 사용하는 전력량이 전 세계 총 발전량보다 많아질 것이다.’9 여기에 전자기기들이 제조되는 동안, 작동하면서, 폐기되는 과정까지 사용된 에너지까지 더해서 계산한다면 디지털 뉴딜은 기후위기를 막기는커녕 기후위기의 전범이 될지도 모른다. 무턱대고 디지털 뉴딜을 밀어붙이면 그린을 잡아먹고 말리란 것이다. 실물 기반 없는 가상계는 존재할 수 없는데 이 자명한 진리를 자꾸 잊는다. 디지털이 무상이자 무한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직 근거 없는 성장주의의 망령에 매여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구체적인 로드맵 및 방향성의 부재에 대해서 남겨둔다. 그린뉴딜에 대한 폭넓은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면 IPCC의 합의대로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의 절반(45%) 감축, 2050년까지 순배출 제로(Net Zero)를 명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빈 상태로 그린뉴딜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부의 대전환 계획에는 ‘저탄소 사회’, ‘녹색산업 혁신 생태계’, ‘그린 리모델링’, ‘친환경 제조’ 등 추상적인 낱말들만 넘쳐날 뿐이다. 정부는 기존의 한심한 탄소배출 감축 경로(2030년까지 BAU 대비 37%를 감축)이 “차질 없게 하겠다”고 말했을 뿐이고 “탄소 중립을 지향한다”고 덧붙였을 뿐이다. 넷제로 감축 방향과 재생에너지 비중 확충 방안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 외에도 농업이 홀대되고, 자동차가 총아로 등장한 점, 재난을 틈타 자본을 강화하는 재난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한 우려, 생물다양성, 생태부분이 공란인 점 등 짚이는 곳은 많다. 무엇보다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정부의 다른 주무부처가 기존에 진행해왔고 진행해가고 있는 정책들은 그린뉴딜과 ‘반대’된다(이유진).” 국토부의 새만금 신공항 건설사업이 발표되었고, 추진 중인 공항만은 제주2공항, 동남권 공항, 대구경북 신공항 등 여섯 곳이 넘는다. 삼척, 강릉, 고성 등 7기의 추가 석탄화력발전소가 건설 중이며, 해외 석탄발전도 계속 투자한다. 부동산 급등에 수도권에 13만 2천 가구 추가 공급 대책과 함께 태릉골프장을 그린벨트에서 해제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이것은 총론적으로 ‘철학의 부재’다.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숙한 성찰이 없었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이 ‘녹색’, ‘혁신’, ‘사회적’, ‘포용’ 등 단어는 전면에 내걸어 잘 팔았으나, 그 언어들이 담고 있던 맥락과 내용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일종의 녹색분칠(Green Washing)이다. 한강의 기적 같은 성장주의에 짙게 발을 담근 시장 주술을 녹색으로 칠해봤자 까만 속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4대강 재자연화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다 골든타임을 날리고, 총선에서 듣도 보도 못한 가자환경당을 파트너 삼아 녹색 아젠다를 독점했으며, 부동산 정책실패를 그린벨트 해제로 만회하려는 감수성의 정부·여당·관료들이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이 모순을 정면으로 지적할 때, 그린뉴딜의 기획은 일관성을 지닐 수 있다. 녹색 전환이 부재한데 ‘그린뉴딜’ 구호만 떠다닐 때, 최선이 타락해 최악이 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섯 번째로 구체적인 로드맵 및 방향성의 부재에 대해서 남겨둔다. 그린뉴딜에 대한 폭넓은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면 IPCC의 합의대로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의 절반(45%) 감축, 2050년까지 순배출 제로(Net Zero)를 명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빈 상태로 그린뉴딜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부의 대전환 계획에는 ‘저탄소 사회’, ‘녹색산업 혁신 생태계’, ‘그린 리모델링’, ‘친환경 제조’ 등 추상적인 낱말들만 넘쳐날 뿐이다. 정부는 기존의 한심한 탄소배출 감축 경로(2030년까지 BAU 대비 37%를 감축)이 “차질 없게 하겠다”고 말했을 뿐이고 “탄소 중립을 지향한다”고 덧붙였을 뿐이다. 넷제로 감축 방향과 재생에너지 비중 확충 방안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 외에도 농업이 홀대되고, 자동차가 총아로 등장한 점, 재난을 틈타 자본을 강화하는 재난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한 우려, 생물다양성, 생태부분이 공란인 점 등 짚이는 곳은 많다. 무엇보다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정부의 다른 주무부처가 기존에 진행해왔고 진행해가고 있는 정책들은 그린뉴딜과 ‘반대’된다(이유진).” 국토부의 새만금 신공항 건설사업이 발표되었고, 추진 중인 공항만은 제주2공항, 동남권 공항, 대구경북 신공항 등 여섯 곳이 넘는다. 삼척, 강릉, 고성 등 7기의 추가 석탄화력발전소가 건설 중이며, 해외 석탄발전도 계속 투자한다. 부동산 급등에 수도권에 13만 2천 가구 추가 공급 대책과 함께 태릉골프장을 그린벨트에서 해제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이것은 총론적으로 ‘철학의 부재’다.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숙한 성찰이 없었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이 ‘녹색’, ‘혁신’, ‘사회적’, ‘포용’ 등 단어는 전면에 내걸어 잘 팔았으나, 그 언어들이 담고 있던 맥락과 내용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일종의 녹색분칠(Green Washing)이다. 한강의 기적 같은 성장주의에 짙게 발을 담근 시장 주술을 녹색으로 칠해봤자 까만 속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4대강 재자연화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다 골든타임을 날리고, 총선에서 듣도 보도 못한 가자환경당을 파트너 삼아 녹색 아젠다를 독점했으며, 부동산 정책실패를 그린벨트 해제로 만회하려는 감수성의 정부·여당·관료들이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이 모순을 정면으로 지적할 때, 그린뉴딜의 기획은 일관성을 지닐 수 있다. 녹색 전환이 부재한데 ‘그린뉴딜’ 구호만 떠다닐 때, 최선이 타락해 최악이 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발표가 적확히 드러낸 것처럼, 현 정부와 각 주무부처, 산업계와 대중 언론이 이해하고 있는 그린뉴딜은 무늬만 그린뉴딜, 구린뉴딜, 그린워싱에 불과하다. 이로는 기후위기를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해소하지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린뉴딜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그린뉴딜의 정의와 원칙에 대해서 말해보려 한다. 그린뉴딜은 일반적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해 온실가스와 불평등을 없애고, 일자리를 늘리는 탈탄소 경제·사회 대전환 정책”10으로 정의된다.
그전에 누구의 입에서, 언제, 어떤 목적을 띄고 나오는 그린뉴딜이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작년부터 터져 나오는 그린뉴딜은 녹색당부터 민주당에 이르기까지, 풀뿌리 시민사회 단체부터 산업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녹색성장의 다른 이름으로 떠오르는 그린뉴딜이 있는가 하면 반제국주의, 탈식민주의와 결합한 생태사회주의의 기획으로의 그린뉴딜도 있다.11 어떤 그린뉴딜이 이 위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것인가 고민하며 맥락을 훑어보자.12
지금 그린뉴딜을 뜨겁다 못해 불타오르는 감자로 만든 것은 명실상부 전 지구적 기후행동이다. IPCC의 합의된 시한부 선고가 ‘불타오르는 우리 시대’에 세계 풀뿌리 운동과 청년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그레타 툰베리와 청소년기후파업(Climate Strike), FFF(Friday For Future), 멸종저항, AOC와 선라이즈 무브먼트(Sunrise movement)의 행보는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변화”를 외치며 사회적·생태적 구조를 전면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폭넓게 퍼져나갔다. “거의 하룻밤 사이에 일반적인 기후운동에서 보다 급진적인 기후정의와 생태사회주의 쪽으로 투쟁의 구조가 변화했다.”13
즉 심각성의 정도가 이전과는 남다르고, 문제의식의 절박함과 대안의 급진성도 다르다. 그리고 이는 소름끼치게 분명한 과학적 사실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예전부터 ‘기후변화’를 말해온 이들과 지금 ‘기후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다른 지점은 이 심각성의 정도에 있다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2008년에 처음 나온 그린뉴딜과 2020년의 그린뉴딜은 위기의식과, 상황 진단, 계획의 급진성 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이 글에서 쓰는 ‘그린뉴딜’은 이런 기후운동을 통해 떠오른 개념의 맥락을 따른다.) IPCC는 현 경로대로라면 1.5℃의 비가역점까지 남은 시간을 7년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이 시간은 날이 갈수록 지구 각각의 티핑 포인트 연구결과가 터져 나올수록 줄어들고 있다. 당장 올 한해만 해도 이전에 모르던 긴박한 사실들이 시베리아와 그린란드 등지에서 튀어나왔다. 지금의 그린뉴딜은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위기에 ‘가능한 모든 힘과 자원’을 들여 지구 생태계와 그 속에 묻어든 인류를 구하는 총체적 전환 패키지인 것이다.
따라서 그린뉴딜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집중”과 “속도”다. 전시와 같이 전사회적 역량을 집중해 빠른 전환을 일구어내야 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그린뉴딜은 규모와 집중성 측면에서 볼 때, 2020년대 10년이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 전사회적 자원을 집중해서 수행해야 할 대개혁 플랜으로 기획된다.”14 구체적으로 기후과학자들이 절박하게 경고하는 수준에 맞추어 세계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려면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변화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2030년까지 무조건 탄소 배출 절반 수준(45%)의 감축, 그리고 2050년 탄소배출 순제로(Net Zero)를 ‘선결과제’로 한다.
처음 ‘그린뉴딜’의 등장 배경에는 1930년대 루즈벨트의 뉴딜이 있다. 대공황의 극심한 불황에서 루즈벨트의 뉴딜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사회적인 기본권을 확립하며 전후 번영의 기초를 닦은 바 있다. 이 뉴딜에는 본받을 지점이 분명 있지만, 선을 그어야 하는 지점도 있다. 이를테면 한국판 뉴딜 발표의 서두에서는 루즈벨트의 뉴딜을 치켜세우며 그 방향을 따르겠다 공언했지만, 후버댐처럼 정부의 재정정책을 당장의 불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토건 쪽에다 쏟아 부으면 그건 회색뉴딜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한낱 일국 경제가 아니라 기후이자 지구다. 경제계를 생태계에서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던 근대경제학의 편협함을 지금의 그린뉴딜애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그린뉴딜은 생태경제학의 경제계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케인즈에게 물려받을 것은 시장만능이 아닌 책임자로서 국가의 역할, 딱 그 정도다.
그레타 툰베리와 청소년기후파업, FFF(Friday For Future), 멸종저항, AOC와 선라이즈 무브먼트의 행보는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변화”를 외치며 사회적·생태적 구조를 전면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폭넓게 퍼져나갔다.
사진 출처 : Li-An Lim
팬데믹 이후 그린뉴딜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작년에 미국 민주당 후보들이 앞다투어 그린뉴딜을 핵심공약을 채택하고, 유럽 집행위원회 선거의 핵심주제로 ‘그린딜’이 떠올랐으며, 각 지방정부의 기후위기비상선언에 이어 LA와 뉴욕 등지에서는 그린뉴딜 정책을 채택한 바 있고, 영국에서는 캐롤라인 루카스 의원의 그린뉴딜 법안이, 미국 하원에서는 AOC의 그린뉴딜 결의안이 통과되었었다.15 지금은 포스트 코로나의 비전으로 그린뉴딜이 내걸리고 있다. 유럽 집행위원회는 모든 코로나 극복 집행예산을 그린딜의 원칙에 맞추어 집행하겠노라고 공언했고, 암스테르담은 도넛 모델을 채택했으며, 새로 선출된 파리 시장도 그린뉴딜 시행령을 밀어붙이고 있다. 위기를 틈타 전례 없는 시도들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전환의 밀물에서, 그린뉴딜을 내거는 것은 더 논의할 사항이 아니다. 지금은 그래서 어떤 그린뉴딜이냐를 이야기 할 때이고, 그린뉴딜이 무엇인지 ‘그린워싱’과 ‘구린뉴딜’에 맞서 분명하게 확립해야 한다. 그린뉴딜의 정의를 새롭게 보이고, 원칙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필자는 그린뉴딜을 ‘거대한 전환’의 다른 말로 쓴다. 우리 앞에 닥친 기후와 경제의 쌍둥이 위기를 헤쳐가기 위해 밖으로는 생태적 한계를 넘지 않으면서 안으로는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는 구조 전반의 거대한 전환이 절실하다.
그렇기에 그린뉴딜의 정의는, “급박한 기후위기와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 생태적 부정의에 마주해 거대한 전환을 모색하는 사회적 합의”라 할 수 있겠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맷돌에 갈리고 있으니 멈추어보자” “세기말에서 살아남을 방법 찾아보기” “새로운 사회계약” “새 판 짜기” 이렇게 터져 나오는 전환의 목소리를 모아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내는 ‘그릇’, 필자는 이를 그린뉴딜로 이해한다.
그린뉴딜의 원칙으로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위기를 막는다면, 탄소배출을 제로로 줄이고 양극화를 완화한다면 그 책략과 방향은 모두 그린뉴딜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원칙화 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급진적 기후운동의 문제의식에 바탕을 둔 그린뉴딜일 것이고, 둘째 불평등과 부정의를 해결할 정의로운 전환이 담겨야 하며, 셋째 2030년 절반감축, 2050년 넷제로(혹은 배출제로)는 선결과제다.
한창 기후운동이 타오르던 2019년 9월 그린뉴딜에 관한 책 세 권이 동시에 나왔다. 유일하게 한국에 번역된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글로벌 그린뉴딜(The Global Green New Deal』,『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를 쓴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의『On Fire: The (Burning) Case for a Greeen New Deal』, 영국의 생태경제학자인 앤 페티포(Ann Pettifor)가 쓴『The Case for the Green New Deal)』이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그린뉴딜의 내용과 강조점이 많이 달라지기에, 이 세 책을 살펴보면서 그린뉴딜을 이해하는 기조의 차이를 살펴보고, 지금 우리의 전환에 어떤 아이디어가 필요한지를 찾아보자.
제러미 리프킨은 “그린뉴딜이라는 이름은 1930년대에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원한 뉴딜과 유사한 비상 대책이라는 의미로 친환경(탈탄소) 녹색 성장에 방점을 두고 지은 것이다.”고 말하며 다음 ‘성장’으로 그린뉴딜을 이해한다. 또한 그린뉴딜의 목표로 “향후 10년 내에 청정 재생 가능 자원으로 내수 전기의 100%를 생산한다. 국가의 에너지 그리드 및 건축물, 교통 인프라를 업그레이드 한다. 에너지 효율을 증대한다. 녹색 기술의 연구 개발에 투자한다. 새로운 녹색 경제에 걸맞은 직업훈련을 제공한다.”며 에너지, 산업, 인프라에 초점을 맞춘다.16 어쩌면 지금 그린뉴딜 판이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인프라 확충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리프킨의 영향력이 막심하다 할 수 있겠다. 그는 그린뉴딜을 기후위기를 막으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3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한국판 뉴딜에서도 질문했듯이 이 디지털화가 그린을 확실히 담보할 수 있을까? 슈마허나 일리치, 김종철 같이 근대 과학기술의 근본적 파괴성(반생산성, 거대기술의 모순)에 대해 성찰하는 사상가들의 비판에 리프킨이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편 리프킨의 그린뉴딜은 빠르게 주류화 되고 있다. 그가 ‘기업이 다가오는 미래에 살아남으려면 어째야 하는지’ 실마리들을 던져놓은 탓에 대기업에서도 리프킨이 기조연설을 맡은 그린뉴딜 포럼에는 많이들 찾아온다고 한다. ‘국가-기관-투자자’의 이해관계와 서구 선진국의 관점에만 충실한 모델이기에 그의 ‘글로벌 그린 뉴딜’은 서구의 혁신 발전 모델 -전 지구적인 기후정의 회복과 공동대응과 무관한-을 보편화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제3세계 공적개발원조(ODA)의 21세기 버전이 될 위험을 지닌다.17
나오미 클라인의 관점은 적확히 리프킨의 이 모순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 그는 리프킨의 그린뉴딜이 ‘녹색 식민주의’가 될 가능성을 경계한다. 그의 이전 저작『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의 부제가 ‘자본주의vs기후’였던 것처럼, 기후위기를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으로 파악하고 있다. “기후 위기는 긴축과 민영화, 식민주의와 군국주의, 이 모든 체계를 떠받치는 데 필요한 다양한 타자화 체계라는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18 무엇보다 그는 기후운동과 남반구의 기후정의를 주목해, 탈제국주의 및 반식민주의, 기후정의의 차원으로 그린뉴딜을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기후위기를 막는 그린뉴딜은 자본주의가 낳은 교차되고 중첩된 모순들을 같이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차원으로 이해할 때 그린뉴딜은 남반구와 북반구, 미래 세대와 현재 세대, 자본가와 노동자의 불합리한 근본적 모순을 해결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말처럼, “그린뉴딜은 근 200년 동안 ‘자연자원 활용의 이익은 사유화하고, 자연자원 파괴의 비용은 사회화’해왔던 기득권과의 싸움을 통해서 달성된다.”
마지막으로 생태경제학자 엔 페티포는 그린뉴딜을 지구 생태, 그리고 그 속의 경제계를 정상 상태(steady state)로 만드는 기획으로 이해한다. 허먼 데일리를 비롯한 생태경제학자들의 논의를 따라가 경제계를 생태계에 묻어든 것으로 파악하고 다시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전환으로서 그린뉴딜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탈성장의 기획을 그린뉴딜과 연결시킬 여지가 충분히 생긴다. 또한 그는 금융자본주의의 약탈을 지금의 생태위기의 원인으로 짚는다. 그렇기에 전면적인 금융·통화 제도 개선(루즈벨트 시대의 뉴딜은 금융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핵심이었다)을 요구하고 현대화폐이론(MMT)를 비롯해 그린뉴딜의 재원과 관련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연결할 수 있다. 그는 돈의 작동방식을 근본적으로 건드리는 금융의 근본적 개혁이 부재하다면 그린뉴딜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이야기한다. 필자는 앤 페티포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그린뉴딜 판에 가장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상세한 내용을 살피지는 못했지만, 리프킨의 3차 산업혁명 말고도 전 지구적 기후정의를 실현하고 경제계를 생태계 사이에서 안정적으로 자리하게 전환하는 차원으로 그린뉴딜을 이해할 수 있음을 짚어 두고 싶다.
– 서구주도의, 탑다운 방식의 정책, 에너지 전환 뿐이고, ‘적응’ 없이 ‘저감’만 말해지며, 경기부흥을 목적으로, 불평등 대책 없이, 기업 중심으로만 구성된 그린뉴딜을 넘어서
왜 그린뉴딜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당위적 측면과 세계적 흐름의 면에서도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어떤 그린뉴딜이어야 하는가가 중요하고, 각종 현안과 자료와 아이디어의 물결이 모두 흘러나와 부딪히며 파도를 만들어가 전환을 일구어야 한다. 언어는 그릇이고, 필자는 ‘기후위기를 막고 불평등을 해소하는 전환’이라는 방향만 가지고 있다면 모두 그린뉴딜의 방향성으로 생각한다. 이 뜻과 내용만 담고 있으면 구체적인 내용과 계획은 상상의 영역이다. 많은 것들이 상상되고 논의될 수 있는 큰 그릇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그린뉴딜은 이 땅의 특색과 경로에 맞추어 비전을 제시하고 다양한 접근을 포괄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편향된 그린뉴딜에 몇 가지 제언을 준비했다.
첫 번째로, 서구·북반구·1세계 중심의 그린뉴딜을 넘어설 수는 없을까. 미국에서 그린뉴딜의 깃발을 걸고 선거운동이 일고, 유럽연합에서 가히 모범이라 할 만한 그린딜을 채택하면서 전환의 로드맵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하여, 남미, 중동,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배 시대부터 애초에 서구와는 다른 경로를 걸어온 나라들이 1세계와 같은 차원과 같은 기준, 같은 형식의 그린뉴딜을 채택할 수 있을까. 전 지구적 생산 사슬 하에서 서구의 산업기지와 탄소배출량을 그대로 이전받아 종속된 제 3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다른 ‘그린뉴딜’이 필요하다. 그린뉴딜까지 서구형으로 이식할 수는 없다. 리프킨의 제언은 “서구 기업의 미래 기술인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도로 시스템 및 ICT와 결합한 에너지 인프라를 아프리카 전역에 깔겠다는 것(채효정)”으로 보인다. 만약 그리 된다면 전환을 표방한 녹색 식민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나라들이 서구의 경험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남반구의 환경운동은 북반구의 운동과는 결이 다르다. 전 지구적 생태계 파괴의 차원에서 그린뉴딜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미국 녹색당의 그린뉴딜은 반제국주의적인 기조로 미국 제국의 경제·금융·군사구조를 겨냥한 바 있다.
제3세계의 나라들에 적정기술과 재생에너지의 민주성·민중성을 백분 활용해 고도산업과 하이테크놀로지 없이도 안전하고 깨끗한 공간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전환의 상은 없을까. 로스토의 경제성장 단계론과 같이 탄소문명에 잔뜩 중독되어 고도소비사회가 되어야 그 다음 전환을 모색할 수 있다는 발상은 금물이다. 오히려 고도의 탄소문명과 경제성장에 일단 중독되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당장 우리도 수출주도형 경제로 전국토를 개조한 박정희의 망령으로부터 아직까지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한국의 경우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물음이 있었다. 산업화 이후의 산업화는 가능한가? 한국은 무너진 제조업 도시인 군산, 거제, 창원에 대안을 내놓음과 동시에 탄소중립의 경제구조를 만들어 갈 수 있는가. 지긋지긋한 GDP 대신에 다른 목표를 내걸고 앞으로 닥쳐올 재난들에 단단히 대비된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없나. 헬조선 딱지는 내던지고 내가 사는 곳을 살기 좋은 곳이라 말할 수는 세상은 어떻게 해야 만들어갈 수 있나. 한국은 더 이상 자살률 1위와 기후악당의 그림자를 이면에 짙게 드리운 수출주도형 탄소경제대국일 수 없다. 세계는 더 이상 불평등한 생산사슬에 의존하고, 자유무역의 신화로 포장된 전 지구적 분업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군산, 거제, 마산 등 초국적 기업의 산업단지가 해외로 이전하거나 산업 모델이 쇠퇴해 지역민들의 생계터전이 공동화된 곳이야말로 한국경제를 다룰 때 가장 주목해야 하는 지점이다. 이 쇠퇴해가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공업 도시들을 토사구팽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롭게 재탄생 할 수 방도를 뉴딜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탈탄소 경제는 내수경제의 특징을 가지기에 지역의 순환경제이자 사회적 경제의 특성을 가진다. 그린뉴딜의 경제상이 사회적 (연대) 경제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두 번째로, 탑-다운 정책으로서의 그린뉴딜을 넘어설 수는 없을까. 뉴딜은 태생부터(루즈벨트 때부터) 정부 주도 하의 대규모 국책사업의 명을 과감한 재정지출과 정책을 골자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은 거버넌스, 지자체, 로컬, 마을, 소규모공동체, 사회적 경제, 그 외 기타 등등 정부과 시장의 지평을 벗어나 경계선을 허물면서 등장한 운동들과 공간들이 있지 않나. 그린뉴딜을 이런 차원으로 상상할 수는 없을까? 그런즉, 정부의 정책이 전환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로 움직이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다.
이는 탑-다운이 아닌 바텀-업 방식으로, 관료제의 미온한 작동 방식을 극복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다. 그린뉴딜이 지역에서, 민중에 기초해서 발화되고 구호로 터져나올 때 대안으로서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생태사회주의자 이안 앵거스(Ian Angus)가 말하듯이.
“세부사항도 중요하지만, 내 생각에, 훨씬 더 중요한 것은 GND 계획이 권력의 복도 밖에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에 의하면 ‘실제 운동의 모든 걸음들이 한 다발의 강령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나오미 클라인의 말처럼 ‘대중적인 사회운동만이 지금 우리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대부분의 정치인과 NGO들로부터 실제로 보는 것은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설득하거나, 의회 밖의 행동을 부차적인 방법으로 다루거나,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선거 지원으로 그것을 조종하는 것에 맞춘 하향식 계획들이다. 그것은 패배의 공식이다. ‘그린 뉴딜’이 그것뿐이라면, 그것은 종이조각일 뿐이다.”19
세 번째로, 에너지 전환 말고도 그린뉴딜이 담을 수 있는 전환은 많다. 흔히들 그린뉴딜을 석탄·석유에서 태양·풍력·재생으로 바꾸는 ‘에너지전환’의 차원에서만 이해한다. 탄소배출제로의 중요성이 긴급해지며 실제로 대기 중에 배출하는 탄소량을 줄여야하니 가장 큰 부문을 차지하는 에너지 부문의 전환이 자주 회자되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배출량만 어떻게든 줄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와 그 움직임과 동떨어진 채 배출량만 줄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탄소중독사회에서 ‘탈’해야 장기적으로 배출제로까지 갈 수 있다. 에너지 전환과 함께 사회 자체를 민주적이고 협력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도가 무엇이 있을까.
이는 계량주의적 접근을 탈피(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탄소배출량’에만 집중하다가 놓치는 것들이 많다. 일종의 탄소물신성이다. 생태위기는 기후에 한정해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일례로 지구한계과학자 록스트륌이 짚고 있는 지구 한계의 아홉 가지 경계선은 기후변화, 성층권 오존층의 파괴, 생물다양성의 손실률, 화학물질에 의한 오염, 해양 산성화, 담수 소비, 토지 이용의 변화, 질소·인에 의한 오염, 대기오염 혹은 에어로졸 부하로 구성된다. 탄소량에만 시선이 쏠리면 자연계에 대한 무지가 반복할 뿐이다.
그린뉴딜의 내용에는 배출량을 직접적으로 감축하는 탈석탄, 에너지 전환, 산업전환을 기본으로 하고, 탄소문명을 총체적으로 파하고 배출량을 장기적으로 간접적으로 감축시킬 생태교육, 커먼즈 지원, 지역불균형 해소(도시집중화 탈피) 등 잠재력 다분한 영역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가능성 혹은 잠재력에 주안점을 두어보자. 이들은 정동·돌봄·보살핌·연대의 밭에서 자라는 사람들과 단위들에게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과 어떤 움직임에 자금과 힘이 가야하는지는 잘 관찰해보자. 상상의 빈곤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네 번째로,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저감’ 뿐이 아니라 ‘적응’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시대 ‘적응과 저감’을 기조로 사회 전반의 안전망 확충과 녹색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지금 회자되는 그린뉴딜은 저감을 기조로 인프라 구축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리프킨의 망령 탓이라 해두자). 중요한 것은 이번의 코로나19에서 보듯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후재난·리스크가 시시각각 닥친다는 것이다. 이 상시적 ‘위험사회’에 대비하고 ‘적응’하는 방향으로서의 그린뉴딜이 필요하다. 즉 현재의 위기를 촉발한 원인의 제거도 필요하지만, 닥쳐오는 재난에 대비가 필요하다. 회복탄력성 이야기다. 이제는 위험사회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비’하는 ‘적응’의 그린뉴딜을 말할 필요가 있다.
다섯 번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보다는 회복이 아닐까. 세간에서 이야기되는 그린뉴딜은 가속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의 경기여파로 성장률을 비롯한 모든 전망치가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경기가 ‘둔화’되고, ‘침체’되고, 어려워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속’ 혹은 ‘부흥’해야 한다는 논지는 분명히 이전의 무지막지한 성장담론과 (정치권과 경제권의 결탁으로 빚어지는) 경기부흥담론의 흔적을 띄고 있다.
고로 탈성장 담론에서 이야기해왔던 더불어 가난, 정동경제, 적정기술, 협동과 살림의 경제, 순환사회, 느림과 여백 등지는 이곳에 설 자리가 없다. 가속주의(그린뉴딜)인가 감속주(탈성장)의 논쟁은 더불어 가는 균형과 지점을 찾음으로서 종식시킬 필요가 있다.
이 논쟁은 그린뉴딜과 탈성장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한강의 기적과 GDP 3만 불의 성장지상주의 신화가 너무 강하게 작용하는 까닭에 탈성장의 구호는 꺼내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그린뉴딜과 탈성장은 대비되는 관계로 파악되곤 한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세간에서 이해되는 그린뉴딜은 ‘녹색성장’으로 이해되고 이에 흡사하게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법적 이해를 넘어서 근원적으로 톺아볼 때 그린뉴딜이 담지하고 있는 기후위기 대응과 불평등 해소는 탈성장의 기조와 분리될 수 없다. 탄소배출량 뿐 아니라 지구한계의 경계가 간당간당한 지금, 양적 성장(경제의 물질적 규모)이 지금을 상회해서는 안 되는 것도 분명하고, 불평등해소를 위한 다른 접근(자유주의적 공정 경쟁과 분배, 낙수효과, 소위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모조리 망한 상태라는 것도 뚜렷하다. 무엇보다 무한소비, 국가성장경쟁력을 최고선으로 치켜온 경로를 탈피하기 위해서 모든 성장기조에서 ‘탈’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전환을 설계할 때 새로운 삶의 방식과 기존의 헤게모니(성장, GDP, 탄소) 갈아치우기는 필수적이다. 그린뉴딜이 일구어야 할 전환은 GDP로 평가될 수 없는 영역이어야 한다. 돈에 매몰되지 말고 사람과 순환 방식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논쟁적인 지점이다. 하지만 그린뉴딜을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한 급진적 전환으로 이해한다면, 탈성장과 그린뉴딜은 상반되는 것이 아닌 길항작용, 앙상블, 투트랙 접근이 될 수 있다. 성장을 가져가면서 그린뉴딜을 말한다고? 한국판 뉴딜 짝 날 뿐이다. 이는 사회 그리고 그 속에 묻어든 경제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놓을까에 대한 부분이다. 탈성장사회로 가기 위한 급격한 전환으로써 그린뉴딜을 말해보자.
여섯 번째로, 불평등을 해결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한국판 뉴딜에 정의로운 전환이 빠져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미래의 급속한 산업전환 가운데 기존의 노동자들에게는 큰 충격이 올 것이다. 이에 대한 대비 없이는 지금처럼 플랫폼 자본주의에 구명조끼 없이 몸을 내맡기는 식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기금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는 일자리와도 연결된다. 한국판 뉴딜에서 그나마 치켜세워지는 일자리 백만 개도 자세히 파보면 ‘위험하다.’ 고용효과가 거의 없는 디지털 뉴딜에 일자리를 만들려니, 단기계약 비정규직, 청년 유령노동을 일자리 ‘수’에 혈안이 되어 셈하고 있다. 그린뉴딜이 염원하던 양질의 안정적인 녹색 일자리와는 다른 부분이다.
더해서 한국의 불평등은 부동산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왜 그린뉴딜에는 주거문제를 해결할 어떠한 길도 없는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총체적으로 실패했고 그린뉴딜과는 동떨어져 진행된다. 한국에서의 그린뉴딜은 반드시 부동산 불평등을 녹색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린뉴딜에 기후위기에 점점 취약해지는 사회적 약자의 안전망 보장과, 부동산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거대안이 들어가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부동산 계급·세습사회의 ‘제도적 규제’와 생태적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주거정책’이 이에 포함되어야 한다. 닥쳐오는 기후재난의 위협 아래, 안전한 집은 절실히 중요해지고 있다. 그린뉴딜에 토지공개념을 데려가 볼 수는 없을까. 주거권을 지켜내는 그린뉴딜을 그려보자. 불평등을 생태평등으로 메꾸는 것이다. 원천적인 불로소득 차단에, 환경적으로 쾌적하고 안전한 공간을 공공임대주택으로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 상상력이 필요하다.
일곱 번째로, 전환의 주체는 기업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뉴딜을 한다면, 무엇보다도 기업에 대한 뉴딜을 해야 한다. 루스벨트 시대가 1886년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면 한국에선 1997년을 바로잡는 조처가 필요하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IMF와 FTA를 통해 강화된 글로벌 기업의 약탈적인 투기 자본주의를 규제하는 뉴딜일 것이다. (…) 이는 기업의 주인을 투자자에서 생산자인 노동자로 바꾸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기업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20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기업을 자본의 품에서 노동자의 품으로 돌려놓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덧붙여 기업에 가는 뉴딜자금이 그린워싱으로 버려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ESG를 표방해놓고 석탄투자 비중을 줄이지 않는 삼성 계열사라던가, 해외석탄투자를 아직도 강행하는 정신 못 차리고 있는 한전이라던가, 지속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탄소배출량 최대를 기록하는 포스코와 같은 회색 기업들을 정밀하게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린워싱 여부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린뉴딜은 이러한 회색 기업들과 단호한 결별을 고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SK나 LG화학처럼 녹색으로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전환의 주체는 노동자와 지역민, 청년, 이주민, 여성, 소수자가 되어야 한다. 전환의 상에 대기업이 자리할 곳은 없다. 종합하면 서구주도의, 탑다운 정책의 방법으로, 에너지 전환만 이야기 되고, ‘적응’ 없이 ‘저감’만 말해지며, 경기부흥을 목적으로, 불평등 대책 없이, 기업 중심으로 구성된 그린뉴딜을 넘어서 남반구의 환경정의를 고려하고, 풀뿌리 바텀 업으로 모색되며, 가능성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회복과 감속을 위한, 노동자와 지역민, 청년, 이주민, 여성, 소수자이 주체가 되어 불평등을 해결하는 그린뉴딜을 상상했으면 한다. 그린뉴딜이 가슴 뛰는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온갖 말들이 너울거리는 가운데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마무리 짓지 못해 마음에 계속 남아있던 이 연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다. 코로나가 사회를 휩쓸기 시작한 게 이월 말이었으니, 이렇게 된지도 어느덧 반년이 됐다. 처음 이 [코로나, 기후위기, 그린뉴딜]기획을 열었던 것은, 급격하게 찾아와 사회를 흔들어놓은 이 사태에 뭐라도 말을 보태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나름 치열하게 세상의 경로를 바라보고 방향을 모색하려는 것이었는데 너무 컸지 싶다. 짧고 미숙하더라도(지금도 미숙해 마지않지만) 그냥 툭 하고 쓸 걸 거대하고 대단한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다. 그렇지만 시간이라는 게 참 야속하다. 두려움과 책임감은 어느새 풍화되어버렸다. 마스크가 안경이나 목걸이마냥 익숙해져 버렸듯이.
이 익숙함은 본능이지만 들여다보면 두렵다. 원전이 터지거나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 이는 비단 나만의 감정일까. 에필로그를 쓰는 지금도 전례 없는 홍수가 나날이 기록을 깨고 난 이후다. 폭염, 코로나, 물난리, 다음은 뭘까. 재난에 익숙해진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겠구나, 싶다.
여러 번 그린뉴딜에 대해 말하려고 했었다. 전환의 그림을 그리려고 나름대로 아등바등 했으나 뭐가 막 잘 되진 않았다. 어쨌든 잘 모르겠다는 게 결론이다. 어쩌다보니 글 개요와 서문을 다섯 번째 갈아엎게 되었다. 정부가 처음 그린뉴딜을 입에 올릴 때, 한국판 뉴딜이 발표되거나 할 때, 광화문 광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이건 아니다 싶어 써야겠다 하고 책상 앞에 앉았지만 매번 글을 맺지 못했다. 스스로 안 풀리는 것도 많았고, 내가 이걸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회의감이 밀려와 그린뉴딜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이겠다.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 일리치가 평생 품고 살았다는 이 문구가 되새겨질 때 나는 글을 맺을 수 없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꿈꾸는 전환이 그린뉴딜에 담길지 의문이다.
정세는 빠르게 변하고, 돈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그린뉴딜은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어쩌면 말해온 덕인지도) 한 해만에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이전처럼 그린뉴딜을 알리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전환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돌아봄이며, 제대로 된 그린뉴딜과 이에 연결시킬 상상력이다. 뻔한 말이다. 그렇지만 애정을 가지고 공부한 낱말을 이렇게 먹칠해 버릴 수는 없지 싶다.
한 해,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공부의 방향은 사회과학에서 철학, 서구에서 한국 혹은 제 3세계로 흘렀다. 그 가운데는 화, 환멸, 질림, 직시, 갈증 이런 것들이 있었다. 아마 곧 말들의 전제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 같다. 나는 한국철학 공부라고 이를 부른다. 더해서 당분간 ‘한국 기업의 전 지구적 생태학살’을 연구하려고 한다. 그린뉴딜을 지켜보면서 그린워싱에 잔뜩 질려버렸다. 녹색으로 칠해진 지옥들에 혀를 내두르고 싸우려 뛰어들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린뉴딜을 바르게 되찾아 오는 데 힘을 쏟아볼까 한다.
덧붙이자면, 지금 논의되는 그린뉴딜이 담고 있는 한심한 꼴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한다. 어떤 그린뉴딜이냐, 어떤 전환이 필요하냐에 대해서 밀도 있게 논쟁되었으면 좋겠다. 낡아빠지고 한심한 말들과 언어에 우리의 상상력까지 빼앗기진 말자.
경향신문, 조현철 칼럼, “[녹색세상]이것은 그린 뉴딜이 아니다”, 2020.07.24. ↩
경향신문, 이광석, “[이광석의 디지털 이후](21)성장중독에 급조된 ‘한국판 뉴딜’…그린 뉴딜 주축으로 뜯어고쳐라”, 2020.08.06 ↩
한겨레, 이병천, “[이병천 칼럼] 한국판 뉴딜, 타성적 올드딜이냐 전환적 뉴딜이냐.” 2020.08.20 ↩
오마이뉴스, 이유진, “차라리 ‘그린뉴딜’이라고 하지 말지.”, 2020.08.13. ↩
권리찾기유니온, 이정호 기자, “알맹이 빠진 그린뉴딜에 꼭 필요한 것은”, 2020.07.01. ↩
프레시안, 이승윤 교수, “절체절명의 시기 발표된 ‘헌딜’”, 2020.07.25. ↩
경향신문, 반기웅 기자, “한국판 그린뉴딜, 기후위기 못 막는다.”, 2020.8.22. ↩
정부 기관 소식, 국무조정실, [보도자료] 제1차 수소경제위원회, 2020.7.1. ↩
녹색평론 173호, 2020년 7-8월. 115p ↩
민중의 소리,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 “[그린 뉴딜 리포트] 코로나19 경제대책, 그린 뉴딜로 나아가야 – 2022년 대선까지 열린 의제 ‘그린 뉴딜’”, 2020.4.13 ↩
넓은 스펙트럼에서 그린 뉴딜이 공유되고 뒤섞이게 된 이유를 상세히 보려면 [채효정, 참세상, 워커스 사전 ‘그린뉴딜, 2020.04.16.], [존 벨라미 포스터, 「불타오르는 우리 시대」, 구준모·박동범 옮김, 2019.11.06.]를 참조하라 ↩
현재 나와 있는 다양한 그린뉴딜을 비교한 자료로는 녹색전환연구소에서 번역한 「열 가지 그린뉴딜, 어떻게 비교할까요」가 있다. 아래 참조 ↩
존 벨라미 포스터, 「불타오르는 우리 시대」, 구준모·박동범 옮김, 2019.11.06. ↩
오마이뉴스. 김병권. “코로나 이후 세상을 만들려면 그린뉴딜하라!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판 뉴딜’이 안고 있는 결정적 함정”, 2020.04.23 ↩
김병권, 『기후위기와 불평등에 맞선 그린뉴딜』, 책숲, 2019, 18p ↩
제러미 리프킨, 안진환 역, 『글로벌 그린뉴딜』, 민음사, 2020, 15p ↩
채효정, 참세상, 워커스 사전 ‘그린뉴딜, 2020.04.16., ↩
나오미 클라인, 「익사하든지 말든지- 더워져 가는 세계에서 자행되는 타자화라는 폭력」,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꽃 – 자본주의 시대 기후 변화에 대한 단상』 수록, 두 번째 테제, 2018, 55p ↩
Review Of African Political Economy, 이안 앵거스(Ian Angus), 「생태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이안 앵거스와의 인터뷰(Ecosocialism or barbarism: an interview with Ian Angus)」. 2020.7.19 ↩
채효정, 워커스 사전 「기업」, 2020.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