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생태계 내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적응하고 공진화하며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서식지 파괴, 공장식 축산, 자유무역으로 일컬어지는 탄소자본주의의 동학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어그러져 자연진화의 질서와 속도를 상회하는 낯설고 날카로운 만남을 갖는다. 이는 빈곤과 불평등, 밀집도, 이동률(거리), 불안과 공포와 같은 사회적 원인으로 증폭되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을 ‘코로나 사태’로 치닫게 한다. 이러한 총체적 원인은 기후위기를 빚어낸 원인과 적확히 동일하며 그럼에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위기는 기후위기의 일환이다. 하지만 양자는 단순한 상관관계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악화하는 양의 되먹임 관계를 가진다. 기후위기는 신종 감염병의 증가‧확산‧증폭을 가져오고, 코로나 사태와 같은 신종 감염병은 사회적 대응력과 지역사회 회복력, 신뢰, 공공성, 민주주의를 위험 수위로 데려다 놓는다. 그럼에 우리에게는 이 난국을 돌파할 전환의 상상력과 설계도가 긴요하다.
0. 들어가며
1. 코로나바이러스, 생명과 바이러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2.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자연적 원인 – 서식지 파괴, 공장식 축산, 자유무역
3. ‘코로나 사태’의 사회적 원인 – 빈곤과 불평등, 밀집도, 이동률(이동거리), 사회적 불안과 공포
4. 코로나와 기후위기
5. 마치며 – 절망과 희망 사이, 대안으로서의 그린뉴딜
본 글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 생명과 바이러스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과 ‘코로나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한다. (1장) 생명은 홀로가 아니라 생태계 내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적응하고 공진화하는 존재다.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로, 이들 미생물은 보편적으로 숙주와 상호적응구조의 관계를 맺는다. 감염병의 원인은 바이러스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은 공진화적 상호적응구조와 동적 평형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유기적 관계가 무너지고 치명적인 질병을 빚는 균열된 관계로 변함을 말한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바이러스를 공포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환원론적 질병관에 매몰되어, ‘중국인 입국 금지’, ‘철새 내쫒기’와 같은 피상적이고 단순한 원인진단과 대안을 내놓고 있다. 우리에겐 왜 치명적인 질병을 빚어냈는가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원인진단이 필요하다. (2장)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원인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데에 있다. 서식지 파괴, 공장식 축산, 자유무역으로 일컬어지는 탄소자본주의의 동학 속에서, 생명간의 공진화 적응속도를 상회하는 ‘가속’과 지구한계를 넘어서는 ‘확장’이 빚어진다. 이 가운데 인간과 자연, 인간과 바이러스, 생명과 생명의 낯설고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만남은 필연적으로 소외와 모순 그리고 파괴로 이어진다. 관계의 ‘균형’은 깨어져 ‘균열’로 바뀌고, 이 기제와 동학은 무분별한 서식지 파괴와, 치명적인 공장식 축산과, 유토피아적인 자유무역으로 이루어진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란 불씨를 일으킨 원인은 이곳에 있다. (3장) 이렇게 생겨난 불씨를 화마로 키운 것은 사회적 원인이다. ‘감염증’을 ‘감염병’으로, ‘감염병’을 ‘사태’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을 ‘코로나 사태’로 치닫게 한 원인을 분석한다. 불평등과 빈곤, 밀집도, 이동률(이동거리), 불안과 공포 등과 같은 사회적 원인들은 기존의 위협을 강화하고 증폭하고 배가시켜 ‘재난’을 만든다. (4장) 이러한 총체적 원인들은 기후위기를 초래한 원인이자, 기후위기에 취약한 원인이고,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는 우리와 무관한 외생적인 사태가 아니라 우리 체제가 내생적으로 만들어낸 사태이다. 그럼에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위기는 기후위기의 일환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는 단순한 상관관계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악화하는 악순환의 양의 되먹임 관계를 가진다. 기후위기는 신종 감염병의 증가‧확산‧증폭을 가져오고, 코로나 사태와 같은 신종 감염병은 사회적 대응력과 지역사회 회복력, 신뢰, 공공성, 민주주의를 위험 수위로 데려다 놓는다. 그럼에 우리에게는 이 양의 되먹임 루프를 음의 되먹임 루프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아닌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의 순간을 만들어 낼 전환의 상상력과 설계도가 긴요하다.
바이러스와 코로나바이러스가 무엇인가 물음을 던지며 글을 열어본다. 바이러스란 무엇이고, 왜 이번 코로나19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치명적인 존재로 자리했는가. 바이러스는 ‘다른 유기체의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만 생명활동을 하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왕관 모양으로 동물이나 사람을 감염시킴으로써 호흡기 혹은 위장 질환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로 정의해둘 수 있다.
지금에 와 코로나바이러스는 전 국민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원래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다. 우리와 오랜 시간 널리 있어왔고 ‘풍토병성 감염 형태로 경미한 증상을 유발하는 병원균(약학정보원)’ 정도로 질병학적 관점에서도 경미한 존재로 불려졌다. 하지만 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2002년 사스(SARS), 2015년 메르스(MERS)에 이어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까지 온갖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이는 기존의 코로나바이러스가 신종 혹은 변종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경미함을 넘어 치명적인 감염병을 유발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진다. 그렇다면 왜 코로나 바이러스가 신종 혹은 변종으로 나타나 인간에게 치명적인 감염병을 일으켰는가.
그전에 “왜 바이러스가 신종‧변종으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나타났는가?” 라는 이 질문이 합당한 것인지를 한 번 더 묻지 않으면 안 된다.1 이 물음은 외생적인 사유방식에서 뻗어져 나온 물음이다. 질병의 원인을 신종‧변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존재에 두고, 본 사태의 전적인 책임을 바이러스에게 묻는 것이 맞는가. 코로나 바이러스는 정말로 ‘난데없이’ ‘등장’했고, 치명적인 감염병으로 이어진 것도 바이러스의 존재방식이 ‘갑자기’, ‘예측 불가능하게’ 신종으로 나타나거나 변종으로 변이를 일으켰기 때문일까?
우리가 바이러스에 대해 알고자 할 때는 감염병이 이미 발생했고, 그 원인으로 바이러스의 존재가 지목된 이후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공포에 붙들린 채 오직 바이러스의 위험성, 치사율, 전염력, 발원지만을 궁금해 하고, 이는 환원주의적 질병관에 잠식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생명의 질병을 어떠한 관계의 균열, 혹은 외‧내부의 불균형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고, 어떤 요인으로만 혹은 어떤 존재에게로만 환원시킬 때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단일한 원인을 ‘코로나바이러스’로 두게 된다. 그리하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외생적인 질병이 되어버리고, 문제의 모든 원인은 외생적으로 등장한 바이러스에게로 돌려진다. 이러한 환원관은 다분히 근대적인 존재론, 타자론에 바탕을 두고 있고 사회적 지평에서 그대로 “중국인 숙주”, “우한폐쇄” 등의 혐오와 차별로 번진다. 참 닮아 있는 시선이다. 우리는 바이러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턱도 없는 소리로 치부하고, 감염병의 원인인 바이러스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전파되었는지에만 모든 초점을 두고 있다. 자연히 다른 원인과 가능성들은 잊혀진다.
당장 처음에 언급한 정의도 이러한 환원주의적‧존재론적 관점에서 바이러스를 보는 시선이다. 이러한 관점은 질병의 원인을 잘못 진단하도록 이끈다.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와 신종‧변종의 등장요인에만 초점을 둘 때, 질병에 대한 본질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은 모두 실패하고 다른 여타의 원인과 가능성들은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 즉,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원인을 ‘코로나19바이러스’에게만 두다보니, 그 바이러스가 변종 혹은 신종으로 등장하게 된 자연적 그리고 사회적 원인들은 잊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이해이고 접근이며 진단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말을 빌려 풀어가려고 한다. “질병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박종무)”
더하여 필자는 ‘코로나19바이러스(존재)’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질병)’, ‘코로나 사태(사회적 재난)’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낱말이 사뭇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는 질병이 발생하는 까닭을 단순하게 바이러스 탓으로만 두는 환원주의적 질병관에서 탈피하기 위한 방도이다. 또한 이 장에서는 인간(주체)과 바이러스(타자)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두지만, 다음 장에서는 인류로서의 인간과 생태계 혹은 지구로서의 자연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둘 것이다.
(이 장은 수의사이자 생명윤리학자인 박종무 선생님의 식견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음을 일러둡니다. 『살처분의 과학적 근거와 한계점』)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지구상에 생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35억 년 전이다. 그리고 35억년의 긴 시간을 거쳐 생명은 진화를 하여 오늘의 다양한 생물이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볼 부분은 모든 생명은 자기가 존재하는 공간(Niche)에 적응하도록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모든 생명들은 자신이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든지 그러한 환경이 오랜 시간 자신이 진화해왔던 공간이라면 그러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살아간다.” (중략) 그 환경은 매우 많은 것을 포함한다. 습도, 온도, 기압, 산소포화도와 같은 공간적인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먹거리 환경도 포함한다. 여기에 또 중요한 환경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생태적 환경이다. 생명은 어느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생태계 내에서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 박종무, [생명이야기], 가축전염병에 의한 반생명적 살처분 정책은 지속돼야 하나<上>
생명은 진화하며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생태계 내에서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은 자기가 존재하는 공간에 적응하도록 진화”되었고, “자신이 진화해온 공간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공진화한다.”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생명들 간의 관계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와의 관계이다. (중략) 모든 생명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퍼져 있는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를 해왔다. 이 말은 이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존재가 각 생명의 질병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관계에 있다. 생명이 건강하다는 것은 이들 미생물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의 피부에 세균이 있다고 하여 피부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건강할 때에는 그 세균과 적절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건강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하여 그 균형이 깨어질 때 질병이 생기는 것이다.”)
- 박종무, [생명이야기] 가축전염병에 의한 반생명적 살처분 정책은 지속돼야 하나<上>
“바이러스의 존재가 각 생명과 질병의 원인은 아니”라는 점, “생명이 건강하다는 것은 미생물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이에 따라 원래 바이러스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 해도 될 것이다. 바이러스나 세균은 지구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꼭’ 질병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지구상에 바이러스와 세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보편적 존재이다. 해수 1ml에는 10⁷개의 바이러스가 그리고 해양 퇴적물 1g에는 10⁸-10⁹의 바이러스가 있다. 바이러스는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간 게놈 연구에 따르면 인간 DNA의 8%가 온전한 바이러스 게놈이며, 이와 별도로 40-50%가 바이러스 유전자의 조각이다. 평균적으로 사람의 폐에는 174종의 바이러스가 있다. 또 지구의 표면과 내부를 통틀어 지구에는 10²⁹개의 세균이 있다고 추정된다. 그들 대부분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또한 큰 도움을 주는 세균들도 있다. 바이러스나 세균은 지구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하여 질병이 발생되지는 않는다.”
박종무, 살처분의 과학적 근거와 한계점
감염병을 바이러스나 세균의 ‘존재’로 환원하며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기제에서 잠깐 거리를 두자.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공포스럽게 생각하지만 바이러스는 숙주를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보편적 존재이다. 오히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숙주를 감염시킨 바이러스는 자연 숙주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안정된 감염 상태를 유지한다.” 숙주와 기생생물의 유기적 관계를 보자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진화하는 것이 기본상태, 자연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서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 적응 구조를 만들어내어 그렇다. “한정된 지역에서 오랜 기간 상호 관계를 맺어온 바이러스와 유기체 간에는 상호 적응에 의해 대량 살상을 유발하는 전염병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명과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는 앞서 비판한 환원주의적 질병관에서 탈피하여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기본적으로 생명의 질병과 비건강은 자연의 진화에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균형이 깨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다.2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다윈을 생각해보자. 그는 풍부하고 다양한 생명들을 마주했다. 수만 년에 걸쳐 상호 적응 구조를 만들어낸 생명들은 풍부하게 번영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종 멸종률이 위험 한계 수준을 넘어가고 있다. 지구한계과학자 요한 록스트륌에 따르면 현재 생물 다양성 손실 수준은 자연 배경 멸종률의 100~1000배로 생태계의 복원력에 심각성을 짐작하기조차 버거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생명 간의 상호 적응 구조와 유기적 관계가 비가역적으로 붕괴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 시국으로 세계가 몸살을 앓으면서 화제가 되고 있는 원헬스(One-Health) 개념을 적용해볼 수 있다. 원헬스는 사람과 동물, 생태계 건강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으로, 인류 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 동물, 생태계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 다학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현 시국을 ‘인간과 바이러스의 전쟁’으로 보는 시선에서는, 바이러스의 숙주인 ‘박쥐 몰살시키기’, ‘철새 내쫒기’, ‘중국인 입국 금지하기’, ‘우한 폐쇄하기’ 같은 기괴한 진단이 나오게 된다. 하나하나 차단하고 막아가다가 이제는 철새도 입국 금지시키려 하는가? 적대적인 타자관으로 이 일련의 사태들을 바라보는 것은 그런 면에서 다소 위험하다. 박쥐를 잡아먹은 중국인의 미개함을 이 코로나 사태의 원인으로 단정 짓고, 이 쉬운 생각으로 말미암아 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고 윤리적이지도 않다. 중국은 코로나의 원인이 아니라 발생지일 뿐이다. 신종바이러스의 원인을 매번 중국, 멕시코, 중동 등 발생지 탓으로만 돌린다면 피상적인 시야와 접근에 그칠 수밖에 없다. ‘상호연결성’과 ‘공진화적 건강’을 바탕으로 총체적인 사유의 필요성이 긴급하다.
생명과 바이러스에 대한 이상의 관점을 바탕삼아, 그렇다면 보편적 존재인 바이러스와 인간이 사스, 메르스, 그리고 이번 코로나까지, 왜 상호 유기적 관계가 아닌 치명적인 질병을 빚어낸 균열된 관계로 변한 것인지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을 비롯한 감염증(병)의 발생 원인에 초점을 두자. ‘바이러스’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환원론적, 존재론적, 그리고 적대적 타자론적 관점을 넘어서면 무수하게 많은 요인을 짚을 수 있다. 2019년 질병관리본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짚어낸 바 있다.
“최근 50년간 신종 감염병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병원체의 자연적 진화도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과 환경 간 상호작용의 변화때문이다. 즉, 인구증가, 도시화, 여행·교역의 증가, 빈부격차, 전쟁, 경제발달과 토지개발에 따른 생태환경의 파괴 등이 이러한 변화를 야기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인구 증가와 새로운 지리적 공간으로의 사회적 영역 확장, 해외여행 패턴 변화 등으로 인간은 병원체의 숙주인 동물종과 접촉할 기회가 증가하였고, 이렇게 사람으로 전이된 병원체는 인구밀도 및 인구이동 증가라는 사회적 변화와 결합하여 신종 감염병 확산 및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
질병관리본부(2019), 미래 감염병 해외 동향 분석 중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 자유무역, 무분별한 야생동물 남획과 서식지 파괴, 공장식 축산, 세계화, 인구증가, 도시화, 여행과 교역 증가는 모두 일일이 다루어야 할 만큼 중요한 각각의 요인들이고 신종‧변종 감염병과 각각의 상관관계를 짚는 연구도 수없이 존재한다. 필자는 이 요인들이 서로 밀도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짚어보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어그러짐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근본적인 차원의 근거를 찾아가면서, 자연과의 관계와 자연의 지평에서 존재하는 원인을 짚어낼 것이다.
질병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으로 정의해보자. 인간과 자연, 인간과 바이러스, 생명과 생명의 낯설고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만남은 필연적으로 소외, 모순, 파괴로 이어진다. 관계의 ‘균형’은 깨어져 ‘균열’로 바뀐다. 이는 생명간의 공진화적 적응속도를 상회하는 ‘가속’과 지구한계를 넘어서는 ‘확장’으로 빚어진다 말할 수 있다.
먼저 ‘가속’, 속도의 비유를 들자면 자연진화의 적응속도를 빠르게 상회하는 탄소자본주의 체제의 ‘가속화’가 균열의 원인이다. (이는 ‘적응 불가능성’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너무 빨랐다. 빠른 속도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체감하겠지만, 단순한 빠름을 넘어 감당할 수 있는 지점 혹은 임계점을 훌쩍 넘어버리는 가속주의는 관계의 균열을 가져온다. 대개 수십 수만 년에 걸쳐 대면하는 낯선 생명체들은 적응 기간을 거치기 마련인데 그 기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즉각적으로 대면했을 때 그 접촉면은 날카롭다. 이전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모순적이고 해괴한 대면은 죽음으로 그 교훈을 얻는다. 여러 예를 들 수 있다. 원주민들은 외부 접촉이 없는 한 감염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그 지역에서 선조의 선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땅에서 살아온 이들은 현대의학과 공중보건 시스템 없이도 대체로 잘 살아가곤 했다. 이들에게 치명적인 감염병이 창궐한 것은 스페인의 남미 정복과 같이 전혀 낯선 세계의 이방인이 찾아온 경우였다. 이 침입자들로 말미암아 남아메리카에서는 역병이 돌았고 인구의 대부분이 감염병으로 몰살당했다.
‘물맞댐’의 비유를 들 수도 있겠다. 다른 곳에서 데려온 물고기가 담긴 봉지를 어항에 바로 넣으면 물고기들이 바로 죽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어항 내 감염병이 돌 확률도 높아진다. 그 까닭은 낯선 환경에 새로 온 물고기들의 면역력이 낮아지고 기존의 물고기들에겐 외부에서 유입된 미생물이 질병원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고기를 키우는 이들은 물맞댐이라는 것을 한다. 이는 기존의 생물들과 새로이 찾아온 생물들이 서로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물의 온도차를 맞추는 것이자 물의 성질차를 좁히는 것이니 복합적 적응과정이라 부를 수 있겠다. 이는 어떤 만남인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서로 공생할 수 있는 만남인가. 필연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는 만남인가.
자연계에서 이 맞댐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갑작스럽고, 낯설다면 어떨까? 생명간의 만남이 빠르다는 것은 그 관계 자체가 모순적이며 파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베리아에 살던 호랑이를 아프리카에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즉, 자연적 질서라 불리는, 생명간의 공진화에 의한 적응 속도를 넘어서는 역학과 만남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들이 정상적인 수면시간을 초과해 야근하고 착취당하는 것과 공장식 축산의 미명하에 동물들이 절대 적응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사육(살육)당하는 것과도 분명 닮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은 지속가능성의 대치어이다. 자본이 자연과 인간을 동시에, 그리고 닮은꼴로 착취하고 소외시킨다는 마르크스의 분석은 이런 면에서 유효해진다.4
다음으로 ‘확장’, 넓이의 비유를 들자면, 인간계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이 낯선 만남과 맞댐욱 잦아졌다. 이는 성장주의의 필연적 결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베이컨 식 ‘자연의 정복’으로 드러나는 근대성은, 마르크스가 치밀하게 논증했던 자본의 동학과 맞물려 인간계의 외연을 빠르게 확장했다. 성장주의의 탈을 쓴 이 확장은 주류 경제학의 독점적 지위와 맞물린다. 인구의 증가, 산림의 벌목, 무분별한 난개발, 지하자원과 화석연료의 (미친 듯한) 채굴은 이 확장의 개별 사례이다. 생태철학자 신승철은 이러한 성장주의를 밑돌을 빼서 윗돌을 올리는 허상에 비유한다.
“그러한 성장이 가능한 이유는 외부 즉, 생명과 자연, 제 3세계, 민중 등의 현존에 있었다. 자본은 외부의 영역을 탐험, 모험, 약탈, 착취, 횡단, 포획 등을 통해 내부로 끌어들여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낙차효과를 강렬하게 만듦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중략) 성장이 외부를 개척하고 개발하고 약탈하는 작동방식을 통해서 점차 자본을 증대시켜 나갔던 방향성과 달리, 외부라고 여겨져 왔던 자연, 생명, 제 3세계가 대부분 내부로 통합되어 들어와 버리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이 때 자본의 입장은 이제 외부를 가상적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내부를 약탈하는 방향성으로 향한다. (중략) 성장주의는 스스로의 성장의 동력인 외부를 상실함으로써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 신승철, [역성장으로의 문명의 전환, 생태민주주의와 협동조합의 전략지도] ➀)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
이 확장과 성장은 지구 한계를 넘어선다. 지구한계과학자 요한 록스르륌은 아홉 개의 지구한계 중 네 개(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손실, 토지 이용 변화, 담수의 질소‧인 과부하)가 한계를 넘어 지구가 이미 위험지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상호작용하는 지구 한계의 특성상 이 위협은 덩달아 다른 지구한계의 선을 건드릴 테고, 이는 지구가 안정적 기후‧생태조건을 유지하게 하는 되먹임 작용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결국 가속화와 팽창화(확장성), 가속주의와 성장주의, 이 두 힘의 방향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근대 자본주의의 동학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균열을 야기했고, 폭넓은 마찰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겠다. 이 회복불가능한 균열은 현실적 차원에서는 높은 치사율의 질병으로 나타난다. 2020년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그중 하나의 이름이다. 관계의 조화, 서로간의 적응, 그리고 다면적인 건강을 생명들이 꾀하는 방식이 장기간에 걸친 공진화이고 이를 ‘건강’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건강의 균형에 균열이 생겨 질병이 발병한 것은 그 공진화의 속도와 작용을 존중하지 않고 거스르는 다른 ‘힘’ 혹은 그 균형을 깨뜨리는 다른 동학(動學)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힘을 자본주의 체제의 특수하고 비자연적인 동학이라 이를 수 있겠다. 감염병이 단순히 외생적이고 ‘자연적인’ 질병과 재난이 아니라 우리 체제와 우리가 살아온 경로에 내재해왔던(그리고 비판이 결여되어 굳건한 근대이성의 합리화로 무장했던) 내생적이고 ‘사회적인’ 질병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5
세세한 설명과 분석으로 들어가자. 먼저 최근 인류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끼쳤던 감염병은 동물원성 질병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전염병 중 약 75%가 동물과 인간이 모두 걸릴 수 있는 안수공통전염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940년부터 2004년 사이에 발생한 300건 이상의 전염병 유행 ‘사건’ 가운데 60%가 인수공통감염병이다. 그중에 약 12%가 신종 전염병인데, 또 그중에 75%가 인수공통감염병이다.(강병철) 동물원성 질병이 발발하는 이유도 여럿이지만, 기본적으로 동물과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방식이 빚어낸 질병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동일하다.
에볼라 사태에서 보듯이 동물원성 질병의 발발은 야생동물들의 서식지 파괴로 일어난다. 서식지 파괴는 무분별한 난개발과, 플랜테이션 농업과 그로 인한 벌목, 야생동물 사냥 밀렵으로 빚어진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1976년 수단과 자이르(콩고)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중앙아프리카 저지대 고릴라들의 급격한 개체 수 감소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최초 숙주(전염원)로는 박쥐가 주로 회자된다. 박쥐는 원래 숲과 동굴 속에서 과일과 곤충을 섭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박쥐의 서식지는 많은 부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이는 인간과 박쥐와의 낯선 맞댐을 더욱 잦게 하고, 따라서 신종 바이러스의 인간계 유입 가능성도 높아진다. 지구한계과학자 요한 록스트륌은 “그간 너무나 많은 열대지역의 열대우림, 온대지역과 냉대지역의 숲을 파괴한 결과 현재는 본래 지구를 뒤덮고 있는 숲의 약 60퍼센트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중략) 지구의 복원력을 지키려면 세계 숲 지대의 적어도 75퍼센트를 보존해야 한다.(102p)”고 말하며 어느 형태로든 티핑 포인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한다. 통상적으로 숲의 40%가 사라졌다면 탄소흡수량의 감소로 인한 기후변화를 걱정하게 되지만, 이는 다른 면에서는 (단순하게 치환하자면) 박쥐의 서식지가 40%가량 사라졌으며, 그에 따라 신종 바이러스와 만날 확률이 그만큼 올랐다 볼 수 있다.
기후변화는 그 자체로 야생동물과의 (왜곡된) 접촉가능성을 불확실하게 높인다. 기후변화도 신종 바이러스가 발생한 요인의 하나로 말해 둘 수 있지만 기후위기는 이 총체적 질병과 위기들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으로서 다루는 것이 맞다. “기온 상승과 강력해진 폭풍으로 인해 기존에 살던 지역이 화재, 홍수, 가문 등으로 파괴됨에 따라 사람들과 야생동물들의 거주 지역이 변화하면서 인간과 야생동물 간의 접촉이 늘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결과적으로 동물 질병이 인간에게까지 전염될 가능성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다.(김민정, 전염병 대유행과 기후변화 측면의 대비)6“
1990년대 말 니파 바이러스(Nipah virus) 감염증의 사례가 그 예이다. 니파 바이러스는 과일박쥐가 양돈 농가에 드나들며 발발했다. 산불과 엘리뇨로 인한 가뭄으로숲에서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된 박쥐가 서식지에서 쫓겨나 양돈 논가와 인접한 과수원으로 이동한 것이 전염경로로 말해지고 있다.
한편, 다른 시나리오도 있다. “유렵연합의 어업정책으로 수역에서 쫓겨난 아프리카의 소규모 어부들이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피치 못하게 야생동물 사냥에 나섰다. 야생동물의 사냥은 그 지역의 생물다양성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지역의 식량자원을 통해 충분한 생계를 꾸려갈 수 없다면, 야생동물을 사냥해다 고기를 사고파는 불법거래가 판을 친다. 자연히 멸종 위기에 처한 취약 종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으며, 동물원성 질병의 발발 위험이 커진다.(49p)” 이렇게 짚어보면서 기후변화, 산림 벌목, 난개발, 야생동물 사냥 등 여타의 원인들이 서로 뒤섞여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감염병의 발생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긴요하다.
공장식 축산도 빼놓을 수 없다. 공장식 축산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급격하게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앞서 짚었던 대로 자연의 상호 유기적 적응 구조와 속도를 상회하는 관계는 위험을 유발하고 질병으로 이어진다.
“인류에게 전염병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가 동물 집단을 인류 공동체 내로 끌어들였거나 바이러스와 각 자연 숙주의 생존 공간인 열대림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동물과 관련하여 또 다른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조장하고 있다. 그것은 공장식 축산이다.”
- 박종무, 살처분의 과학적 근거와 한계점 – 생명의 심층적 이해를 중심으로
공장식 축산은 가축 종을 생산량 증대를 위해 단일종으로 재편하며 전염병 확산 환경을 형성하고 단일종 밀집사육(공장식 축산)으로 새로운 인수공통감염병의 주기적인 발생이 쉬운 환경을 만들고 있다. 이는 역시 신종‧변종 바이러스의 발발 위험을 키운다.
“인간, 동물, 환경 등 생태계 모두의 건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전엔 야생동물들이라도 서로 종이 다르면 단기간에 감염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비좁은 사육장과 비위생적 도축, 그리고 무분별한 유통이 병행되면서 서로 다른 동물들에게서 나온 병균과 바이러스들이 서로에게 옮겨 가더니 훨씬 강력해졌다. 조류독감이 넓게 퍼지면 그해에 전 세계 사람들의 바이러스 감염률도 높아진다. WHO 추산에 따르면 매년 평균 10억 명이 독감에 걸리고 65만명이 사망한다. 그 수치는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 김동훈, 박쥐와 절벽서 공생한 구석기인이 갸웃할 ‘코로나 사태’
공장식 축산은 신종 바이러스를 발생시키는 것뿐 아니라 축사 안에서 질병들이 교차‧중첩되며 피해를 키우기도 한다. 코로나와 같은 야생동물 매개로 인한 바이러스 피해가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AI, 조류독감, 구제역, 돼지독감, 아프리카돼지열병 등 야생동물이 아닌 가축동물의 반경에서 발생하는 질병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단순한 접촉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면역상태와 적응속도에 따라 감염과 치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유무역은 가속과 확장을 근본적으로 초래하고 지향하는 기제라 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본 서식지 파괴와 공장식 축산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히 식량자유무역은 플랜테이션 농업과 같이 자유무역의 질서 아래 농축수산을 재편했다.
이러한 자유무역은 상당히 유토피아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상호 이득을 얻는다는 비교우위의 원리에 이론적 바탕을 두고 있지만, 실은 비행기와 배에 싣고 띄우고 이동하는 엄청난 비효율을 감당해내기 위해서 대규모의 기계제 단일경작으로 토지를 파괴하며 소수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 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착적인 자급자족의 생산은 파괴되고, 또 파괴되어야만 자유무역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다. 더군다나 생명에 대한 이전의 모든 경외와 가치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끝장나기 마련이다. 자유로운 무역을 위해 희생된 자유는 무엇일까.
더하여 자유무역은 바이러스도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만들었다. 자유무역의 질서 하에서 앞서 설명한 가속과 확장이 이루어져 온 것도 틀림없으나, 직접적인 문제는 세계화의 미명아래 무역량의 급증과 FTA 체결 확대가 현실에서 바이러스가 이동하는 ‘여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어디선가 비행기와 배를 무임승차한 외래종에 의해 자행되는 생태계 파괴처럼 인간계의 사회와 경제에는 바이러스가 유입된다.
흔히 ‘세계화’와 자유무역, 그리고 ‘자유로운’ 왕래는 진보의 척도로 여겨진다. 공중보건의 발달 속도보다 이 개방과 이동의 속도가 빨랐다. 확산은 순식간이다. 하지만 경제구조를 멈추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해롭다고 여겨지기에(실제로도 이미 비가역적으로 수출의존형으로 진입해버린 한국과 같은 경제구조에서는, 무역길이 가로막힐 경우 경제지표는 끝장이다) 바이러스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항로와 선로를 폐쇄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이것도 단기적 경제적 손실을 재다가 끝날 뿐이다. 공중보건 의학은 분명히 발전했지만, 그보다 신종 바이러스의 확산이 더욱 빠르다. 가속과 확장의 원리를 바탕으로, 바이러스를 자유롭게 왕래하게 하는 자유무역은, 당연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발생원인이자 확산원인이다.
서식지 파괴, 공장식 축산, 자유무역은 모두 같은 원리의 힘에 의해 움직여왔고 지금도 역시 진행 중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자유무역의 질서로 재편된 세계화와, 그로 인한 최대한의 무분별한 확장. 이 논리로 벌어지는 공장식 축산과 플랜테이션 농업은 ‘야생’으로 불려지던 자연 생태계를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침식하고 파괴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이 균열난 관계를 맺고, 결과적으로 신종 감염병의 발병률은 높아진다. 이러한 과정들과 원인들은 지금 기후위기라 일컬어지는 총체적 자연조건의 붕괴의 원인과 적확히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만 따로 떼어내서 지목하는 것은 이모저모 어불성설임에 틀림없다.
앞 장에서 필자는 서식지 파괴와 공장식 축산, 그리고 자유무역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 발생한 요인으로 지목했고, 원인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균열로 거명되는 자연적 적응 속도를 상회하는 가속과 지구한계를 넘어서는 확장을 말했다. 하지만 신종‧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났더라도 웬만해서는 이리 큰 ‘사태’가 될 것은 아니다. 사태를 촉발한 계기로서의 원인뿐 아니라, 사태의 크기를 키운 확장으로서의 원인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신종’ 바이러스가 출몰하게 된 그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 사회적 재난인 코로나 사태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차돌과 부싯돌을 가만히 둔다면 불꽃이 튈 일은 없다. 하지만 힘을 실어 흔들면 돌들이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고, 그 힘이 크고 빠를수록 불꽃은 자주 튈 테다. 그러나 제아무리 불꽃이 튀어도 옆에 지푸라기와 장작들이 없다면 크게 번질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감염병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균열로 말미암아 생명 간의 동적 평형이 깨어지며 발병했을 때, 그 이후의 사회적 원인들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작용한다. 화마가 탈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집어삼기며 점점 커지듯이, 사태는 어느새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까지 이어졌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적 원인으로 빈곤과 불평등, 밀집도, 이동률(이동거리),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제시하고, 이러한 요인들로 크기가 커진 감염병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을 ‘코로나 사태’라 명명한다.
먼저 감염병은 작은 공동체에서는 존속할 수 없다. “전염병들은 인구가 충분히 많고 밀집되어 있어야만 지속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감염시킬 새로운 개체들이 적당한 시기에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홍역이나 그 비슷한 질병들을 일컬어 ‘대중성 질병(crowd disease)’이라고 한다.(박종무, 살처분의 과학적 근거와 한계점 – 생명의 심층적 이해를 중심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법으로 회자되는 지금, ‘감염증’이 ‘감염병’으로 이어진 데는 도시형 밀집도를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감염병의 역사는 도시의 역사와 맥을 함께해왔다. 그렇기에 코로나 사태는 ‘도시’로 인해 심각해졌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대도시 집중화로 구조화된 곳에서는 피해가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투자자들도 분산투자를 하고, 자연의 진화법칙도 여러 돌연변이와 유전형태를 남겨 골고루 퍼진다. 밀집형 대도시는 인프라의 효율성과 권력의 집중화로 생겨났고, 농촌을 착취형 전진기지로 삼거나, 수입형 식량구조에 기반하여 생겨났다. 이러한 집중되고 밀집된 거주형태는 재난에 극히 취약하다.
전지구적 바이러스 네트워크(GVN)에서는 해마다 발견되는 3~4개의 바이러스는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전염되는데, 세계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초대형 밀집 도시들이 많아지면서 바이러스 전파 양상이 빨리 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적당한 거리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동학이 늘 그러했듯이, 이 거리는 절대 지켜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최소한의 공간과 시간과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과 생산량과 생산성을 만들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밀집형 도시와 바이러스의 전파가 어찌 무관할 수 있겠는가. 밀집도는 효율성과 집중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구로구 콜센터의 집단감염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회적 거리를 두려면 최소한 1~2m는 거리가 있어야 할 텐데, 비싼 서울 월세 내는 콜센터 회사가 직원들의 자리배치를 넉넉히 했을 리가 없다. 207명의 직원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밀폐된 공간에 밀집된 이들은 한 명이 발병하자 차례대로 집단감염되었다. 높은 접촉의 밀도와 강도가 감염병의 주된 확산요인임은 당연한 사실이다.7
이동률이 낮은, 이동거리가 짧은 사회에서 감염병이 이렇게 심각하게 빚어질 수 있을까? 감염병의 전파속도는 이동률과 이동거리에 비례한다. ‘이동률’이 높고 이동거리가 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단 한국의 이동률은 지극히 높다.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이동률(인구 100명 당 이동한 사람의 수)은 13.8%이며, 미국의 경우 9.4%, 일본의 경우 3.9%이다. 낮은 이동률은 대개 인구의 고령화와 경제성장 둔화, 즉 역동성의 가라앉음으로, 높은 이동률은 활기찬 경제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안정된 주거형태와 지역거주형태 없이 쫓기듯 이동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의 빈도가 늘어나는 것은, 한국의 실패한 부동산 정책과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서울은 수도권 지하철 네트워크가 잘 되어있는 도시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집 근처에 직장과 부대시설이 없이 멀리 출퇴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집중화를 낳고(이 집중화는 소규모 집중화와는 다르다) 밀집된 도시를 만든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통계적 이동률로 환원하는 것의 위험을 언급해둔다. 단순히 인구 이동률과 이사율이 높다는 것을 코로나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다만 이 이동거리와 이동률이 전염속도를 높이는 데 일조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비단 출근거리와 이사빈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 이동거리는 탄소배출량을 증가시키는 주요인이기도 하다. 서울의 출퇴근시간에 꽉 막힌 차들을 보라. 이는 미세먼지를 배출하는 주요인이자 탄소배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덧붙여 안정된 주거공간 없이 자주 이동하고 멀리 이동하는 것은 사회적 양극화의 다른 이름이다.
한편, 우리는 식량문제에 있어서도 높은 이동률과 먼 이동거리를 가진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019년 기준 48%, 곡물자급률은 23%로, 식량의 절반과 곡물의 7할을 수입해서 먹는다. 식량이 생산된 곳에서 소비된 곳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푸드마일리지로 살펴도 2010년 기준 7,086 t‧km로 프랑스 739t‧km의 열배에 달한다. 앞서 강조했듯이 확장되고 잦아진 식량자유무역은 이번 사태의 위험을 만든 주요인이었다. 더구나 이처럼 낮은 식량자급률은 코로나 사태와 같은 위기상황으로 인해 무역길이 막혔을 때 우리의 생존으로 직결되는 문제이고, 그렇기에 사태의 크기를 더욱 키운다고 강조해둘 수 있겠다. 우리가 식량자급률을 충분히 높인다면, 이와 같은 위험에 전보다 안정적으로 대비할 수 있을 테다. 당장 수입형 패스트푸드에서 자급자족의 슬로우푸드로, 수출주도형 경제에서 순환경제로의 전환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 「[코로나, 기후위기, 그린뉴딜] ① 코로나 사태, 사회정치경제 지평에서의 위기」에서 필자는 일개 감염병이 코로나 ‘사태’로 치닫게 되는 사회적 원인으로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짚어낸 바 있다. 한국사회에서 ‘코로나’가 이 정도로 대규모 사태로 커진 양상 가운데에는, 개인의 불안과 공포가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전염되는 구조가 있었다. 당장 마스크 사재기만 봐도 알 일이다. 그렇다면 왜 개인의 불안과 공포가 사회적 불안과 공포로 확장되는가. 개인의 불안이 확산되는 원인과 기제를 밝혀야 사회적 재난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간접적) 원인과 현실적(직접적) 원인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사회는 기본적으로 불안감이 과잉된 상태로 이어져 왔다. 역사적으로 IMF 이후 사람들의 불안과 민감도는 위험수준으로 올라와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구조조정, 고용 유연화, 사회적 안전망 붕괴와 함께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철학이 온 곳에 스며든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계층사다리가 걷어차인 지 오래다. 소득과 자산 분배가 점점 양극화로 치닫는 이 경로에서 개인의 불안과 공포의 심리상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시적 불안과 숨겨진 공포는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아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 드러난다. 학벌사회의 낙오자 트라우마도 개인으로 하여금 상시 불안에 노출되도록 한다. 경쟁원리가 자리 잡았다는 것 자체가 낙오의 불안을 동력원으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다. 앞서 꺼냈던 ‘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관점은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을까를 살펴야 한다. 필자는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의 위기가 위험수위에 근접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묻게 된다.
현실적 원인(직접적 원인)으로는 언론과 정치권을 지목하게 된다. 오죽하면 WHO의 개인 지침 중 하나가 ‘뉴스 안보기’겠는가. 집 밖 공원을 산책할 때면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걷고 있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미 오래전에 대부분의 전문가집단과 단위에서는 밀폐되고 밀착된 공간에서만 마스크 착용을 권고했다. 과학적 검증을 바탕으로 내려진 진단들이 덧없어지고 있음을 본다. 잘못된 대처와 정보가 불안과 공포의 심리와 맞물려버린 결과다. ‘그런 게 아닌 척 하면서 사실은 없어도 될 불안과 다른 대상에게 돌릴 분노를 전하는 기사’가 넘쳐나고, 언론은 늘상 그렇듯이 [속보]에 [단독] 경쟁을 하며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한다. 이용은 정치권의 몫이다. 여기도 늘상 그렇듯이 실효적인 대책은 미비하고 미약한데, 여론전에만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 보수 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정부‧여당 흠집 내기에 치중하고 혐오와 차별이 둘러진 자극적인 대안을 대안이랍시고 곳곳에 홍보한다. 정부 여당은 실질적인 책략보다 국민 마음 안정시켜 여론 돌리기에 힘쓴다. 이 위기를 자기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이들의 눈살 찌푸려지는 행태는 이 위기를 지나는 데 큰 방해요소다.
경쟁성 불안에 휩싸인 신자유주의 사회는 위기 앞에서 각자도생으로 찢겨나갈 뿐이다. 합리성은 설 자리가 없다. 개인이고, 공동체고, 정부고, 정당이고, 언론이고 서로의 신뢰가 어느 정도 두터웠다면, 그리고 두텁게 해 왔다면 여기까지 올 일은 아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협력과 연대보다 각자와 경쟁이 더 익숙하고 와 닿는 사회는 재난 앞에 설 자리가 없다.
빈곤과 불평등은 사회적 원인의 바탕을 이룬다. 사회적 양극화가 격심하여 사회에서 가용가능한 자원이 불균등하게 나누어져 있을 때, 재난은 차별적이고 무참한 피해를 낳는다. 당장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고 목숨을 잃었던 이들이 누구인지 물으면 답은 훤한 일이다. 부실했던 사회적 안전망이 감추어둔 위험이 곳곳에서 드러나며 소수자‧장애인‧빈곤층‧노인(이 정체성들은 교차되고 중첩된다)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칠곡 밀알 사랑의 집, 봉화 푸른요양원, 청도대남병원 등 곳곳에서 들려온 비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세계적인 불평등 추세와 함께 그리고 별도로 한국사회의 불평등 수위는 위험수준으로 흘러갔다. 서울에서 중간 규모의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7년을 단 한 푼 쓰지 않고 벌어야 한다. 열 명 중 네 명이 단 한 줌의 땅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맨 위의 한 명은 전체 땅의 6할을 독점하고, 이런 부동산 계급사회에서, 불로소득으로 인해 성실한 노동과 정당한 소득이 천대받는다. 친구들은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원룸’에서 빽빽한 지하철에 실려 다니며, 수천의 빚과 함께 대학을 졸업한다. 스카이캐슬의 담장은 드높기만 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바벨탑의 대리석 바닥은 피땀으로 얼룩져있다. 날 때부터 출발선이 다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평등‧공정‧정의는 껍데기만 존재할 뿐이다.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있는 자들의 휘황찬란한 수식어 뒤에,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에도 힘든 빈자들이 있다.
당장 이번 코로나 사태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연하게도 돈 없고 힘없는 이들, 고립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 생계유지를 위해 녹즙 배달부터 콜센터 노동을 투잡 쓰리잡 뛰는 사람들이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 간간히 벌어먹고 살던 터전이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직장이 문을 닫고 고용을 낮추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배달라이더로 부업을 뛰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배달노동자 고용률이 늘었다.) 이 침체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세입자와 소상공인 등 ‘버틸 수 없는’ 작은 가게와 기업, ‘자본과 공간 없이 빌려 쓰는’ 사람들부터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비교적 타격이 적은 대기업들은 재택근무로 노동구조를 돌리고 있지만, 감원, 감봉, 명예퇴직 등의 구조조정 소식이 번지고 있다. 비정규직부터 해고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한 빈곤과 불평등은 어떻게 코로나 사태를 극심화하는가. 가난하고 열악할수록 감염될 확률은 높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적합한 대처를 받지 못할 확률도 높을 수밖에 없다. 이 취약한 계급의 사람들은 더 취약한 사람들과 더 좁은 공간에서 더 자주 접촉할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전염시킬 확률도 높을 것이다. 당장 집 안에서 자가격리 할 수 있는 자들은 집 안에 먹을 게 있고 택배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사회적 거리 두는 것도 여력이 돼야 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확률들이 아니다.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격차와 모순이야말로, 이 사회가 한 마음 한 뜻 모아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데 커다란 방해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빈곤과 불평등은 재난의 피해를 키울뿐더러 재난에 대비할 수 없게 한다. 폭염에 야외노동자들과 주거빈민부터 쓰러져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 빈곤과 불평등이 이 코로나 사태의 바탕원인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리하여 기본적으로 ‘작은’ 사회와, 이동률이 ‘적은’ 사회, 그리고 ‘안정’되고 ‘평등’한 사회에서는 감염병이 이렇게까지 확산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밀집도’와 ‘이동률(거리)’, 사회적 ‘불안과 공포’, ‘빈곤과 불평등’이 재난의 크기를 키운다. 이 원인들이 교차하고 중첩되어가는 양상을 확인하게 되는 작금, 근본적인 대처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권고가 나오는 까닭도 이러한 맥락이다. 사회가 평등하고 안전망을 갖추고 있을 때라야, 감염병을 비롯한 재난을 큰 피해 없이 지나 보낼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와 사회가 재난에 취약하게 설계되었고 발전되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서 짚어낸 사회적 원인들은 오늘날 기후위기를 초래한 원인이자, 그리고 기후위기(재난)에 취약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일도 크게 키우는 사회구조, 재난에 안전하지 않은 사회구조, 침착하지 못하고 경쟁성 불안에 놓여 합당한 대처와 합리성이 작용하지 않는 사회심리, 이 모든 것이 기후위기를 만들었고 기후위기에 취약하다. 기후위기를 ‘만들면서’ 기후위기에 ‘약한’ 사회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서로 동떨어지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대안은 ‘저감’과 ‘적응’의 투트랙 플랜일 수밖에 없다. 자연적 조건의 안정화를 꾀해 위험확률을 줄이면서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웃사회, 안전사회로의 적응형 전환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코로나 사태는 내생적이고 기후위기와 같은 원인을 두고 있다. 앞서 지목한 구조적 요인들은 탄소배출을 증가시키는 요인들과도 정확히 중첩된다. 우리가 잘못된 경로를 걸어왔다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앞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원인과 감염병이 코로나 사태로까지 번지게 되는 원인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원인들이 지금도 계속 기후한계를 넘어서는 탄소자본주의의 동학으로 인한 것임 또한 살펴보았다. 단선적 원인이 아니라 총체적인 원인을 진단함에서, 코로나위기와 기후위기가 우리와는 무관한 외생적인 사태가 아니라 우리 체제가 내생적으로 만들어낸 사태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코로나 위기를 기후위기의 일부이자 포함되는 관계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따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지속가능하지 못한 방향으로 훼손되어 지구는 나날이 뜨거워지고 안정된 홀로세의 기후가 급변동성‧불규칙성의 인류세로 바뀌었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갖가지의 불확실성의 위험과 위협 중 하나로 이번 코로나 사태가 빚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필연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필연적 우연이라는 말은 어떨까. 코로나 사태는 필연적 우연이 만들어낸 치명적 결과다.
코로나 시국이 계속되면서, 몇몇 언론에서 코로나와 기후위기의 관계에 대해서 다룬 바 있다. 이는 신종 감염병이 발발하는 원인 중 하나로 기후변화를 짚는 식으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신종‧변종바이러스의 발생률이 증가하고, 감염병의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중대한 지점이지만 이로는 부족하다. 필자가 본 글에서 주장하고 싶은 바는 단순히 코로나와 기후위기가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넘어서, 바이러스가 사회적 사태로 커지면서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대응력과 지역사회 회복력, 공공성과 민주주의를 감소‧약화시킨다는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원인이 같다는 것으로 코로나와 기후위기의 관계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그 두 사태가 맺어갈 동학적 관계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양의 되먹임 관계라는 것은 다른 말로 악순환이라 일컬을 수 있겠다. 사태를 경감시키고 줄이는 방향으로의 반작용이 아닌, 더욱 가속화하고 증폭시키는 방향으로의 추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기후위기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을 비롯한 신종 감염병의 발생 가능성과 전염속도 등의 위험을 높이고, 코로나는 이번 사태에서 보듯 사회를 위태롭게 하여 재난에 대비할 여력을 빼앗고 다음 재난에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먼저 기후위기가 코로나를 비롯한 감염병에 가하는 영향을 보자. 기후변화는 그 자체가 총체적 사태인 만큼 다각적이고 다면적으로 신종‧변종 감염병에 영향을 미친다. 기후변화가 다양한 전염병들의 대유행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이러한 주장은 오래 전부터(약 20년) 제기되어 왔다. 실증적인 자료들을 보자면, 영국의 의학저널 란셋(The Lancet)은 2019년 연례 보고서 『치유와 기후변화(heal and climate change)』에서 오늘날 기온 상승, 해수 온도 상승, 강우 패턴 변화, 습도 상승 등의 기후변화로 인해 말라리아와 뎅기열 등의 질병을 전파하는 모기가 번식하기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분석하고 있으며8, 2018년의 보고서에서는 뎅기열, 비브리오, 말라리아 등의 바이러스 질환이 1950년대 대비 약 세 배, 2000년대 대비 약 두 배로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고 보고하였다.9 이렇게 바이러스 질환의 증가와 기후변화의 관련성이 과학적으로 뒷받침된다. 기후변화는 바이러스 질환을 증가시킨다. 2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후변화로 인한 야생동물의 서식지파괴와 사람들의 이주는 감염병의 계기들을 더욱 잦게 한다. 더 잦고 빈번한 접촉은 감염병으로 이어지는 역할을 한다. 전지구적 바이러스 네트워크(GVN)에서는 세계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초대형 밀집 도시들이 많아지면서 바이러스 전파 양상이 빨리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런 경향을 부추기는 배경에는 무역과 여행의 지구화 그리고 기후변화를 짚었으며, “지구화와 기후변화는 바이러스의 여권”이라는 표현을 쓰며 기후위기가 진행되는 한 앞으로 신종 바이러스가 계속 등장, 재등장을 반복할 것이라는 지적을 덧붙였다고 한다.10
기온상승으로 인한 바이러스의 변종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되고 있다. 미국의 G.M 스칼리온 교수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특유의 번식환경이 조성되면 보통의 바이러스와 다른 구조를 가진 변종들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다. 호흡기 바이러스의 변종도 그 심각성이 대두되지만, 모기의 서식지가 넓어지면서 모기바이러스의 변종의 위험성도 경고되고 있다(반기성, 케이웨더 센터장).11
기온상승이 면역 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기온 상승은 병원균의 고온 적응력을 높여 인간의 체온조절을 통한 면역 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김민정, 전염병 대유행과 기후변화 측면의 대비)” 기존의 저온에서만 생존할 수 있던 병원균들이 점차 따뜻한 환경에서 생존하도록 적응하고, 인체의 주요한 방어 기제는 점점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더하여 기후변화로 인해 빙하가 녹으며 인류가 알지 못하는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고 있다. “최근 발견된 증거에 따르면 티베트 지역에서 녹고 있는 빙하의 얼음 코어에는 약 만 오천 년 간 매몰되어 있던 33종의 바이러스들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중 28개의 바이러스는 현대 과학이 발견하지 못했던 신종 바이러스였다(김민정, 전염병 대유행과 기후변화 측면의 대비).”
정리하자면, 기후변화는 감염병을 더 자주 발생시키고, 더 빠르게 전파시키며, 더 강력해지게 만든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신종바이러스의 발병률, 그리고 전염률, 전파율, 사회적 재난율이 급속도록 높아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2020년도에 벌써 세 달을 코로나로 이런 극도의 긴장국면을 보냈다면, 10년 뒤에는 한 해 중 절반을 이러고 있을 것이라는 무서운 예측이 가능하다. 다른 위험수위가 모두 높아진 상태로 사실상의 자가격리가 된 채 말이다.
당장 이번의 코로나 사태에도 기후가 끼쳤을 영향은 적잖다. 올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다. 서울의 1월 기온은 기상 관측 시작한 이래 112년 만에 가장 따뜻한 1월이었고, 미국우주항공국(NASA)와 미국해양대기청(NOAA)는 2019년이 지구 기온을 관측한 이래 두 번째로 온도가 높은 해이며 12월이 가장 기온이 높은 달이었다고 발표했다. “기상학자나 생명공학자들은 올 겨울의 이상기후가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종을 창궐했다고 본다. 겨울철 평균 기온의 상승은 전염병 발생 위험을 높이고, 중국 우한에서 변종 바이러스가 창궐한 것은 동아시아의 따뜻한 겨울 날씨가 주요인일 것이다(반기성, 케이웨더 센터장).”
이번에는 코로나가 기후위기에 가하는 영향을 보자. 코로나 사태가 어언 세 달째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탄소배출량은 미약하나마 줄었지만, 이를 기후위기를 막아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의 네트워크 회복력은 약해지고 있다. 각자의 집에 있으면서 이 사태를 해결할 공동체적, 정치적 역량이 사라지고 있다. 어느 때보다 연대가 시급한 시기이지만, 마스크 사재기에서 보이듯 위기에 따라 분열되고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는 강화되며, 계층불평등은 심해지고, 계급갈등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당장 기후위기 비상행동에서 주관하는 3.14 비상집회도 코로나 여파로 취소되었고, 늦은 만큼 빠르게 바꿔보자는 움직임들도 사그라들었다. 지금까지 필자가 느끼는 실상은 그렇다.
사회적 대응력, 지역사회 회복력, 제도와 상호간의 신뢰, 공공성, 민주주의. 사회에게 필요한 재난 대비 능력을 꼽자면 이렇다. 코로나 시국이 장기화되면서 우리 사회가 지켜내야 할 이러한 여타의 가치들은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우리 앞에 더 잦은 기후재난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의 이름이 코로나든 홍수든 가뭄이든 태풍이든 쓰나미든 폭염이든 폭설이든 연결된 세상이기에 연결된 재난을 연이어 겪으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 우리는 재난이 가끔 예측 불가능하게 외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생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인식하고 상시적 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당장 이런 감염병들도 거진 매년 있지 않았는가.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럼에 이전까지의 위험과는 질적으로 다른 위험 속에서 재난의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중국에서는 탄소배출이 절반이나 떨어졌다고, 그렇다면 오히려 코로나 사태가 기후위기를 막아내는 것 아니냐고. 이에 대해서는 이리 답하겠다. 철저한 미래의 일이라 섣부르게 예견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필자가 말해두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말해둔 것은 손 놓고 바라보았을 때라는 것이다.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처럼, 이 양의 피드백 루프를 음의 피드백 루프로, 즉 위기를 기회로, 티핑 포인트를 터닝 포인트의 순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이 글을 쓰는 내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그대에게 있다.
절망과 희망 사이 고민이 많다. 아무래도 역시나 양의 되먹임 관계가 분명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다. 이 부분은 미지수다. 코로나와 같은 재난이 우리를 무너뜨릴 것인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낼 것인가. 코로나 사태를 몇 주간 계속 모니터링하면서 실망스럽고 절망스러운 장면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도 이 순간에 사명감을 가지고 대구로 달려가는 의료진들과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여타의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절망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기제이자 동시에 위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희망의 지평인 것 같다.
제대로 된 원인진단에서 제대로 된 대안이 제시될 수 있다. 감염병의 원인을 환원주의적 질병관에 따라 ‘코로나19바이러스’의 존재로 진단한 결과 마스크 보급에만 온통 관심이 쏠렸다. ‘우한 후베이성’을 원인으로 지목하여 ‘중국인 입국 금지’ 같은 것을 대처랍시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 우리 앞에 근시안적이고 사후적인 대처뿐이라면 다가오는 기후위기 시대 밀려오는 위험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때마다 마스크를 무상으로 나눠주고, 감염병의 발원지를 차단하고 차별과 혐오로 몰아붙여 고립될 것인가. 아니, 그런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능한 구시대의 유물들은 이제는 권력과 발언권과 자리를 넘겨야 한다. 대안을 제시할 수 없고 여론체크와 물타기에만 급급한 이들은 이제 자가격리 되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세세한 사안과 사항에 대해서는 더욱 열띤 논의와 토론이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제시할 수 있는 것도 방향뿐이다. 우리에게 전환이 시급하다는 것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으며 그 방향에 대해서도 합의가 모아져야 한다. 앞으로 위기시대가 닥칠 것이라는 건 분명한 일이다. 자연적 원인에는 저감의 방책이 필요하고 사회적 원인에는 적응의 방책이 필요하다. 지구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자연적‧사회적 재난과 질병을 막는 적응형 사회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저감과 적응’의 전환책으로 그린뉴딜을 제시하려 한다. 그린뉴딜은 큰 그릇이고, 지금 당장 직면한 우리의 위험과 앞으로 닥쳐올 위험에 대해서 동시에 해결책을 담아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자동차 팔아먹을 궁리나 하고 있고, 경제성장률이나 궁리하고 있는 것은 한참 몰지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다음 글에서 이상의 진단을 바탕으로 코로나와 기후위기의 대안으로서 그린뉴딜을 말한다.
도서
요한 록스트륌‧마티아스 클룸, 김홍옥 역『지구한계의 경계에서』, 에코리브르, 2017.
신승철, 『탄소자본주의』, 한살림, 2018.
칼 폴라니(1944), 홍기빈 역(2009),『거대한 전환』, 도서출판 길.
울리히 벡(1986), 홍성태 역(2006),『위험사회』, 새물결.
약학정보원 학술정보센터, [팜리뷰] 코로나바이러스의 이해, 2020.
기사‧칼럼
SBS 취재파일, 한세현 기자, 충격과 공포를 넘어…’코로나 바이러스’를 생각한다
, 2020.2.16
박종무, “살처분의 과학적 근거와 한계점 – 생명의 심층적 이해를 중심으로”, 생태적지혜연구소 미디어
신승철, “[역성장으로의 문명의 전환, 생태민주주의와 협동조합의 전략지도] 1) 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 생태적지혜연구소 미디어
그린피스, “과학자들의 경고, 기후변화가 전염병 확산을 부른다”
, 2020.2.25.
김민정,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국가관리 BRIEF 제 51호] “전염병 대유행과 기후변화 측면의 대비”
, 2020.3.2.
일요신문,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신종 코로나는 악몽의 시작일 뿐” 기후 변화 ‘좀비 바이러스’까지 깨운다
, 2020.1.31.
서울경제TV, 정훈규 기자, 반기성 케이웨더 센터장 인터뷰, [반기성의 날씨와 경제] 코로나 바이러스와 경제
, 2020.3.2.
경향신문 칼럼, 조효제,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지구화와 기후변화는 바이러스의 여권”
. 2020.2.25
JTBC, 박상욱 기자, [취재설명서], ‘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⑮ 신종 감염병의 등장과 기후변화
, 2020.3.2.
경향신문 칼럼, 김동훈,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26)박쥐와 절벽서 공생한 구석기인이 갸웃할 ‘코로나 사태’
, 2020.2.18
경향신문 인터뷰, 반기웅 기자, 강병철 의사, “더 강한 전염병 몰려올 것, 이대로는 또 당한다”
, 2020.3.7.
1)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가 왜 신종 혹은 변종으로 나타났는지 묻는 것은 주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균열로 다루어본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신종 혹은 변종으로 나타난 것을 질병의 존재론적 근인으로 두어서는 안 되지만, ‘안정적인’ 혹은 ‘경미한’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새롭고’ ‘더 강하게’ 혹은 ‘더 예측불가능하게’ 발생하는 것의 원인은 분명하게 분석하고 넘어가야 한다. ‘새롭게’ 나타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원인과, 신종이라 불리지만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닌 새로 발견되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
2) 이는 동양의 질병관이었다. 그리고 현대생물학과 보건의학의 관점이 점점 이러한 ‘관계(관계론)’와 ‘균형(조화‧공생론)’의 사고방식의 지평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린다. 원헬스 개념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서구적’이라 일컬어지는 질병관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 보충과 확장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필자는 정과 반이라는 대립적 관계보다 망원렌즈와 광각렌즈로 보완적 관계로 이 질병관을 이해하려 한다. ↩
3) 이에 대해서는 부연이 필요하다. ‘자연적 원인’의 구분은 사회적 원인과의 대비를 위함이지 자연적이지 않다. 이를 자연적인 발생이라 부른다면 그 또한 환원론적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래에서 말할 서식지 파괴, 생태계 파괴, 자유무역은 절대 자연적이지 않다. 다만 ‘자연계’에서 벌어진 일이자 자연과의 마찰로 빚어진 원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의 지평에서의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누차 강조하지만 자연적 원인과 사회적 원인은 뒤섞이고 혼재되어 그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울리히 벡의 다음의 말을 인용할 수 있겠다. “자연의 파괴는 자연의 ‘단순한’ 파괴를 넘어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동학의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의 사회화의 보이지 않는 부수효과는 자연의 파괴와 자연에 대한 위협의 사회화이며, 이 같은 파괴와 갈등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모순과 갈등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생활의 자연적 조건에 대한 침해가 지구적 차원에서 인간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경제적, 의학적 위협이 된다(울리히 벡, 위험사회, 144p).” ↩
3)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 생태학의 통찰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무척 유효하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마르크스의 단어이자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이 장은 마르크스 생태학의 문제틀을 빌려 풀어가보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생태학에서는 이 ‘관계’를 생리학적 물질대사와 노동을 통한 생산의 과정으로 말한다. ↩
4) 한편, 감염병은 이전부터 있어왔고, 이전의 피해는 훨씬 컸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면서 감염병이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염병을 자연적인 것으로 두는 것은 손 놓고 바라보겠다는 심보이다. 감염병은 산업혁명 이후 인간 문명의 외연이 확장되며 곳곳에서 그 존재를 알린다. 실증적 데이터로 감염병의 발생빈도는 근대 산업혁명 이후 빠르게 증가한다. ↩
5) 김민정,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국가관리 BRIEF 제 51호] “전염병 대유행과 기후변화 측면의 대비”, 2020.3.2. ↩
6) 자연적 원인과 사회적 원인들은 많은 부분 교차하고 비슷하다. 이를테면 빽빽이 들어앉은 콜센터의 집단감염은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지는 케이지에 빽빽이 들어앉은 닭장 속의 닭들과 닮았다. 조류인플루엔자가 돌면 순식간에 몰살되는 이들, 감염병이 발생되면 순식간에 감염되고, 일자리를 잃는 이들. ↩
7) 그린피스, “과학자들의 경고, 기후변화가 전염병 확산을 부른다”, 2020.2.25. 재인용 ↩
8) 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이상윤 연구원, 기후위기비상행동 주최 기후활동가 워크숍 발표자료 “기후변화와 건강” 중, 2020.1.21 ↩
9) 한겨레 칼럼, 조효제,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지구화와 기후변화는 바이러스의 여권”. 2020.2.25 ↩
10) 서울경제TV, 정훈규 기자, 반기성 케이웨더 센터장 인터뷰, [반기성의 날씨와 경제] 코로나 바이러스와 경제, 2020.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