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전화 한 통
거진 4년이 되어가는 옛적의 전화 한 통을 떠올리며 글 문을 열어본다. 문득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럼 그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 하나로 거슬러 가게 된다. 고삼, 입시를 치르며 이리저리 치이며 방황할 때였다. 나는 철학자 김상봉의『학벌사회』를 마음으로 읽었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 부조리한 사회와 제도 속에서 나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고, 어찌 살아야 자유로울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런 내게 물음이 돌아왔다. “혼자 잘 살면 무엇합니까? 헌신하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앞으로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면,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십시오. 세상이 마음에 안 들고, 마음으론 당신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일도 못 하고 비판하기만 하면 절대 안 됩니다.” 몇 시간 동안 들려주신 따끔한 일침과 다정한 조언에 참 부끄러웠고, 더없이 감사했다. 지금도 계속 그 말씀을 따라 세상에 그리고 앞서 살아간 당신들에게 진 빚을 갚아가는 마음으로 산다. 어느새 선생님의 제자로 있다.
1. 기후활동가
수능을 거부했지만 어쩌다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다. 면접에서 대학에 다 떨어지면 무어 할 거냐고 묻길래, 큰 배낭 둘러메고 세계 방방곳곳을 돌아다닐 거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이루지 못할 꿈인 줄 알았는데 곧 기후위기와 생태학살에 대한 연구 활동을 위해 인도와 인도네시아, 베트남으로 떠나게 될 듯하다.
기후위기의 진실을 안지 꼭 일 년, 지금은 녹색당, 생태적지혜연구소, 청년기후긴급행동, 아야프(AYARF)에서 날 가는 줄 모르게 바삐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다. 내가 알고 살아온 세계가 잘 쳐봐야 7년이 고비라는 사실은, 안 그래도 마뜩잖던 졸업, 군대, 취업, 결혼의 정상 루틴을 미련 없이 벗어던지게 해주었다. 절실하게 해야 하는 일들에 정직하고 임하면 더할 나위 없다고 여긴다. 그보다 나를 기후활동가로 움직인 건 공부하고 활동하며 들은 이야기들과 장면들이다. 동남아 개발 협력 분야에서 활동하는 우는, 네팔에서 겪고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기치 못한 슈퍼태풍이 이례적으로 들이닥치자 그 바람에 마을 뒷산에 큰 산사태가 났단다. 손쓸 새 없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데 이게 기후위기구나 싶었다고. 실제로 기후위기는 저위도 지역에 더 큰 피해를 가져오고, 사회적 안전망과 구호 여력이 적을수록 피해는 가중된다.
어릴 적에 인도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기후위기와 인류세를 주제로 한 사진전에 갔다가 내가 살았던 곳 근래의 소식을 접했다. 인도의 뱅골 고라마라 섬의 이야기로 이 섬은 해수면 상승과 삼각주 지역의 침식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잠겨가는 땅 위에 서 있는 이들의 표정은 참 아팠다. 한 다리 건너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남 이야기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한국도 이번 여름 유례없는 장마와 홍수를 겪으며 비극의 전조를 느꼈지 않은가. 특히 코로나가 기후위기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환란으로 인해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너지기 직전까지 왔다. 그런데 내가 배운다고 앉아있었던 그 어느 학교에서도 이 진실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혁신학교, 대안학교, 그리고 진보를 지향한다는 대학까지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얼마 전 환경부에서 주재하는 2050 LEDS 국민토론회 중간에 나를 비롯한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은 손수 만든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진입을 시도했다. 2050 탄소중립 ‘목표’는 정부 주무 부처 사이에서 금기어로 쉬쉬댄다는 말을 들었고, 국민 300명을 모니터 앞에 앉혀놓고 전문가들의 ‘인강’을 줄줄이 보여주었을 뿐인 허울뿐인 토론회가 ‘합의’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들어가려고 했고 그들은 우리를 막았다. 순식간에 숨 막히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안에 있던 환경부와 관계자들이 모두 나와서 밀어내면서 토론장 문을 막았다. 우리는 들어가려고 문을 잡았고 비집었고 온갖 아우성이 그 공간을 메웠다.
“막어 막어 막어” 하고 소리 지르는 이, “다쳐! 들어오면 다친다고” 하면서 힘으로 밀어붙이던 이, “전문가 발표들이 제대로 나가야 하잖아요” 하면서 문을 닫는 이가 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 주저앉아 문과 몸을 옴짝달싹 엮어 맨 안, “지금 당장 탄소 배출 제로해도 2도 넘길 판에 뭐 하자는 겁니까” 하고 말하던 다, “왜 막냐고요. 국민 토론회라면서. 저희 국민 참여자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온 거예요.”하며 외치던 빈이 있었다.
상황은 환경부 기후변화정책관이 와서 5분간 질문 발언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며 무마되었다. 그러나 국장이 남긴 말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국민’들이 토론하고 있고, 오래도록 준비한 ‘전문가’들이 말씀하고 있는데 (불법적으로) ‘난입’해서 이 숙의의 토론을 ‘무단으로’ ‘방해하면’ 되겠냐. 국민들 300명이 (너희들 때문에) 기다렸으니. 다음부터는 (공정하게) 소란을 피우는 방식이 아니라 의견을 개진하는 방식으로 해달라.”
우리는 2050 LEDS 탄소중립 선언과 2030 NDC상향과이행방안 법제화를 요구했으나, 돌아온 답은 뱅뱅 돌다가 끝났다. “기후위기 대응의 심각성과 절박함을 인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30년 후의 일을 지금 판단할 순 없어 2050년 탄소중립 사회를 ‘지향’을 목표할 것이고, NDC 상향은 법제화로 책임이 따르고 아직 한 번도 온실가스 감축 경험이 없기에 어렵고 내후년에 생각해보겠다. 이해해주시라.”
저번 LEDS 전문가 토론회의 마지막 자리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초대받지도, 말할 기회도 없는 우리의 목소리를 그곳에 가져다 놓기 위해서는 단상 위에 올라 마이크를 뺐어야 했다. 올라온 경위와 우리의 입장과 요구를 알리고 구호를 외친 후 토론회가 끝날 때까지 전문가들 탁상 아래 자리를 지켰다. 그때 좌장이었던 서울대 법대 조홍식 교수가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 또한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사전에 약속된 토론 중간에 끼어드는 게 정의인지 생각해보라고. 정의로움을 외치려면 과정도 정의로워야 하지 않겠냐고.” 테이블 아래 쭈그리고 앉아서 그 말을 들으니 그 위치의 차이가 확 느껴졌다. 아, 저 사람에게는 합의된 제도와 형식적인 절차들이 지켜지는 게 정의구나. 그 합리적인 제도와 절차 끝에 온 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그 존재 기반을 스스로 붕괴시키고 있는 이 사회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정의로웠는데 왜 여기까지 왔을까. 무엇이 정의인가.
한동안 저 말들이 오래 맺혀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애초에 주어지지 않기도, 토론장에는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데 절차와 제도는 공정하기만 하다. 잘만 돌아간다고 퍼트린 공정과 합리성의 믿음 끝에 온 세상이 지금 여기이지 않은가.
저 국장의 공정과 교수의 정의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저 말들은 학창 시절부터 줄곧 들어왔던 말들이었다. 일제고사, 수능 시험의 불합리함, 교육 커리큘럼 안의 편향 등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 가장 많이 돌아왔던, “그 마음 공감하고, 그 생각도 이해하는데, 어쩔 수 없으니 양해를 부탁한다”는 다정한 말들, 제도 내의 규칙과 절차 혹은 전통과 관행에 대한 친절한 변호들, 결국 변화 한 점 없이 다독여질 뿐인 그 말들에 나는 어찌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불합리하고 부정의하다고 여겨지는 지점들을 지적하고 변화를 요구할 때 묵살당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왔다.
이제 와 나는 제도 안에서 풀 수 없는 이야기들을 수면 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잘 포장된 부조리함과 부정의를 뒤집기 위해서는, 혹은 극명한 온도차와 입장차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균열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와서도 어쩔 수 없다며 변명할 수는 없기에.
2. 기후위기와 학벌사회
근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풀리지 않는 통계 하나로 교육에 대해 물꼬를 터보려 한다.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한 기후변화 인식도 조사다. ‘기후변화를 막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문항에 이 나라의 사람들은 66%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는 세계 2위로 평균치를 가뿐히 웃도는 수치다. 더군다나 상반되게도 한국의 기후변화 인식 수준은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지구 온난화로 이어지는 기후 변화가 있다’, ‘지구 온난화는 인간 활동의 결과다’, ‘지구 온난화는 인류에게 심각한 위협이다’에 거진 95%가 ‘그렇다’고 답했다.
정리하면,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기후변화 인식 수준이 높고 그 심각함도 잘 알고 있지만, 기후변화를 막기에는 너무 시간이 늦었다고 심히 비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어찌 봐야 할까. 왜 이 사단이 났을까 고심하다 보면 생각은 교육에 미친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길러졌길래 기후변화도 다 알고 심각한 것도 아는데, 거리로 나서는 이는 몇 없고 다가올 세상이 암울하다며 짙은 비색만 보이나. 설명할 길이 없어 앓던 내게 와닿은 단어 하나는 ‘학습된 무기력’이다.
기후활동을 하면서 가장 서글펐던 것은 모른 척 휙 지나가는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지하철 역사 안에서 기후위기 팸플릿을 나누어드리는 캠페인을 했었다. 두어 시간 그래 건네다 보면 그 차가움에 마음이 데였다. 바쁨이 미덕이 되었는지 빠른 걸음으로 휙휙 걸어가는 사람들은 광고전단지와 내가 건네는 팸플릿을 다르게 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뭐라도 나눠주시는 분이 있으면 광고전단지여도 공손하게 받는다, 그래 주시라)
비관과 무기력과 무관심, 이 경향과 정동들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한다. 우리 안의 가장 밑까지 내려가면 나와 너, 혹은 타자와의 관계를 적대적 혹은 단절적으로 전제하는 기제가 자리 잡은 듯하다. 나와 세계의 상호연결을 분리할 뿐 아니라 옆과 곁에 있는 사람과 생명들과의 연결을 끊어낸 것,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로써 다시 ‘학벌사회’를 꺼낸다. 한국식 자본주의하에서, 초중고 공교육·대안학교 할 거 없이 ‘제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맞추어진 입시·경쟁 교육이 자리 잡고, 대학에서는 수직적인 서열구조가 자리 잡아 다른 불평등의 근인이 되는 특수한 사회구조이자 교육체제, 학벌사회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내가 자라오며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을 떠올릴 때 어쩌다 세상이 여기까지 왔는지, 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며, 섣부르게 비관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지 알 것만 같다.
나는 학벌체제에 종속되지 않은 교육을 찾아 헤맸지만 한국 사회 안에서 그 곳이 어디든 그 영향은 지대했던 것 같다. 몇 가지 아로새겨져 있는 한들을 조심스레 꺼내 본다. 먼저 옆을 넘어서야만 했었다. 우정이 너와 나의 오롯한 만남에 따른 것이 아니었고, 동반 성장의 이해관계가 관계망 안으로 스멀스멀 침식해 들어왔다. 내신과 모의고사 숫자 몇 개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던 기억은 지금도 가장 생각하기 싫은 부분이다. 그리고 시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다. 목표와 계획이 자연스레 따라붙었고, 무언가의 과정과 ‘지금 여기’는 흐려져 갔다. 이상한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반복하면서 타인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다. 경쟁 혹은 진로에서 낙오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컸고 여태껏 남아있다. 그간 이런 경쟁원리와 타자화, 두려움과 싸워야 했었다. 학교를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종종 사람들을 만나 말하다 보면 내 안에 있던 상처도 전부 아문 것은 아니며, 동지들도 그 기억과 감정이 오래간다고 고백을 하곤 한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스마트폰을 쳐다보면서 옆을 둘러보지 않은 채 발 한 쩨기 앞만 밟아보며 걷는 사람들을 본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는가? 혹은 옆을 바라보는가? 앞과 정상과 승리를 제일의 가치로 삼고 구조적으로 회초리를 든 교육은 돌아보고 살피는 이들을 낙오 시켜 왔다. 그 속에서 길러진 우리들은 무언가로부터 끊어진 채 앞만 보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환대와 정이 축출되고 우정이 인맥 혹은 대인관계로 대체되었지 싶다. 나와 너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전제한 채 작동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상을 믿지도, 옆과 곁을 믿지도 않는다. 이런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 배짱이 있는가? 기후위기를 만든 인간상은 무엇이고, 누가 그런 사람들을 길러냈을까.
이번 여름 기후위기로 기록적인 폭우가 내릴 때 몸이 반쯤 잠긴 채 포장된 배달음식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배달노동자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배달 앱을 켜 치킨을 주문하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나의 배고픔만 중해서 누른 버튼들이 초래한 장면이다. 버튼은 배달노동자를 안 보이게 하고, 치킨은 태어난 지 몇 개월 만에 학살되는 닭의 사체를 보이지 않게 한다. 개인의 머릿속에 위장과 잔고만 남아버렸을 때, 나와 타자와의 연결은 끊어지고 만다.
이것은 기후위기를 만들어 낸 사회 경제의 원리와 닮다 못해 똑같다. 그런 사회가 잘만 굴러갔으면 굳이 사족을 덧붙일 필요 없이 경쟁이 최고고 돈이 낫다 하면서 살았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당신이 알고 살고 사랑한 세계가 총체적 붕괴 직전에 직면한 지금에 와서, 이전처럼 살 수 있다고 말하려는가.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는 ‘기후위기’가 낱말로만 남을 뿐 와닿지는 않는 듯 보인다. 자기가 가장 중하고, 뒤를 돌아볼 여유 없이 바쁠 때, 지구 반대편에서 수장되는 사람들이나, ‘살아왔던’ 생명들, 당장 같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약자와 소수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현재’밖에 없던 사회에 미래뿐 아니라 과거를 사유하라고 말한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인식하는 시공간 범위의 확장을 요구한다. 기후위기는 개인의 안위를 넘어가야만 하는 사태다. 과몰입된 나로부터 눈을 떼고 옆의 사람들 또 그 옆에 타국의 사람들, 그리고 이 세계로 시야를 확장해야만 하는 사태다. 기후위기에 요구되는 태도는 그 원리상으로 그간의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학벌사회’의 원리와 상반된다고도 이를 수 있을 것이다.
3. 그린뉴딜과 그린스마트스쿨
교육의 실패는 여러 곳에서 드러났으나, 그 여실한 민낯은 이번에 정부의 그린뉴딜 속 그린스마트스쿨 안에서 극명하게 보여졌다. 기후위기의 심각함을 전면에 걸고, 시민사회 곳곳에서 내건 그린뉴딜이라는 희망의 언어를 가져다가 선보인 전환책이다. 하지만 위험하기 그지없다.
수식어는 화려했다. “안전·쾌적한 녹색환경과 온·오프 융합 학습공간 구현을 위해 전국 초중고 에너지 절감 시설 설치 및 디지털 교육환경 조성”이 개요다. 와이파이 구축, 스마트기기 지원, 온라인 교육 플랫폼 구축이 골자로 ‘그린’은 태양광 발전시설과 단열재를 시공하는 그린 리모델링이 전부다. 여기에 25년까지 15조를 쓴다.
그린 스마트 교육, 어디든 상관없이 그린과 스마트 붙이는 이 짓을 나는 남발이라 부른다. 무엇이 그린일까. 그리고 이 정책이 어떻게 전환을 이룰 수 있을까. 와이파이 구축과 스마트기기 지원이 어째서 교육 전환인가. 그런 의미에서 그린스마트교육의 목적과 방향은 없다. 철학의 부재를 그 스스로 증명하며, 교육에 대한 한 점 성찰 없이 뭐든 갖다 붙이면 되리라 생각하는 뉴딜, 이는 우리 사회가 그간 교육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왔는지를 내보인다.
비대면 교육, 온라인을 통한 스크린 교육은 기후위기 대응과 녹색 전환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 변화의 방향은 위험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강병철 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움은 함께 상황을 공유하고 이해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스크린은 이러한 배움의 상황과 맥락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라인 교육은)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전수하는 데 특히 효율적인 방식이라 이에 적합한 교육방식은 단연 입시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정부의 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은 우리 사회와 지구를 병들게 한 기제의 가장 바탕을 이루고 있는 학벌사회와 입시제도에 대한 일말의 언급도 없다는 점이다. 강병철 교사가 묻듯이, “여전히 대학입시 제도가 우리 사회의 모든 교육과정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아무런 성찰과 변화 노력 없이 교육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면, 온라인교육이 현재의 교육시스템을 대체해나간다고 해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실은 그린뉴딜은 원래 이런 것이 아니었다. 교육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거리로 나선 세계 각지의 청소년들이 “기후변화가 아닌 체제 변화를!”, “우리에게 그린뉴딜을!”하고 외쳐온 생동감으로 가득 찬 전환의 아우성이었다. 왜 한창 학교에 있을 이들이 거리로 나섰고, 전면적인 전환을 요구했을까. 정부와 교육계에 있는 이들은 그 심정과 맥락을 이해하는가?
4. 전환의 축, 생태교육
기후위기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교육은 무엇인가, 우린 어떤 사람들을 길러내야 하는가, 위기를 자각한 첫 세대이자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학교에 있다. 연결되어 있는 감각의 회복이 가장 중하다는 데 생각이 머문다. 기술과 실력은 나중에 익히고 쌓아도 되지만, 한 사람의 세계관에는 가장 순수한 시절의 호흡과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 우리는 맨발로 땅을 밟아본 경험이 거의 없다. 어느 아이에게 장수풍뎅이가 어디 사냐고 물었더니 백화점이라 답했단다. 마스크를 항상 쓰고, 생수병의 물을 사 마시며 큰 아이가 공기와 물이 자연에서 온다고 생각할까? 자연으로부터 빚진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하는데, 세계가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정직하게 기후위기 교육을 해야 한다. 현재까지의 인류가 세계에 한하여 알고 있는 지식들, 과학자들의 연구를 그대로 알려야 하고 배우는 이들에게 그 판단을 맡겨두어야 한다. 나도 그렇지만, 젊은 이들일수록 세상은 낯설기에 더욱 아플 것이다. 세상이 자기 나이만큼 시간이 지나면 되돌이킬 수 없을 지점을 지난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한 일곱 살 아이를 생각한다. 툰베리가 그렇듯이 깊은 우울과 내면의 붕괴까지도 마음이 흐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앎은 앓음이라고, 그 슬픔과 우울 속에 절망하고 주저앉더라도 다시 나아가고 뻗어가 살아갈 힘을 얻는 나선형의 가치가 생태 교육의 가치 아니던가.
국어 교육의 기출 몇 번 ‘시’처럼, 수학 교육에서의 수식처럼, 과학 교육에서의 지구과학처럼 진실이 여타의 목적을 위한 무미건조한 지식이 되는 순간, 그 교육이 타락한 지점이다. 단순히 지식만 전달해온 기존의 교육이 실패한 지점이 이곳일테다. 내가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를 알게 된 건 중학교 올라가기도 전이었다. 95%가 기후변화를 알고 있다, 아니, 알고만 있다. 이것은 정보를 전하고 전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기후위기를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안 하느리만 못한 일이겠다. 건조한 언어로 사실을 전할 때, 그 진실이 지니는 의미는 전달하는 과정에서 흩어지고 만다.
나는 종종 숫자에 얼굴을 입히고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한 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13,000명의 얼굴을 상상하고, 3초에 사라지는 종들의 이름을 부르며, 600g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이의 눈을 떠올린다. 보이지 않거나 사라진 지점을 발굴하고 상상하는 힘을 길러내는 데 생태교육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교육의 본질은 생태교육과 기후교육에 있다. 녹색전환의 축은 생태교육이 되어야 한다. 한윤정 선생님이 말하듯이
“생태전환 교육의 과제는 기후위기와 환경재난을 최소화하기 위한 생태적 전환의 방법을 가르치고 탄소배출 제로 교육을 통해 학교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동시에, 교육 자체를 생태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개인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둔 지금의 교육은 이웃, 자연을 배려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력을 키우는 교육으로 전환돼야 한다.”
생태교육은 학벌사회 하의 교육과 정면으로 맞서는 교육이라 생각한다. 전체를 보고 성찰과 느림을 갖추고, 심사숙고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넘쳐나는 지식들은 소용없다. 중요한 건 그 지식을 바탕으로 길어낼 지혜다. 공간적 사고와 시간적 사고를 확장하는 것이 생태교육의 의미다. 내가 내 몸, 내 가족, 내 나라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옆 나라, 지구 반대편 나라, 그 생태계, 나아가 지구와 우주까지 내 몸인 양 여기고, 나의 오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살아갔던 사람들과 미래에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의 시간까지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5. 끝으로
이래서 산다. 혹은 저래서 산다. 달라도 좋고 강물처럼 흘러도 좋으니 살아갈 이유들이 저마다 있었으면 했다. 우린 저마다의 마음을 가지고 살겠지만, 곧 붕괴할 세계 속에서 어제와 다름없이 하루를 죽여 보내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찾아오는 참을 수 없는 낯섦은 엇비슷한 색이리라. 그래서 기후위기는 한낱 탄소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문제일 수 없다.
고민없이 무턱대고 기후위기를 막을 방도를 계획하고 가르치는 일은 사람에게도 세계에게도 위험하다. 길거리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바다의 해변가에 가서 청소를 합시다. 내연기관차 대신에 전기차를 사요. 플러그를 뽑고 분리수거를 잘 하고 텀블러를 사용합시다, 하고 가르쳐온 편협한 노예 도덕을 기후위기의 이름으로 재탕하고 말 것이라면, 그런 교육 때려치우는 게 차라리 낫다. 끝내 나아가 그 ‘교육’ 자체를 비판하고 해체하고 변혁해 낼 수 있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교육이 앞세대가 계획한 제도에 적응하는 사람만을 참되게 인정한다면, (그리고) 학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와 같은 사회가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선전기관”이라면 차라리 학교 없는 사회를 만들자. 차라리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았으면 한다.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 모든 게 바뀌지 않고서야 다른 길을 찾을 수는 없다.
* 장윤석
연구활동가.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활동하고, 아야프(AYARF)에서 둘 다 하고 있다. 녹색전환을 꿈꾸며 생태학살을 막고 싶다. 늘 같이 우정모아 세상을 헤쳐갈 동지를 구하고 있으니, 언제든 연락주시라. 010-7449-1041 joel1030@naver.com
* 이전에 대안교육잡지 민들레에 기고했던 글인데, 실리지는 않았습니다. 뒤늦게 올려봅니다. 20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