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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Sep 11. 2021

다른 경제 없이 전환이 될 리가

: 경제성장의 기각과 대안 경제의 모색 연습

요약: 한국 사회의 성장 중독은 최근 통과된 녹색성장 기본법, 토건 사업이 가득한 한국판 뉴딜, 해외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지는 생태학살로 드러납니다. “기후위기 시대, 경제성장이 계속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성장의 물리적, 사회적 한계는 명료하게 ‘그럴 수 없다’고 답합니다. 탈성장이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닌 유일한 대안의 상으로 남은 작금, 탈성장에 대한 낭만적 오해와 결별하고 지구와 사회를 안전궤도에 위치시키는 적정 대안 경제의 기획으로 이해할 때, 지구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는 탈성장의 현실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기후위기 시대, ‘탈성장’이 갖는 대안 형성의 면에 주목합시다. 


1.     서: 성장 중독 한국 사회의 현주소 – 기본법, 뉴딜, 생태학살

 

며칠 전 국회에서 통과된 기후 기본법의 제명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이었다. 10여년 전 녹색을 걸고 전국의 산과 강을 파헤치던 녹색성장의 망령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두 해간 사회 전역의 요구를 모아 제정에 들어간 기본법, 향후 기후위기 대응 정책의 정신 역할을 하는 기본법에[1] 녹색성장이 들어간 것은 참으로 상징성이 짙겠다. 한국의 기후위기 대응 경과를 보면 의미심장하다. 한국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온실가스를 계획적으로 감축해 본 적이 없다. 눈에 띄게 온실가스가 줄어든 것은 20여 년 전 IMF 경제 위기 때가 유일하다. 이것을 ‘온실가스 감축’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는데, 사회의 온 곳이 풍비박살 나고 나서야 그 결과로 감축 지표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을 구호로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을 내놓았다. 온실가스 감축량이 제대로 설정되지도, 이행되지도 않은 최악의 입법이었다. 다시 10여년이 지난 오늘, 한국 사회 전반의 철학, 경제, 법 무엇도 수식어가 화려해졌을 뿐 그대로(BAU, Business As Usual)다.  

기후위기는 이런 식으로 빚어졌다. 앞에 녹색이 붙든 지속가능성이 붙든 ‘성장’을 건 순간 피할 수 없는 역사적 경로다. 한국은 어느 곳을 돌아봐도 성장의 망령에 꽉 잡혀 있다. 

법에서 경제로, 정책으로 내려오자. 그린뉴딜이 대안으로 떠올랐을 때가 있었다. 늘 그렇듯이 시작은 아래로부터다. 기후위기의 민감성이 고조되며,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양대 목표를 해결하자는 맥락으로 등장한 그린뉴딜이 녹색당, 정의당, 미래당의 대안정당부터 각계의 시민사회까지 유력한 담론으로 떠올랐다. 그린뉴딜의 진가는 새로운 사회계약, 기후 정책과 경제(사회) 정책의 통합, (질적으로는) 급진성과 (양적으로는) 대규모 정책에 있지만, 2020년 7월 14일 현 정부의 한국판 뉴딜 발표 이후 괴상해졌다. 

한국판 뉴딜에 디지털 뉴딜, 휴먼 뉴딜 옆 한 짝에 위치한 그린 뉴딜은 태생부터 한계를 내재하고 있었다. 얼마 전 첫돌을 맞았지만, 모양새는 그대로다. 방향성이 글러 먹었어도 생태계의 자정작용처럼 원래의 급진적 정책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한국판 뉴딜 계의 사업 목록을 보면 그린뉴딜은 녹색 성장의 관성을 짙게 게 드리울 뿐이다. 기초지자체의 그린뉴딜 정책을 전수 조사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전반적인 경향성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곳이 대다수에, 수소와 디지털에 치중되어 어두움이 짙었다(녹색전환연구소, 2021). 

초기 단계에서 지니는 제도적, 체계적 불완전성은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린 뉴딜의 탈을 쓰고 등장한, 처참한 수위의 토건 개발 사업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어렵다. 부산시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한때 구호로 등장했던 그린 뉴딜은 온데간데없고, 왼쪽에 가덕도 신공항이 오른쪽에는 동남권 메가시티뿐이다. 부산시는 다른 지자체 중에서도 유독 두드러지는 토건왕국이겠다. 

현장으로 갈수록 문제는 태산이다. 이것이 ‘그린뉴딜의 초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후위기 대응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급격한 전환’의 방향성을 폐기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당장 지금 시행되는 많은 ‘뉴딜’ 사업은 폐기가 현명함에 가깝겠다. 결국 정부의 그린 뉴딜 예산 중 대부분은 대기업의 주머니로 흘러가 버렸다. 곳곳에 모순이 한가득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순되었다는 지점에서는 일관적이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이뤄지는 많은 사업의 경우 영미권에서 진행되는 ‘녹색성장’ 프로젝트 수준으로 분류되지도 못하는 토건개발 사업이겠다. 국익∙개발∙성장에 대한 일념이 너무 강하게 자리잡아, 녹색을 말하더라도 국익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녹색, 성장을 위한 녹색, 개발을 통한 녹색이 되고 마는 것이 실정이지 않나. 

여기까지만 해도 대략 짐작할 수 있겠지만, 한국의 경제체제는 추출적 경제(extractive economy)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특성은 석탄과 공항을 볼 때 자세하게 흐름이 잡힌다. 한국은 국내에만 6개의 신규석탄발전소와 6개의 신공항을 계획•건설 중이다. 몇 기의 석탄발전소는 이미 가동을 시작했고, 한 달여 전 나온 국토교통부의 ‘6차공항종합개발계획’을 보면 환경부의 제주 2공항 반려 결정까지 무시하는 강행군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논의 축에도 못 끼는 해외 사업이다. 대부분 국내로 집계되는 온실가스 인벤토리에 기재되지도 않는데, 한국 기업들은 해외로 나가 팜 플랜테이션, 석탄, 가스전 개발 등에 열심이다. 포스코의 미얀마 쉐 가스전 사태나 삼성의 호주 바이롱 광산, 아다니 사업 등을 생각하면 되겠다. 나는 이것을 사업이 아닌 생태학살(Ecocide)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사안들이 대부분 2008년 녹색성장이 시행되던 이명박 정부의 비호를 받고 아시아 등지로 진출한 것을 감안할 때, 녹색 성장이란 안이고 밖이고 용서가 어렵겠다.  

한국이 짓는 마지막 석탄발전소인 붕앙은, 2050년, 가까스로 탄소중립이어야 할 시기에도 가동된다. 인도네시아에 짓는 자와 9, 10 호기, 베트남에 짓는 붕앙-2호기에 들어가는 한국전력, 한국수출입은행, 한국무역보험공사, 하나은행, 삼성물산, 두산중공업 등지는 기후악당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다. 기후위기의 진면목을 보는 데 있어 이들 중 한두 개의 기업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상세한 예시는 없을 것이다. 

두산중공업은 석탄관련 재무적 손실로 파산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만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의 3조의 여신 지원으로 구출되었고, 주가의 성장세는 배가 넘었다. 세금으로 몰지각한 기업 경영을 구출해준 것이다.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 균열을 내는 시도가 있었다. 내가 있는 청년기후긴급행동은 두산중공업의 녹색분칠을 드러내는 직접행동을 시도했고, 그 결과 현재 ‘국내 최초’ 기후소송을 앞두고 있다. 두산중공업의 1840만원 청구 소장을 받으면서 물음이 일었다. 이것은 성장에 반역기를 든 죄인가? 



2.     기후위기와 경제성장


 “기후위기 시대, 경제성장이 계속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답은 명료하다. (지금과 같은 구조의 성장 양식은) 불가능하다. IPCC 보고서에 등장한 그래프들을 보면 롤러코스터 마냥 우하향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세계 전역은 급격히 온실가스를 줄여서 0으로 만들어야 한다. 근대 역사의 대부분에서 우상향 진보를 그려온 인류가 마주한 진실은 재론의 여지 없는 성장의 한계다.  

경제성장과 온실가스 배출은 꼭 같이 가는 게 아니라는 탈동조화에 대한 논쟁은 엄연히 있지만, 크게 보거나 작게 보거나 한국사회에서는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역사상 단 한 번도 GDP와 물질 사용량이 분리되는 ‘탈동조화(Decupling)’가 없었다는 어느 생태경제학자의 말이 일침을 가한다. 지구가 위험에 빠질수록 여지가 줄어드는 논쟁이다.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이 드러낸 성장의 물리적 한계는 50년이 지난 지금 적확히 맞아떨어지고 있고 그 구체성은 더 짙어지고 있다. 요한 록스트륌과 그 동료 과학자들의 아홉 가지 ‘지구위험한계 (Planetary Boundary)’를 보면 기후변화, 토지 이용의 변화, 질소·인에 의한 오염, 물 다양성의 손실률, 그리고 성층권 오존층의 파괴, 생화학물질에 의한 오염, 해양 산성화, 담수 소비, 대기 오염 혹은 에어로졸 부하 9개 중 4개가 지구 한계를 넘어 위험지대에 들어서 있는 상태다.

지구도 지구지만 성장의 사회적 한계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성장률과 자살률의 상승치가 짝을 맞추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돈벌이’로 축약되는 온갖 사회문제가 방증하는 것은, 이 GDP 성장이라는 숫자가 재료로 삼은 것이 사회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일리치가 말하듯이 “성장에는 식인종 같은 면이 있다. 경제 성장은 자연과 공동체를 잡아먹으며, 지불되지 않은 비용을 자연과 공동체에다 전가하기까지 한다(이반 일리치·볼프강 작스, 1992).”

GDP의 물신성 지적, 숫자에 매몰되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 숫자 회계 방식에 매몰되어 셈하여지지 못한 것은 얼마나 많은가. GDP에서 챙겨가지 못한 점들이 작은 ‘외부’일 것이라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꽃가루받이 경제학』의 저자 얀 물리에 부탕(Yann Moulier Boutang)이 벌의 수분 가치를 언급하며 말하듯이 GDP에 잡히는 것이 오히려 일부이고 안 잡히는 부분이 더 클 수 있다.[2]



3.     탈성장


탈성장주의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다. 탈성장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사용될 때 논쟁이 초래되지만, 경제학적으로 사용될 때 명료해진다. 탈성장에 대한 오해와 결별할 필요가 있다. ‘팬티 벗고 자연으로 돌아가자’식의 원시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탈성장을 이해하면 오산이다. 생태경제학의 관점으로 봤을 때 탈성장은 무한한 물질(온실가스, 토지이용, 물) 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로부터 벗어난 ‘적정 경제’의 기획일 수 있다. 

칼리스(Giorgos Kallis)와 같은 탈성장주의 경제학자들이 ‘성장 없는 그린뉴딜’로 논의를 종합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앤 페티포(Ann Pettifor)의 그린 뉴딜도 성장치에 비중을 두지 않는‘정상 상태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도넛 경제학』의 저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는 ‘성장 불가지론’을 말하여 언뜻 중립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성장 자체에 광폭적으로 매몰되는 관행에는 시선을 두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탈성장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린뉴딜”은 대안적 경제 “성장” 정책이 결코 아니다. “자원의 활용과 배분 그리고 생산과 분배와 소비 활동이 GDP 성장이라는 신화에서 풀려나 이러한 대안적 경제의 상에 맞을 수 있도록 사회경제 시스템을 재구조화하자는 주장이 된다(홍기빈, 2021).” 

중요한 것은 탈성장의 현실태이다. 세르주 라튜슈(Serge Latouche)가 이야기하는 ‘상상계의 탈식민화’와 같은 ‘성장주의’로부터의 탈피와 같은 철학적 접근, 성장 세력들과의 대항을 선언하는 정치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탈성장 사회가 어떻게 구현되어 이뤄질 수 있는지가 위기를 앞둔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 

이론 차원에서 머물 필요가 없다. 누구의 말마따나 ‘이미 시작되었다.’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이 책으로 나온 지 몇 년 만에 암스테르담과 같이 GDP를 도넛으로 갈아치운 도시들이 등장했다. 지역의 주체성을 흠뻑 가지고 이뤄지고 있는 곳곳의 전환 시도는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파리의 15분 도시(15min city)기획은 주차장을 허물고 도로를 자전거와 인도의 품으로 안긴 후 사회주택 비율을 올리는 등의 정책을 시도했다. 스웨덴의 녹색당 환경부 장관은 국내 온실가스 배출 3위의 공항을 허물고 녹색 공공임대주택을 포함한 생태도시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뉴욕에서는 부동산 시장에서 100년 만의 대격변이라고 불리는 뉴욕시를 위한 그린뉴딜 법안(the Green New Deal For New York City)’이 통과되었다. -EU는 2030년까지 시민에 의한 그리고 시민을 위한 100개의 기후중립도시(100 Climate-Neutral Cities by 2030 - by and for the citizens) 달성 목표를 내걸었다. 상징적인 선언과 시도들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이 내용의 구체적 기획은 탈성장의 시도들과 겹친다. 



4.     결: 대안과 희망의 발굴

물론 한국사회로 오면 올수록 현장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한숨이 비례하여 늘곤 한다. 아무래도 한국 사회는 좋은 토양은 아닌 것 같다. 조건도 나쁘다. 특히, 탈성장 사회의 구현과도 같은 사회적 경제의 영역은 어려운 고비를 겪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적 경제에 대하여 이중 문제가 발생하는데, 사회연대경제-지역순환경제가 유일한 대안이 되는 한편, ‘사회적 경제’의 영역 자체에 내재된 관의 정치관계에 잡혀버린 어려움이 공존하는 것이다. 

기후위기고 사회적 경제고 어느 판이든 어느 선수든 손발이 되어 일하는 이들은 말할 수 없이 앓고 있다. 생각하면 그간 얼마나 아프지 않은 척을 해왔는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무서워 시장에 내맡기는 허다한 시도가 끝났으면 좋겠다. ‘심리적 내전’을 전사회적으로, 각 공동체와 조직 내에서 겪고 있는 우리다. ‘살아있다’대신 ‘살아남았다’는 말들이 곳곳에 퍼지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신뢰와 연대가 깨어져왔는지 헤아리기가 어렵다. 통계를 보나 장면을 보나 여러모로 어려운 난국이다. 자살률, PIR, 투표율, 사회적 경제 판(기성과 젊음의 갈등, 관변화)을 보나, 국회를 보나(양당 구도), 사회문화 갈등 양상(젠더)을 보나 사회적 신뢰 수준은 낮기 그지없다.[3] 그런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은 얼마나 거대한가. 탄소중립은 상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과제이다. 몰락과 해체와 죽음을 앞에 둔 기로에 우리는 서 있다. 탄소중립 사회는 숫자에 불과한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설정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사회적 인식과 의지)로 표현되는 ‘사회적 응집력’의 중요성이 등장한다. 사회는 장난이 아니다. 산술적 개인의 합도 아니고, 동떨어진 관념도 아니다. ‘사회’를 외칠 때 그것이 단지 형식에 머물지 않고 어떤 ‘실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더 섬세함과 고민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과 희망은 발굴의 영역이다. 가장 마음에 닿는 말은 실패와 상처의 가능성이다. 사회 연대 경제의 원리를 묻는 말에 이탈리아 사회적 경제 철학자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의 답은 ‘사랑과 상처’다. 상처받을 위험이 있는, 사랑의 관계로 경제를 조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돌봄이 건강이 이루어지는 사회란 얼마든지 맘 놓고 아플 수 있는 사회다. 붕괴와 분열이 오히려 사회를 새롭게 되살리고 연결하는 토양이 될 수 있다(마조리 켈리 외, 2021). 

어쩌면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성장이란 믿음은 희망의 역할을 해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탈성장’이란 구호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는 반면, 성장의 믿음과 희망에 기대온 이들에게는 자기부정의 언어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 또한 탈성장이란 말에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경제, 철학적 타당성 입증과는 별개로) 성장중심주의를 과감하게 깨버리는 것은 전환의 전제와도 같지만, 대안의 가능성 대신에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그것을 탈성장이라고 부르기 싫다면 말자. 부르고 싶다면 부르자. 대안 경제를 칭하는 무수히 많은 이름 자체가 이것이 내재하고 있는 다양성의 방증이리라. (성장 없는) 그린뉴딜, 정의로운 전환, 민주적 경제, 사회연대경제, 돌봄 경제, 탈성장 경제, 도넛 경제, (지역) 순환 경제 등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전환 담론은 누가 무어라 칭하든 성장과는 선을 긋는다. 분명한 것은 모두 대립적인 말들이 아닌 대안의 광범위한 영역의 어느 하나를 강조한 것들이다. 나에게 이 묶음의 이름은 녹색전환이다. 우리는 많은 말들이 개념인 동시에 희망인 단어라는 것을 잘 인지해야 한다.

탈성장을 담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기후위기 시대에 등장하는 경제상(학)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날이 밝는 것은 밤이 지기 때문이 아니라 해가 떠오르기 때문이라 했다. ‘탈성장’이 갖는 비판과 형성 양자의 면모 중에서 후자에 눈길을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안 경제의 상상과 구현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l  홍기빈(2021.9.2), “도넛 경제학: 경제 성장의 신화를 넘어서”, “기후위기 대안찾기 : 기후위기 시대, 경제성장이 계속될 수 있는가” 녹색연합 발제문

l  요르고스 칼리스 외(2021), 우석영∙장석준 역,『디그로쓰』, 산현재

l  케이트 레이워스(2018), 홍기빈 역, 『도넛 경제학』, 학고재

l  마조리 켈리 외(2021), 홍기빈 역, 『모두를 위한 경제』, 학고재

l  요한 록스트륌(2017), 김홍옥 역,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에코리브르

l  루이지노 브루니(2021), 유철규 외 역, 『콤무니타스 이코노미』, 북돋움coop

l  얀 물리에 부탕(2021), 『꽃가루받이 경제학』, 돌배게

l  이반 일리치·볼프강 작스(1992), 이희재 역(2010), 『반자본 발전사전』, 아카이브

l  녹색전환연구소(2021), 「기초지자체 그린 뉴딜 정책 수립 현황과 이행장벽 분석」, 

l  녹색당 기후정의위원회(2021), 「기후기본법 다시쓰기-‘탄소중립 녹색성장’ 통합의견의 검토와 기후정의 법안으로 나아갈 길」 

          

[1] 기본법은 “사회에서 기본적인 원칙이나 준칙 내지 일정한 법 분야에서 제도, 정책 등에 관한 기본과 원칙, 기준 등에 관하여 정한 법률”을 이른다. 기본과 원칙을 잡는 법이기에, 그 중요도가 비할 데 없이 높고 향후의 세부정책과 그 성격이 본 기본법의 경로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그렇지만 기후위기 앞에서 (양적)성장은 버려도 (질적)발전은 버릴 수 없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버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은 숙고해야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발전의 측면에서 우리는 그간 ‘성장’에서 외면받아 왔던 재생에너지, 돌봄 경제, 복지 영역, 순환 경제, 교육 영역의 우선 순위를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적응 인프라의 구축을 생각할 때 어떤 사회적 발전이 지금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이 논의를 거쳐도 과하지가 않다. 


[3]물론 촛불과 코로나 정국에서 간혹 의아할 정도로 보이는 서구적 분석틀에서 잡히지 않는 한국적 토양의 응집력,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에 대한 반응과 움직임 또한 그 가능성과 희망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 이 글은 9월 2일 날 녹색연합에서 주관한 “기후위기 대안찾기 : 기후위기 시대, 경제성장이 계속될 수 있는가” 토론회의 토론문을 갈무리한 것입니다. 
** 녹색전환연구소의 9월 뉴스레터에 갈무리해서 실었습니다. 알찬 녹색전환연구소 뉴스레터 많은 관심 바랍니다.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oY7Iz8QjiSaE9pw7UaAMc5ZGso6o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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