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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Oct 04. 2018

여행의 시작, 이르쿠츠크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도보투어

7.13 여행의 시작


비행기가 뜨는 순간, 참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빈약한 저가항공 비행기가 활주로에 서서 엔진의 RPM을 올린 후 무섭게 달려 얇상한 바퀴가 땅에서 딱 뜰 때의 느낌, 그 이상야릇한 느낌은 날 툭툭 치며 "야 출발했어"하고 말을 건다.

하늘이 화창해 다행이었다

7월 13일 출발해서 8월 13일 귀국하는 딱 한 달의 일정을 잡았다. 세 살 터울 동생과 떠나는 여행이다. 한 집 살지만 몇 년 전부터 이상하게 멀어졌다. 바쁜 것도 있겠지만 무언가 공통의 얘깃거리가 없었던 것이 크지 않은가 싶다. 이번 여행을 통해 못 다 쌓은 우애를 몰아서 쌓기로 했다. 한 달 동안 싸우지는 않으려나, 걱정을 가득 안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루트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시작해 몽골 울란바토르로를 거쳐 베이징을 경유해 돌아오는 걸로! 아버지의 이상한 취미(?) 탓에 우리 집에는 밥상에도 거실 정중앙에도 세계지도가 붙어있다. 항상 지도의 정중앙 자리한 바이칼에 눈이 갔었다. 바이칼에서 수영하고 몽골에 내려와 고비의 초원을 달리면? 딱 좋다 싶었다. 이르쿠츠크행 비행기를 끊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 때는 론리플래닛(lonely Planet) 입사를 꿈꾸며 진로희망 칸에 여행작가를 적어낸 때가 있었더랬다. 한국은 답답했고, 특히나 학교는 더 답답했기에, 여행은 가뭄의 단비요 삶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묘하게 여행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떠나고는 싶지만 떠난다는 게 한국 사회의 답답한 것들, 즉 각종 병폐와 모순들을 외면하는 것처럼 여겨져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설렘과 찜찜함 두 개의 양가적 감정을 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괜한 찜찜함은 털어내야겠다 싶어 가이드북 뒷 장의 러시아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 이르쿠츠크까지의 4시간, 심심함을 달래기에는 공부가 최고다. 뭐, 달달달 외우기 시작했는데 발음이 낯설어서 그런가, 안녕하세요 / здравствуйт(즈드라스뜨부이쩨) , 감사합니다 / Спасибо(스파시바) 딱 두 마디 외웠다. 두고두고 써먹었으니 잘 한 일이련만, 한 시간에 한 문장은 좀,,


지루함 끝에 비행기가 착륙하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추측컨데, 한 두 명 치기 시작하니까 동조 효과가 발생한 것일 테다. 그 장면이 웃겨서 기억에 남는다. 누가 보면 비상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줄 알리라. 숙소까지는 막심-얀데스 택시를 탈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현지 유심을 발급받아야 했다. 이르쿠츠크 공항에서 국내선 청사로 들어가 MTC를 찾는 게 목적. 그러나 순풍이 불지는 않았다. 국제선 공항에서 나와 공항 건물을 뒤로한 채 좌측으로 가면 쉽게 국내선 공항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에서 X-ray 검색대와 보안요원이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여긴 아닌가 보다 하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맸다. 그곳이 맞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면 MTC는 한눈에 보인다. 한 평 남짓한 작은 가게다. 떨리는 목소리로 첫 러시아어를 내뱉었다. 즈드라스뜨부이쩨. 무뚝뚝한 직원이 흘깃 쳐다보더니 코팅된 종이를 내밀었다. 영어로 쓰여 있는 종이에는 기간·데이터 양에 따라 세 개 정도의 선택지가 있었다. 내가 선택한 유심은 20GB·10Days·350RUB. 동생이 물었다. "형, 350루블이 얼마야?". 내가 갔을 때가 1루블에 18원이었으니 350루블은 6300원, 그러나 차마 이 저렴한 가격을 믿을 수가 없어 이게 63000 원인지 6300원인지 잠깐의 논쟁을 벌였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6300원이 뜨자 동생 유심까지 해버렸다. 일주일간 두고두고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리고 한국에 오고 난 지금은 살인적인 요금에 분노하고 있다.

여어 히사시부리


7.14 이르쿠츠크 도보투어

전 날은 밤에 도착해서 본 거라고는 이 고양이 한 마리 정도. 뭐, 일단은 그 정도로 만족할까. 본격적인 '첫'날, 첫날이 주는 설렘에 화답이라도 하듯 날은 무척 화창했다. 다음 날 바로 알혼 섬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오늘은 갈 길이 멀다.


먼저 이르쿠츠크라는 도시에 대해 짧은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소비에트 형식의 딱딱한 건물들과 화려한 양식의 건물들이 모두 어우러져 있어, 독특한 도시경관을 연출해낸다. 시베리아의 '파리'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 실제 프랑스 파리와도 연관이 있다. 약 200년 전,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로,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권좌에서 축출하고 파리를 점령한 시기에, 파리의 발전된 모습과 자유주의의 향기를 맛본다. 그러고는 조국 러시아의 낙후된 현실과 비교하고, 정치와 농노제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며 지배층이 먼저 개혁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창한다. 황제의 즉위식 날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대부분 체포되거나 사살되고 말았다. 체포된 이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이르쿠츠크로, 머리에 파란 물든(정확히는 파리 물이겠지만) 데카브리스트 덕에 이 곳은 문화·예술이 빼어나게 발전했다. 실제로 이르쿠츠크를 돌아다니면서 건물들이 르네상스·바로크풍이라 무척 흥미로웠다. 러시아와 서유럽이 퓨전 되었달까.


아무튼, 도시 중심부는 두어 시간이면 한 바퀴를 돌 정도로 작다. 붉은 궁전 급으로 막 유명한 볼거리가 있지는 아니지만 이삼백년 가까이 된 건축물과 성당, 광장들이 지금의 이르쿠츠크 사람들의 삶과 조화되어 남아있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솔하다.


러시아의 모든 도시가 그렇듯, 여기도 칼 마르크스 거리가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다. 아마 마르크스 거리로 이름 붙여지기 이전부터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그린라인 도보투어를 하기로 했다. 그린라인은 이르쿠츠크의 명소들을 쭉 잇는 초록색 선으로 이 라인만 따라가면 반나절 정도로 알차게 관광을 할 수 있다.

(참고 : 이르쿠츠크 인포메이션 센터 http://en.irkvisit.info/ )

알렉산드로스 3세 동상, 그린라인 1번이다.

기본적으로 굵직한 역사에 여럿 휘말렸던 도시이기에, 볼거리가 많다. 그리고 굵직한 역사에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가득히 느껴지는 여유로움은 놀라웠다. 매일 신도림-영등포를 지나다닌 탓일까, 한적한 공원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책을 보고 있거나 잔디밭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광경은 낯설기까지 했다.  

130지구, 테마공원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린라인 30번
도보여행의 장점, 재미난 걸 많이 볼 수 있다.

길거리의 동물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어느 청소부 아주머니가 길냥이를 무릎에 앉힌 채 비둘기에게 자신이 먹던 샌드위치 조각을 나눠주는 모습이었다. 인상이 무척 좋으셨다. 어쩌다 눈이 마주쳤는데 씩 웃으셔서 나도 인사를 건넸다. 낯선 곳에서 순간적으로 뭉클했던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길거리의 동물들이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비둘기는 정말 발까지 다가온다. 툭 발로 차면 정말 차인다! (살짝만 쳤다.. 고멘) 길고양이들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마 그만큼 이르쿠츠크의 사람들이 선량하기 때문 아닐까.

Irkutsk Regional Art Museum of V.P. Sukachev / 출처 : 이르쿠츠크 인포메이션 센터

기억에 남는 '친절함'이 많다. 그린라인 도보투어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곳 이르쿠츠크 주립 미술관에서 만난 할머님도 그중 한 분이었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명화'가 있지는 않지만, 슈카체브 백작이 모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무명 화가들의 그림이 가득하다. 아마 이 작자는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나라에 구애 없이 수집을 한 모양이다. 그 덕에 즐겁게 감상했다. '친절한' 나에게 그림설명을 해주고 싶어하겼지만 아쉽게도 할머님께서는 영어를 모르셨고, 나도 러시아어를 몰랐다. 그렇지만 할머님께서는 부단히 노력하셨다. 아쉽게도 5%로 이하로 알아들은 것 같지만 그 친절함의 크기는 언어와는 관계없이 다가왔다. 

왼쪽은 앙가라 강변 / 오른쪽은 이르쿠츠크 개선문이라 불린다. 도시 한 편으로 앙가라 강이 위치해 있다. 마침 서쪽이라 일몰이 기가 막히다.
벨기에vs잉글란드, 우리는 벨기에를 응원했다. 이곳이 벨기에 펍인 까닭에.

도보투어를 마치고 첫날의 감흥에 듬뿍 젖어 간만에 사치를 부려봤다. 스테이크도 시키고 맥주도 원 없이 시키고 그랬다. 이곳은 bbb라는 벨기에 베이커리-레스토랑-펍으로 이르쿠츠크 트립어드바이저 최고점을 기록했다. 한편 오전에 베이커리를 잠시 들렸었는데 그때의 아리따우신 직원분이 나를 기억했다가 식사 때 남은 빵을 서비스로 주셨다. 호화로운 친절이었다. 다음에도 꼭 다시 들리겠노라 다짐했다. 마침 러시아 월드컵이 한창이었고 펍에서는 빔프로젝트를 놓고 축구를 틀었다. 이날은 벨기에 vs 잉글랜드였는데 벨기에 펍에서 호가든과 레페, 그리고 스텔라를 마시는 우리가 잉글랜드를 응원할 수는 없었다. 벨기에 코스튬을 입고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옆자리 커플의 눈치도 보이고 말이다. 결국 벨기에가 2:0으로 압승을 거뒀고 펍은 흥겨운 분위기가 흘렀다.


 맥주에 잔뜩, 사람들의 친절에 잔뜩 취한 채 하루는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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