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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Oct 10. 2018

이르쿠츠크에서 액땜하기

칼빵을 당할 뻔했다 

7.15 / AM 7:00 / 아침 산책과 칼강도


전날의 친절함을 단번에 배신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여행을 가면 아침 산책을 즐겨하는 편이다. 새벽 향기가 좋다. 이스탄불에서는 매일 아침산책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알혼 섬에 들어가는 버스 편은 AM 9:00, 두 시간 남짓 남겨두고 환전 겸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여행을 통틀어서, 아니 인생을 통틀어서 최악의 경험을 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근차근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노력해보겠다.


브런치를 하겠다는 명목 아래 새로 장만한 노트북 크로스백이 있다. 여기에 노트북·지갑·여권·달러·핸드폰을 모두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전날의 친절함에 듬뿍 빠져있었고, 전반적인 도시 분위기가 내가 그간 다녀온 곳과 마찬가지로 평온했기에 아무 걱정 없었다. 아침 7시 반이었지만, 해가 늦게 뜨고 지는 탓에 거리에는 몇 사람 없었다. 태평한 아침 탓에 기분은 들뜨리만큼 들떠있었다. 문제는 이후에 일어났다.


130지구 인근 공원을 둘러보려던 나에게 이상한 녀석들이 접근했다. 이르쿠츠크 특유의 고풍 있는 목조건물 사진을 정성 들여 찍고 난 직후였다. 지금에 와서나 이상한 녀석들이지, 그때는 타지인 청년에게 관심이 있는 누군가, 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인사를 건넨 '누군가'는 인상이 무척 착했다. 러시아어로만 계속 말을 걸었고, 나는 어제의 미술관 할머님을 떠올리며 소통해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인상이 착했고, 악수를 권하기도 했고, 골목이 아닌 광장이었기에 나는 무방비했다.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 또한 있었고 말이다. 그들 중 하나가 칼을 꺼내기 전까지는 몰랐다.


기억이 자세하게 나지는 않는다. 뭔가 이상한 걸 점차 느꼈다. 자기 자전거를 타라는 시늉을 하는데 혹여나 타면 자전거 대여비(?)를 요구할까봐 일부러 못 탄다는 시늉을 보였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는데 한 녀석이 '이제는 안 되겠다'는 눈빛으로 자기 친구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그 친구는 주머니칼을 빼들었다. 기억이 자세하게 나지는 않는다. 언덕을 올라가려고 했던 내가 어떻게 아래쪽에 있었는지, 어떻게 2:1인데도 가방을 들고 올 수 있었는지, 일말의 경계도 품지 않았었던 내가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말이다. 


칼을 보는 순간 전신이 전율했다. 인도, 동남아, 그 외 위험하다는 지역을 여러 번 다녀오는 동안에도 나는 강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칼 강도는 더더욱. 이런 위기를 마주하면 사람들은 대게 두 가지의 양반된 모습을 보인다고 들었다. 하나는, 몸이 얼어붙거나 어쩔 줄 몰라하는 타입. 다른 하나는, 미치도록 침착해지는 타입.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나는 후자였다. 칼을 본 순간 머리는 오버클릭이라도 된 듯이 빠르게 회전했고, 정신은 얼음처럼 냉정해졌다. 칼을 주시하면서 가방을 지킬 방도를 생각했다. 한 녀석이 내 가방 줄을 붙잡고 칼질을 했고, 나는 붙잡았다. 아마존 직구라 그런지 튼튼했던 가방은 칼질 한 번을 견뎌냈다. 하지만 두 번은 무리였다. 팽팽한 가방끈이 끊어지며 그 녀석과 나 둘 다 넘어졌고 가방은 가운데 떨어졌다. 모든 게 든 소중한 가방이었다. 산지 두 달 된 노트북과 1000$가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겠지만 목숨만큼 소중했다. 동물 같은 반사신경으로 가방을 안아 들고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다. 


침착한 후자의 타입이었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뛰고 난 후 다리부터 머리까지 모두 후들거려 도저히 숙소까지 갈 힘이 없었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러시아 아주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뭐라뭐라 하시더니, 내 겁에 질린 눈동자와 잘린 가방줄을 보시고는 칼 마르크스 대로까지 데려다주셨다. 경찰서까지 데려다주시려 한 것 같은데, 버스시간이 다가와 숙소로 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했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러시아 남자가 보이거나 러시아어가 힐긋 들리기만 해도 등이 쭈뼛거렸다. 몸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중간에 서로 싸우는 러시아 남자들이 있었는데, 무척 공포스러웠다. 나는 숙소까지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마음 추스를 새 없이 바로 알혼 섬으로 떠나야만 했다. 4시간의 기나긴 버스 안에서 이 엄청난 경험을 소화해야만 했다. 비포장도로 위에서 덜컹거리는 벤에서 쓰린 엉덩이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직구로 산 소중한 신상 가방, 젠장


깨달음


친절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마찬가지로 흑심을 가진 사람도 어디에나 있다. 이 경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찔린 것도 아니고 다치지도 않았으니.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 경험은 너무나 절대적이었다.


놀랍게도, 이르쿠츠크는 높은 치안 수준을 자랑한다.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에게 경찰에 신고를 부탁하며 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처음에는 믿지를 않았다. 잘린 가방끈을 보여주니 그제야 믿고는 'Strange(이상한)'을 반복했다. 자기가 이르쿠츠크에서 산 게 몇 년인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범죄에는 확률이라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자에게 하는 조언은,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도 1. 새벽-밤 혼자 돌아다니지 않기, 2. 긴장 풀지 않고 낯선 사람 경계하기, 를 유의하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경험은 나에게 귀중한 깨달음을 선사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남자라는 태생적 한계 탓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특히 '밤길의 무서움 - 두려움'에 대해서 공감이 어려웠다. 나도 간혹 밤길을 걸을 때 공포를 느낀 적은 있었지만 귀신-유령 따위에 대한 무서움이었다. 여성들이 말하는 범죄의 공포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런데 대부분의 남자들이 이 이야기에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한국이 치안율 1위래.", "밤길 성폭행 그런 거는 미친놈들 몇이 하는 짓이지. 대부분은 안 그래. 미꾸라지가 물 흐리는 거라니까." 

하지만, 막상 칼빵을 당할 뻔하고 보니 저 이야기들은 실없는 소리로만 들린다. 주위에서 밤길에 가해를 당한 이야기들을 듣고, 친지에 피해자가 있다면, 그리고 살아오면서 큰일 날 뻔한 순간들을 직접 경험했다면, 어찌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잠재적 가해자(범죄자)'라는 단어가 특히 논란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용어는 소수의 가해자들을 왜 남성 전체로 확장시키느냐, 일반화의 오류다, 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친구(놈-비실이)와의 논쟁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한남'이라 칭해지는 99%는 착한 남자라고. 왜 1% 개새끼들의 책임을 99%의 무고하고 착한 남자들이 져야 하냐는 것이다. 억울한 거 이해는 가지만, 이런 변(?)을 당한 뒤에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용어를 모두를 잠재적 가해자로, 그런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처지와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들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친절한, 세상 사랑스러운 츤데레들이었다. 다만 0.01%의 확률로 칼 강도 두 명만을 만난 것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뒤로 모든 러시아 남성 - 나보다 강하고, 나를 해코지하겠단 맘먹으면 할 수 있는 -들을 공포스러워했다. 본능적인 작용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츠러들고 저항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정말 그렇다. 


자칫하면 트라우마로 자리할 수 있는 경험이다. 알혼 섬으로 향하는 길에 끊임없이 이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두려움과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 가운데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스스로 공포를 재생산했다. 다행히도 수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로 덕에 점차 나아지긴 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말해주고 대해주냐가 피해 극복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위로하는 법을 익히겠노라 다짐했다.



알혼 가는 길


알혼 섬으로 가는 길은 예뻤다.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내가 지금 아프고 힘든 나를 쉬게 하러 간다는 느낌을 물씬 받았다.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처에 후시딘 바를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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