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랑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 장윤석 Oct 17. 2018

바이칼 호숫물에 상처를 퐁당

탁 트인 호수를 바라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7.15 / PM 5:00 / 알혼 섬 산책


알혼 섬에 도착했지만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는 못했다. 다이애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 바로 뒤에는 언덕이 있었고, 나는 이끌리듯이 언덕을 올랐다. 이르쿠츠크에서 4시간을 달려온 만큼, 이 곳은 '외딴 섬'의 향기가 물씬 났다. 외부 문명으로부터 떨어진 '어떤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바이칼의 광활한 수평선이 차차 내려다보이자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언덕에서는 후지르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지상 최대의 담수호

호수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바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알혼은 샤먼의 고향이다, 오색 천을 휘감은 솟대가 나란이 줄지어 있다
'갈매기의 꿈' 조나단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이는 갈매기 한 마리, 나는 저이에게서 이상한 위안을 얻었다. 조나단이 떠올랐다.

석양이 세상 부셨다

부르한 곶 방면으로 해가 지는데 근래 본 어떤 석양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예뻤다. 다사다난한 하루가 져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차차 안정되었다. 분명 '큰'일을 당했지만, 일을 어떻게 소화할지는 나의 몫임을 알았다. 상처야 후시딘 바르듯 바이칼에 담가 치유하면 되는 것이었다.



P.M 8:00 / 월드컵 결승전


다시 숙소로 돌아오자 새로운 인연이 나를 반겼다. 하바롭스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로 가는 은영 - 썸머가 그 주인공이다. 여행 중 만난 인연들이 대개 스쳐 지나갈 뿐인 반면 은영과 썸머와는 계속 함께했다. 여행이 막을 내린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있으니 가히 소중한 인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유쾌한 프랑스 부부도 만났다. 이름을 까먹었지만, (쟝과 시몬이라 해둘까) 밤새 찐하게 놀았다. 하필이면 그날이 또 대망의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이었다. 프랑스 vs 크로아티아, 우리는 프랑스를 응원했다. 쟝이 프랑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채 가방에서 큼지막한 국기를 꺼냈으니,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축구경기가 시작되고 보드카와 함께 우리는 경기를 지켜봤다. 프랑스 골문으로 공이 들어가자 분위기는 싸해졌다. 모두들 프랑스가 이기기를 간절히 바랬다. 쟝의 표정을 봤다면 바로 그 이유를 알아리라.


다행히도 프랑스는 4-2로 크로아티아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쟝은 세상 행복해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에게 프랑스식 응원을 알려주었다. '알레 레 블루(Allez Lebleu)',아직도 까먹지 않았다. 쟝 덕에 우리도 우리가 이긴 것 마냥 덩실덩실 춤을 췄다!

 쟝과 시몬, 그리고 보드카
왼쪽부터 은영 - 민석 - 썸머 - 나 - .


P.M 12:00 / 비실대첩


술이 들어가자 모두들 달아올랐다. 축구도 이겼겠다 술을 쭉쭉 들이켰다. 그러나 사고가 나고 말았다. 썸머와 페미니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친구가 끼어들었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18학번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그 친구는(앞으로 비실이로 부르기로 한다) 빻은 말을 굉장히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젊은 탓인지 혈기도 넘쳤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비실이의 선전포고에 응했다. 그렇게 동이 틀 때까지 피 튀기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어떤 인텔리개체의 한계를 어떻게 지적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 것인가. 페미니즘이 이길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 보드카에 완창 취한 16일 새벽 5:00

그때 적어놓은 메모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얻은 깨달음만은 명확하게 기억난다. 논리만 가득하고 공감능력 없는 논리충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았달까. 그 뒤로 논리적이고 명석한 것보다 사려 깊고 유연한 게 끌린다. 좀 더 겸손하고 유연하고 섬세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떠오르는 해를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르륵 잠에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