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트인 호수를 바라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알혼 섬에 도착했지만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는 못했다. 다이애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 바로 뒤에는 언덕이 있었고, 나는 이끌리듯이 언덕을 올랐다. 이르쿠츠크에서 4시간을 달려온 만큼, 이 곳은 '외딴 섬'의 향기가 물씬 났다. 외부 문명으로부터 떨어진 '어떤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바이칼의 광활한 수평선이 차차 내려다보이자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호수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바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이는 갈매기 한 마리, 나는 저이에게서 이상한 위안을 얻었다. 조나단이 떠올랐다.
부르한 곶 방면으로 해가 지는데 근래 본 어떤 석양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예뻤다. 다사다난한 하루가 져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차차 안정되었다. 분명 '큰'일을 당했지만, 그 일을 어떻게 소화할지는 나의 몫임을 알았다. 상처야 후시딘 바르듯 바이칼에 담가 치유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자 새로운 인연이 나를 반겼다. 하바롭스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로 가는 은영 - 썸머가 그 주인공이다. 여행 중 만난 인연들이 대개 스쳐 지나갈 뿐인 반면 은영과 썸머와는 계속 함께했다. 여행이 막을 내린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있으니 가히 소중한 인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유쾌한 프랑스 부부도 만났다. 이름을 까먹었지만, (쟝과 시몬이라 해둘까) 밤새 찐하게 놀았다. 하필이면 그날이 또 대망의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이었다. 프랑스 vs 크로아티아, 우리는 프랑스를 응원했다. 쟝이 프랑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채 가방에서 큼지막한 국기를 꺼냈으니,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축구경기가 시작되고 보드카와 함께 우리는 경기를 지켜봤다. 프랑스 골문으로 공이 들어가자 분위기는 싸해졌다. 모두들 프랑스가 이기기를 간절히 바랬다. 쟝의 표정을 봤다면 바로 그 이유를 알아채리라.
다행히도 프랑스는 4-2로 크로아티아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쟝은 세상 행복해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에게는 프랑스식 응원을 알려주었다. '알레 레 블루(Allez Lebleu)',아직도 까먹지 않았다. 쟝 덕에 우리도 우리가 이긴 것 마냥 덩실덩실 춤을 췄다!
술이 들어가자 모두들 달아올랐다. 축구도 이겼겠다 술을 쭉쭉 들이켰다. 그러나 사고가 나고 말았다. 썸머와 페미니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끼어들었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18학번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그 친구는(앞으로 비실이로 부르기로 한다) 빻은 말을 굉장히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젊은 탓인지 혈기도 넘쳤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비실이의 선전포고에 응했다. 그렇게 동이 틀 때까지 피 튀기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어떤 인텔리개체의 한계를 어떻게 지적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 것인가. 페미니즘이 이길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 보드카에 완창 취한 16일 새벽 5:00
그때 적어놓은 메모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얻은 깨달음만은 명확하게 기억난다. 논리만 가득하고 공감능력 없는 논리충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았달까. 그 뒤로 논리적이고 명석한 것보다 사려 깊고 유연한 게 끌린다. 좀 더 겸손하고 유연하고 섬세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떠오르는 해를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르륵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