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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Nov 16. 2018

알혼의 북부투어

세상이 너무 커서 두렵다면 내가 그만큼 커져서 돌아가면 되는 거잖아

7.17


나는 종교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반종교적인 인간이기도 했고,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내가 믿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조금은 변화가 생긴 것 같다, 알혼은 나에게 그 변화를 부여한 곳이었다.


전날 과음을 했지만, 좋은 술이라 그런가 숙취는 약했다. 설마 맑디 맑은 공기가 해장을 독톡이 해 준 것인가! 미리 예약해놓은 북부투어 행 벤에 올랐다. (북부투어는 알혼 섬 북부를 벤으로 한 바퀴 쭉 도는 가장 대중적인 투어루트이다.) 


바이칼이라는 곳은, 드넓었다.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좁은 반도에서 나고 자라난 내가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이것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걸 믿기는 너무나, 너무나도 어려웠다.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보는 광경에 넋을 읽은 채 버스에서 덜컹거렸다.

프로봉, 덜커덩덜커덩

그날 따라 하늘이 맑은 건지, 아니면 원래 이 청정지역이 하늘이 맑은 건지 하늘은 무지하게 맑았다. 인상깊은 것은, 하늘과 호숫물 색이 거의 같았다는 거다. 수평선 끝이 보여야 하는데 그 곳에는 하늘도 있었다. 그 둘은 저 수평선 어딘가에서 만나서 경계선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지워버렸다. 마치 내가 지난날 알고있던 이성의 영역들, 생각의 영역들이 부질없다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저 곳 어딘가 이 호수의 끝이 자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내게 보여지는 것은 바다와 하늘이 뒤섞인 푸르름 뿐이었다.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냥, 이 풍경을 내 손으로 그려내고 싶은 마음이 충만하게 일었다. 카메라로 쉽게 찰칵찰칵 하는 게 바이칼에 무례한 짓처럼 여겨졌다.


당신은 어떤 마음을 품고있기에 소금기 한 점 없이 끝없는 깊이를 보이십니까


P.M 7:00 

 

벌써 바이칼의 마지막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매일같이 올랐던 뒷동산 길을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올랐다. 부르한 곶 쪽으로 향하는 작은 언덕이다. 산깎아 곧은 길을 내고 억지로 화단을 가꾸어 만든 우리집 산책로와는 달랐다.독려하는 솔솔바람, 끈기있는 생명력 넘치는 풀들 모두.  꽤 오랜시간 산책을 했다. 걷고 또 걸었다. 모래사장에서는 신발을 벋고 발에 다가와 닿는 차가운 민물을 느끼며 걷고 걸었다. 한 러시아 가족이 갈매기에게 빵조가리를 던져주길래 옆에서 구경했다. 친절하게도 나에게도 줘보지 않겠냐며 권했다. 별나게 재밌었다. 푸드덕 거리는 갈매기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그 모습을 찰칵 찍었다. 알혼에서 찍은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 되었다.

잊지 못할 뒷동산 산책길
가장 마음에 드는, 원본을 잃어서 안타깝다.
참 색감이 예뻤다


7.18


아침 일찍 일어나 편지를 썼다. 사전을 더듬더듬 찾아가며 니키타, 기리온, 사샤, 마르게리타에게 편지를 썼다. 고맙다고 적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변을 당했었는데, 그로 인해 생긴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당신들로 인해 떨쳐버릴 수 있었다고 썼다. 마지막 문장만 기억에 남는다.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고, 좋은 사람이라서 고마워.' 남기고 떠난 편지라 그들이 어떤 표정으로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연락처도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다. 그냥, 그들이 그 편지 한 통으로 행복한 하루가 되었기만을 바랄 뿐이다.


바닥에 널부러진 배낭을 다시매고 알혼을 떠났다. 마을을 저편으로 하고 덜커덩 덜커덩 벤이 출발하자 나는 이어폰을 꼽고 '문학소년'을 들었다. 조금의 상념에 사로잡히다가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아쉬움,,이라기보다 벅참이랄까. 충만함이랄까.  

끝을 생각한다는 것은 늘 찝찝함을 남긴다. 석양이 질 때 다가오는 아쉬움과 같은 맥락이다. 사라지지 말거라 말거라 빌어도 져버리고 만다. 끝이란 그런 것이다. 슬픔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다. 무거운 단어다. 그러나 가벼운 것은 싫다. 무게를 한껏 느끼고 싶다. - 7.18 일기

사실 처음에는 여행을 안 오고 싶었다. 무언가 모순 가득한 한국의 현실을 그냥 둔 채 떠나가고 싶지 않았다. 여행이 사치처럼 느껴졌달까. 미약하나마 죄책감을 안고 떠나온 나였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그 말의 무게에 잔뜩 짓눌려 있었다. 모순가득한 세상을 바꾸는 나의 모습, 그리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여행을 떠나는 나의 모습은 공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좁은 생각이었다. 개인과 사회를 나누는 벽을 부셔야한다. 세상이 너무 커서 두렵다면, 내가 그만큼 커져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이 너무 넓어 버겁다면 내가 그만큼 넓어져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마음이 한결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 하는 이 여행이 나를 더욱 키운다면, 그것은 세상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다. 

섬 밖으로 나가는 배

배를 타고 나와 호수 건너편 섬을 바라보니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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