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밤이다. 염치없게도 나는 아직 발제문의 탈고를 마치지 못하고 있다. 일주일 동안 집에서 자지 못해 어떤 부하 근처에 왔지만, 나는 아직 마치지 못했다. 기다려준 분들게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린다. 나의 실패와 우리들의 실패를 동시에 감각하고 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나는 이미 실패했고,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기후위기를 막는 녹색당, 지구 기온을 1.5도라는 한계 안에서 유지시키겠다는 녹색당의 담대한 비전은 우리에게 아무런 현실적 영향력을 얻디 못하면서 멀어진 꿈이자 잊혀진 선언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2019년 녹색당이 했던 선언을 기억하는가. 1.5도 목표를 위해 녹색당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들. 그리고 3년, 이 지나 지금에 와서 황금 같은 골든타임의 절반을 날린 것을 깨닫는다. 지금부터, 지구 기온을 1.5도로 위치시킬 수 있는 감축목표와 시나리오는 우리 앞에 없다. 20억톤의 탄소예산은 지금 속도라면 3년 안에 모두 소진된다. 1.7도 목표가 50억톤으로 7년을 벌어줄 뿐이다. 1.5도 목표를 버려야 했다. 문제는 우리가 그저 실패에 그치고 말 수는 없다는 데 있다. 불난 집이 다 타버리고 말도록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지구든 녹색당이든.
살림의 빛이 등장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살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어떤 목적의 수단이 되지 않더라도, 살릴 수 있다는 것 많으로도 우리는 존재사유를 찾을 수 있다. 많은 경우 무언가를 살린다는 것은 자기를 살린다는 일이기도 하니까. 자기가 묻어들어가 있는 본원을 자각하고 그 공간을 지키고자 하는 시도일 테니까.
청사진은 내놓음과 동시에 실패한다. 전환은 장난이 아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보자고. 내가 실로 지키고 싶은 것이 뭐였나. 모든 것을 돌아가서 처음부터 생각할 수 있겠다. 녹색전환을 쓰는 순간 이것은 마지막 시도다. 내 손으로 다시 말을 죽이는 날이 올까. 예정된 실패를 나이브함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뭔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에게 남은 건. 모았던 마음들은 흩어져 가고 모른척 돌아섰지만, 우리들은 그저 모두 겁쟁이였던 것 뿐이었어서. 그대여 우리에게 남은 건 확인 못한 이야기. 다시 그려진 서로의 기억들. 그대여. 우리들이 믿었던 무지개 같은 속삭임. 내려놓지 못했던 우리에게 남은 건. 우리들은 모두 그저 흉내를 냈던 것뿐이었어서. 그대여 우리에게 남은 건 확인 못한 이야기. 서로만의 진실들. 그대여 우리들이 믿었던 무지개 같은 속삭임. 떠나오지 못했던 그대여 우리에게 남은 건. 밤하늘에 새겨진 검은 무지개처럼 반짝이며 썩어가는 꿈. 우리에게 남은 건.” - 자우림, 우리들의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