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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ㅔ22.1.4

by 노마 장윤석

2022.1.14

아침에 일어나 무언가 적고 싶었다. 잔뜩 화를 덮어내고 일을 일단락 짓고 헤어나온 시간들에서 말들을 해보고 해내고 싶었다. 붕앙에 대한 말들은 계속 하고 해도 끝이 없는 듯하다. 원고를 여러 개를 썼다. 성명서. 기고문. 발제문. 토론문. 활동백서. 보고서까지. 그런데도 다시 등장하고 계속 나오고 그런다. 왜? 무엇이 안 풀리기에.


딱 한 해 전이었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는 추억이지만 내가 나를 미워하게 되었던 시간들이기도 하다. 물론 붕앙이 아니더라도 자기 책망의 굴레는 늘 어느 영역에서는 늘 있었겠지만서도 말이다. 나는 그걸 막지 못했으니까. 저 멀리서 지어지는 베트남의 석탄발전소를 막기에 나는 연구, 활동, 운영 여러 면에서 언어부터 발끝까지 부족했으니까. 바닥에서 일년 동안 뒹굴다보니 여러 면에서 급성장한 것은 맞다. 이제는 긴장도 덜 되고, 어떻게 해야할 지도 좀 보이고, 도움을 청할 이들도 주위에 많아졌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힘들을 가지고 일 년 전으로 돌아가면 나는 막아낼 수 있을까? 누가 붕앙팀장을 맡았더라도 우리는 공동의 결사체이기에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고, 이 정도면 사회운동으로써는 꽤나 성공적이란 것을 안다. 닷페이스와 르몽드의 취재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작년 12월부로 베트남에서는 붕앙 받고 살아난 두산과 삼성의 포크레인이 착공을 시작했다.


나에게 기후위기를 막는 것은 구호였지만 목적일 수 없었다. 공기의 흐름 같은 것이라 생각도 한다. 무엇보다 2050년 까지, 혹은 이번 세기 말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서 있으리라는 가정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 때까지 붙잡고 있을 자신도 없다. 생명의 원리와 정반대로 대치되는 기후위기의 인식은 어떤 삶에 있어 실존적 모순의 성격을 지닌다고 여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평이한 인식에 기초한 철학과 질서가 무너져야 하는 것이지만, 나로 돌아오면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나의 목적은 딱 붕앙을 막는 것이었다. 2030년을 생각하든 2050년을 생각하든 그것은 관념적 시간 범위이고, 미래가 두렵든 과거가 후회되든 지금의 나는 오늘에 묻어있다. 그래서 딱 오늘의 내가 기후위기 앞에서 미치지도 절망하지도 않고, 무언가 -그것이 씨알이든 타임캡슐이든- 심을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그게 붕앙이고 말이다.


나는 더이상 활동가라는 이름을 쉬이 쓰지 않는다. 연구활동가라는 말도 경계한다. 활동가라는 이름이 부여하는 온도는 오래 타기 힘들다. 태울 것이 없어 자기와 곁을 태우는 꼴을 가장 경계한다. 한 명의 활동가 옆에는 한 명의 연구자와 한 명의 예술가와 한 명의 정치인과 한 명의 기자가 (한 명의 농부와 한 명의 법률가와 한 명의 철학자까지) 있어야 한다.


그저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 뿐이다. 나의 괘 혹은 역량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고 그 시간의 언어가 활동가가 아닐 뿐. 물론 내개 안써도 뷸리면 활동가겠지. 그보다 3년 전과는 비할데 없이 ㅕ스스로 활동가라 쓰는 이들이 많아져 반갑고 소중하다. 신년 맞아 이들이 있는 단체의 후원자가 되었다. 내 몸이 열 개가 아니기에 파트분배를 한다고 생각하고 활동 시간 대신 후원을 늘리고 있다.


재판장의 무거운 공기에 들어가기 전에 무언가 남겨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5차 공판인데 (직접행동의 피해유발여부)감정 신청에 따라 최후 공판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녹음과 녹화가 되지 않아 화구를 가져왔다. 내 첫 번째 꿈은 화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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