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1~2023.1.9
마지막 해가 유난히 붉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저 해는 원일까. 완벽한 원은 이론적으로만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실제의 세계에서는 원으로 보이는 무수히 많은 것들도 실제로는 타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것이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그 착각에 기대 살아가고 있다. 여기까지 하면 좋을 것을, 문제는 그 원에 대한 갈망과 추구가 무척이나 숭고하고 귀중하다는 데 있다. 비록 완벽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나은 원을 향한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 옳고 그르다는 선악의 잣대는 저 해 앞에서 무색해지기 일쑤다. 그저 아름답다는 말밖에 지금은 할 수밖에.
사람의 삶은 참 다채롭다. 어떤 생명들의 삶이라도 참 다채롭다. 저 해가 지난 1년 동안 우리를 살려왔던 순간들에 감사하다. 지구가 그 햇빛 에너지에 힘입어 살아간다는 단순한 사실은 곱씹을수록 묘하다. 점점 더 복잡성이 증가하는 세계이지만, 어쩌면 그 해결책이 단순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위안과 희망을 준다. 다양한 것이 주는 다채로움의 풍요로움에 흠뻑 빠져 있었던 1년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직 해를 보낼 준비가 안 되었다. 계절의 순환성과 시간의 흐름을 숫자로만 접했지 느껴오지 못한 환경에 놓인 우리들은 줄곧 그러는 것 같다. 우리들은 트러블과 함께할 수 있을까. 기후를 비롯하여 그 세상의 비극과 고통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불안하지는 않다. 실은 걱정도 별로 되지 않는다. 나의 지난 심정들을 반추하면, 놀랄 만큼 지금이 어색할진대, 지금은 이게 나라서 괜찮다. 바닷바람에 갈대들이 흔들리듯이 계속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해가 져도 서운하지 않다. 해에게 못나고 잘난 게 없듯이, 내가 못나도 괜찮다는 거다. 내가 잘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다.
자정이 지나며 날도 지나고, 달도 지나고, 해도 지나갔다. 스물다섯 번째 새해이다. 사람의 생을 100살이라고 한 다면 쿼터가 지나가는 셈이다. 그게 못내 아쉬워서 더 열심히 살려다가 망한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굳어진 생각들과 몸을 바꾸려면 그것이 풀어질 때까지 흔들리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알고 만들어온 많은 것들을 그냥 풀어두려고 힘을 빼려고 했다. 실로 만만찮은 작업이다. 자기전환의 목표치 중 25% 남짓 달성했을까. 아니, 어쩌면 전환의 목표치라는 것 자체가 자기아집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증표는 아닌가. 힘주기와 힘 빼기, 유위와 무위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거쳐갔을 고민들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대통령의 신년사를 봐도 화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우울해지지도 않는다. 세상의 변동에 나를 동기화한 것을 끊어내기 위해 했던 노력이 꽤나 성공했나 보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관과 세계감을 헌 신처럼 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 앞에 미증유의 위기가 도사리고, 현 정부가 이를 가속할 것을/혹은 최소한의 안전망조차 만들지 못할 것을,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많은 이들의 역량이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다. 다만 생각의 온도와 빛깔, 어떤 태도가 맥락이 변했을 뿐이다. 자연을 닮아가고 있는 것일까. 인위적인 ‘자연’ 개념에서 탈피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학자의 말처럼 내가 근대의 부역자인지, 탈-근대의 개척자인지 모르겠다. 귀하게 얻은 것들이 엄연하게 있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제안은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참 좋은 시사점을 준다.
올해에는 부디 나를 알았으면 좋겠다. 이 몸이 단지 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조상에도 가족에도 옆에 있는 다양한 만물에도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해였다. 11월의 가족세우기부터 풀려버린 내 영혼에 대해서 올해는 찾아가고 싶다. 어떻게 이렇게도 사람의 인생은 흐름 따라 흘러가는 것일까. 믿기지 않는다. 무심코 믿기지 않는다. 활동가에서 연구자로 연구자에서 수행자로 수행자에서 다시 연구자로. 어쩌면 날 때는 수행자였나. 내가 어떤 팔자를 타고났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저 흔들리는 대로 달려갈 용기와 부딪혀서 다쳤을 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저 우장탕창 하고서.
정신적으로 여러 것이 도사린다는 것에서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 이전에 머리로 세상에 정상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 깨달았다. 그러므로 내상은 있다. 다만 치료를 시작할 여건과 마음가짐을 만들었다. 이렇게 나를 보면 결국에는 괜찮아진다. 머리에 준 힘을 풀고서. 살아날 수 있는 본성을 우리는 갖추고 있다.
야옹은 우리는 누군가의 후손이자 누군가의 조상이라 했다. 해월은 내 한 몸이 꽃이면 온 세상이 봄이 되리라 했다. 타 존재들이 나의 뭉쳐있는 어깨들을 풀어주고 정신의 상흔을 풀어준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에서 처음의 불안과 버거움을 잊고 서로 살아나갈 바탕을 갖출 수 있다. 그것에 대한 본성적이고 동시에 경험적인 믿음이 오천 년 역사를 있게 했다. 그 후손 중의 하나로서 그다음의 오천 년을 위해서 나는 오늘도 조상이 되려고 한다.
올 해의 화두로는 ‘보듬어 안기’를 말하고 싶다. 약 30년 전 현경 선생님이 장일순 선생님을 인터뷰할 때 그가 했던 말이다. 가을에 나를 살렸던 대화를 잠시 옮겨본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대화를 다시 복각하여 바람과 물 매거진의 새해 7호에 실으려 한다. 이어지는 것은 참 경이롭다.
정현경: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운동이라는 개념은 갈등이론에 근거한 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선생님에게 운동이란 무엇입니까?
장일순: 다릅니다. 전체가 다 공생하자는 얘기죠. 운동이라는 게 뭐냐 했을 때 으레 투쟁이 기본이냐, 아니면 조화가 기본이냐로 갈리죠. 나는 조화가 기본이라고 봅니다. 전부 떼어내 버리면 생명이 존재하는 걸까요. (중략) 가지고 있는 걸 살리고 극복을 해야죠. 상태를 없애버리는 해결은 해결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저것이 있는 것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없애버리면 해결이 있을 수도 없죠. 과제는 무엇이냐 하면 제3의 지평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정현경: 제3의 대안을 내서 끌어안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장일순: 그럼요. 한 10년 된 얘기인데 박정희씨가 죽고 나서 외신 기자들이 날 찾아와서 얘기를 하는데 “선생님은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요. (중략) 그래서 나는 “보듬어 안는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런 혁명도 다 있느냐고 묻더군요. 혁명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죠. 새로운 삶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전심 투구하는 노력 속에서 새로운 삶이 태어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되니까요.
그동안 잠수를 탔던 사회적관계망서비스 공간에 다음과 같이 써서 올렸다. 눈발을 맞으면서 한 주간 흔들렸던 것들에서 자유롭고 단단해지고 싶었나. 나와 너와 우리를 믿어보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은 눈이 그랬다. 오롯이 그 자체로 있을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서로서로 있다. 새해가 실감 나기도 하고 안 나기도 한다. 나는 안 나는데 너희들을 보면 난다. 참 묘하고 신비로워서 눈을 맞는데 눈이 시큰했지 뭔가. 조금씩 살아나는 기분이 들어서 이상하고 감사했다. 부디 연결된 누군가가 꼭 잘 살아났으면 좋겠다. 새해 복 여실히 짓고 받기를 애타게 바라본다~
나는 학교의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교토의 스승을 만나러 여행길에 올랐다 내렸고 내 연구소에 와서 세 번째 신년을 맞으면서 방금은 내 당의 마라톤 회의를 마치고 눈 맞으면서 한주를 마치고 내 집에 왔다. 내 근황은 여기까지, 너는 잘 혹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하다. 시간의 흐름들은 여러 마음들을 낳았고 긴장도 걱정도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하얀 눈앞에서 사르르 녹았다. 남은 마음을 들추어보니 이것은 따뜻한 다정함이오 여실한 믿음이란다.
너무 갔다면 조금 돌아오자. 언젠가부터 이 이상한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 공간은 약간 공포를 연상했다. 왜인지 보기도 무섭고 쓰기도 무서운 거다. 비극이 난무하고 가시 돋친 말들이 날아다니는데 피할 길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거나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늘 두렵다. 그리고 그것을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은 더 두렵다. 내가 옳고 맞고 좋은 사람이 아닐까 봐 찾아오는 불안감이 있다. 아예 놓을 수 없는 불안이다. 평안하길 기원하지만 그럴 수만은 없기에 비는 것 같다.
이상하다. 나는 관계와 연결과 생태와 사랑과 믿음을 강조하는데 왜 타자를,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마 꽤 많은 너희들이 같은 고민을 안고 있을 것 같다.
늘 연말이면 얽힌 인연의 억겹을 풀려 편지를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하나도 못 부친다. 왜 이렇게 못내 마음에 남는 일이 많은걸까. 못 지킨 나와의 약속, 못다 한 사과, 못내 도움이 못 된 서울역 앞의 홈리스, 못 막은 석탄발전소와 신공항, 못 마친 온갖 연구 마감 등등등.
탈성장 운동 중 하나로 주빌레 2000이라고 부채 탕감이 있다. 토지공개념 운동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전에는 희년이라고 부채를 탕감하고 땅을 일정 주기마다 다시 평등하게 나누는 오래된 전통도 있단다. 내가 지고 있던 마음의 빚도 새해니까 다 탕감해주면 안 되는 걸까. 검은 토끼님 내게 답을 주세요.
지금은 내가 옳거나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습이 여전히 배어있겠지만. 내가 못나니까 별로 세상과 사람에게 화도 잘 안 난다. 우리는 천상이 아니라 지상 혹은 지옥이 사는 존재들이라고 그랬다.
그저 나는 바랄 뿐이다. 줄곧 놓치고 실패하더라도 내가 나와 너와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매일 아침 요가를 잘 갔다가 당사와 연구소에 가서 풀떼기에 물을 주기를. 삭을 때까지 마음에 꽁꽁 묵혀두지 말고 너를 믿고 다정하게 나누기를.
나는 내가 기후위기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나에게는 비극을 막을 힘과 지혜가 적다. 그냥 1/n인 생명 하나. 대단할 것 없는 나 하나. 그렇기에 이 미증유의 위기를 헤쳐가는 일상을 같이 살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파도타기 하듯이 살아갈 것이다.
민낯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염치도 없고 용기도 별로 없다. 그런데 좋은 사람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눈은 그저 펑펑 나릴 뿐이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한 해 잘 가보자고 전해본다. 모두를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는 이가 되려고 수행 정진해보겠다. - 눈 작성
2022년의 마지막 해넘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후손이자, 누군가의 조상이라는 말이 남았다. 한 해간 건네준 은혜들에 감사를 올려요. 고맙습니다.
2023년의 첫 해돋이. 내 한 몸이 꽃이면 온 세상이 봄이리, 하고 시작하고 싶다. 새해 복 지으시기를 기원해요. 살아나는 해가 되기를 애타게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