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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Apr 03. 2023

2023.4.3 끄적임

엄청나게 복잡하고, 복합적이며, 복작복작하다. 세상이 미쳤는지 온갖 꽃들이 한번에 개화했다. 아름다운 꽃들을 보러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경에 나서는데 아나운서는 연일 관측이래 가장 이른 어쩌구를 말학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즐겁다. 어느 숙소든 물이 펑펑 나오는데, 전국 각지는 가뭄으로 고생을 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산불들이 전국을 뒤덮었다. 이것이 우리 시대 우리 일상의 한 장면, 나는 더 덧붙일 말이 없다. 그 시인의 말처럼 아무 말도 필요없어진 때가 아닐까. 문득 참 덧없는 오늘날의 비극과 장면들을 허무하게 생각한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소식들이다. 뉴스 하나에 우울 하나, 뉴스 둘에 우울 둘 혹은 감춰진 분노도 둘, 셋, 넷, 다섯.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우울과 분노도 연결되어 계속 확장될 뿐이었다. 과거를 금세 잊어버리는 나는, 이 또한 옛 기억으로 까마득이 잊어가고 있는 것 같다. 경금의 팔자라기엔 조금 이상한지도, 기후위기 시대에 사주는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전쟁 중엔 사주팔자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은 묘하게 남았다. 정신착란의 때에 이것을 알아버리고 느껴버린 이들이 살아갈 방도는 무엇일까. 더 이상 기후우울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삶은 이상한 모양으로 무너진 뒤였다. 기후가 사라지니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정말 뜻으로 움직이는 이상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석탄발전소를 막기 위한, 이라는 석탄에너지로 몸을 돌려온 결과 온 몸에 쌓인 미세먼지며 유독물질로 기침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파괴되어가는 자연을 닮아버린 나의 뇌는 이미 일상을 꾸려가기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 사람이 시대와 사회를 닮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승만의 건국 정신을 자유 이념으로 만들자는 현수막을 붙인 그 세대나,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그 다음 세대나, 전두환에 저항했던 이 세대나, 그 저항의 방법에 신물이 나고 물질에 천착한 세대나, 그들의 후손 세대나. 음. 많은 논쟁이 있지만 한국 사회륽 계급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에는 신물이 나고(계급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회현상 전부를 해석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한심한 경제학과 동일논리에 있는 것 같다), 보수와 진보로 일축되는 정치적 이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선악의 논리가 내재한데 정의가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낳고(현 시점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나마 세대로 설명하는 것이 들어맞는 것이 맞는데(문제는 MZ가 같은 ‘세대’가 아닌 것처럼, 세대로 정리하는 말들은 목적이 있기 마련이라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경우가 많다. 결국 점점 더 복잡성이 높아져가는 세상에서 어느 하나의 분석법이란 적통할 수 없고 지도를 그려보면 참 묘하게도 얽혀있다. 그래서 가능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이야기 뿐이다.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운동을 하는 이들이 낳는 여러 효과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면서도 마지막 학생운동과 같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애가 탈 뿐이다. 나는 이 이야기들을 채록하여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데에 어떤 빚이 있고 어떤 은혜가 있는지를 드러내는 역할 정도만 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자로서의 자신은 잃고 역사가로서의 필요만 살짝 느끼고 있다. 운동가는 실종되었고, 수행자는 동경하며, 여행자가 남았다. 

나의 완벽주의는 있는 것을 고스란히 옮겨놓으면서 그것의 의미와 배경까지 찾는 것이기에 하나의 도화지에 구현하는 것이 애초에 가땅치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차평면에서 실현될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글로 다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나는 길을 잃었다. 1,2,3월을 살펴보면서 그것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무슨 수를 써도 일상을 꾸려내지 못했다. 일찍 일어나는 것부터, 제대로 챙겨먹기, 제 때 답장하고 잃하기, 하기로 한 것은 끝내기 등 처음에 내가 만들었던 스스로의 계율과 계명이 있었는데 모조리 아직나는 것을 나는 지켜봐야 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원망의 눈초리로 보고만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하고도 나누지 못했다. 실재로 나 자신과도. 물론 나의 부모와 곁과 친구들과 그 조각들을 나누어 이리도 생존할 수 있었지만, 내가 진지하게 대하지 못한 나의 문제를 잘 나눌 수 있을리가 없다. 일과 활동과 공부와 수행이 차근차근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는 마음이 고되었다. 

이제 4월이다. 4월 하면 잔인한 사월밖에 생각이 안 난다. 오늘이 4.3이니 그 생각 안 할 수 없고, 곧 돌아오는 4.16도 생각이 난다. 오늘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죽었다.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가장 그의 노래를 심적으로 많이 들었던 것 같다. Async andata를 들으면 다시 존재의 태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어둠의 끝을 보고 오면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바닥에 있는 먼지들을 청소하고 나면 내일이 보였다. 그 맛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감사를 표하지는 못했다. 지금이라도 고맙습니다, 하고 적어 본다. 피아노를 반려 악기로 삼은 한 명으로 그의 음악을 존경한다. 기차에서 그의 마지막 앨범을 들으면서 서울역을 지나쳐온 휴유증은 아직도 내 몸에 기운이 아로새겨져 있다. 어떻게든 실존의 문제가 생태와 평화로 간다는 것을 담지하고 있던 그의 삶과 음악을 세상이 알고 있다는 것에서 위로를 얻어 간다. 언젠가 그의 추도사를 써야겠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그저께 차를 건네시던 현기스님의 말들에 잠시 머문다. 우리가 누구의 후손인지 생각하자고. 협동하던 인류의 후손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가 도화지에 입힌 색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종국에는 그 도화지를 찢어야 한다고. 내 삶의 계율을 만들고, 진지하게 임하라고. 자기 삶에 화두에 진지하게 임하라고. 낮고 비천한 나는 그 눈썹을 보면서 갈색 눈동자를 보면서 부끄러웠다. 내가 나의 삶을 소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나 싶었다. 하루 하루에 감사한다는 것은 그 하루를 진지하게 임하는 것일텐데. 내가 보낸 시간들. 내가 맺은 관계들. 내가 쓰고 입고 먹고 하는 말들 모두에게.  나는 과거에 매여있고 미래에 끌려가며 현재에 머무르고 잇지 못하구나. 

맺어보자. 오른쪽에는 바다가 철석이고, 왼쪽에는 석양이 내려앉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그 속에 사이에 서 있다. 내가 탄 자전거에 불어오는 바람과 실려있는 무게를 생각한다. 밤하늘의 별들과 그 풍요로운 공기 사이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차가운 계곡물의 온도를 느낀다. 요새 부모와 조상의 무게를 종종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후손이자 누군가의 조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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