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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이안 May 05. 2023

‘존경합니다’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

얼마 전 넷플릭스에 올라온 드라마 한 편을 봤다. ‘연애대전’이라는 로맨스물 드라마였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봤다기보다는 ‘그냥’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렇다. 그냥 심심풀이로 봤다. 기대 안 하고 봐서 그런지 내용 또한 그저 그랬고 딱히 공감 가는 부분도 없었다. 그래서 빨리 보기로 대충 봤는데 딱 한 장면에서 내 감정선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유명 톱스타 캐릭터로 나온 남자 주인공(유태오 분)이 자기 담당 변호사 여주인공(김옥빈 분)과 여러 가지 사건에 얽히고설키다가 점점 사랑에 빠져들게 되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전개였는데 어느 날 우연치 않은 기회에 여주인공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명 톱스타가 자기 딸과 좋아하는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던 여자 주인공 아버지가 대뜸 남자에게 자기 딸이 왜 좋냐 고 묻는데 남자 주인공은 덤덤하게 자기 생각을 꺼내 놓는다. 


“존경합니다. 여러 가지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정의롭고 용감하잖아요. 좋은 일 하고도 별일 아닌 것처럼 굴고… 여미란 씨를 모르면 몰랐지 알면 안 좋아할 수가 없어요. 제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제일 멋있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감동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살짝 보이고 바로 화면 전환되면서 화장실에서 마주치게 되는 엄마와 여주인공의 대화가 이어진다. 왜 울고 있냐고 말하는 딸에게 엄마는 “너무 좋아서… 우리 딸 존경한다니까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의 마음이 온전히 느껴졌다.


갑자기 몇 년 전 아들과 함께 했던 술자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살면서 가장 슬프고도 기쁜 날이 아니었던가 싶은 날이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5개월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20여 년간 운영해 왔던 사업체가 코로나 사태로 휘청이고 있었고, 접어야 할까 계속 버텨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차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고 저녁을 같이 하게 됐다. 


내 아들도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던 때였다. 대학 졸업 후 취업전쟁에 뛰어들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발버둥 치고 있었던 터라 나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좋을 게 하나도 없던 긴 터널에 갇혀 있던 때였다.  


술이 몇 잔 돌고 술기운을 빌어 용기를 내서 아들에게 회사 사정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회사를 접고 새로운 일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고, 더 이상 너에게 경제적 지원이 힘들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내 말을 듣고 난 후 아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술 몇 잔을 천천히 마시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빠, 난 아빠 정말 존경해요. 아빠같이 꾸준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 내 주위에 진짜 없어요… 항상 날 응원해 주고 친구처럼 대해 주고, 단 한 번도 날 비난하거나 탓한 적도 없고… 날 그냥 믿어주고 응원해 줬잖아요… 저도 그럴게요. 아빠처럼 해볼게요. 아빠 너무 수고 많았어요, 이제 좀 내려놓고 쉬셔도 돼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나도 모르게 한동안 울기만 했다. 서러워서 우는 게 아니라 너무 기쁘고 가슴 벅차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아들과 나는 그렇게 한동안 둘이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를 한동안 괴롭혔던 불안과 좌절감은 그 눈물과 함께 씻긴 듯 날아갔다. 


‘사랑한다’ ‘좋아한다’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너무 많이 소비된 말이라서 그런지 그렇게 마음에 와닿지 않는데 ‘존경한다’라는 말은 분명 무게감이 다른 것 같다. 누구나가 존경받고 싶어 하고 존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존경이라는 단어를 붙이진 않는다. 


요즘 세상은 특히나 더 그런 것 같다. 예전에는 존경하는 사람 한 두 명은 얘기해 보라고 하면 쉽게 나왔던 거 같은데 요즘에는 나도 모르게 고민하게 되고 주저하게 된다. 가까운 주위 사람 말고는 존경한다고 표현할 만큼의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닌 세상이 되고 만 건가…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 지도자,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떠 받들 만한 사회 지도층 인사,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리더 등… 이런 사람들 중 ‘존경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르는가? 


자기 자신을 희생해 가며 소중한 인명을 구하는 소방관들, 소외된 소년 소녀가장을 돕는 이름 없는 천사들, 버려진 독거노인을 자기 부모처럼 모시는 자원봉사자들… 나도 모르게 ‘존경스럽다’는 말이 나오는 사람들의 미담은 우리 일반 소시민들의 몫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사진 :Unsplash의 Jorge Rey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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