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기피하게 된 인연
살다 보면 누군가와 인연을 의도적으로 끊는 소위 '손절'을 하게 되는 일이 있다.
특별한 사건이나 다툼이 없어도 무언가 맞지 않아서 손절을 하기도 하는데, 내가 그런 선택을 게 될 줄은 몰랐다.
연락을 안 한 지 1년이 넘은 그 사람은 이전 직장에서 만난 외국인 동료였다. (독일인, 한국인 아님)
같은 아시아권 출신에 비슷한 나이또래, 같은 성별이라 말도 잘 통하고 한국을 좋아하여 한국에 왔다 갈 때마다 그 친구의 선물을 사가곤 했다. 동료로 만났지만 우리는 주말에도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직장동료와 직장을 벗어나 친구가 되기 쉽지 않다는 거, 많은 직장인 분들이 공감하실 것 같다.
나 역시 '사회 친구는 한계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지금까지 독일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는 지인 중 이전 직장동료가 있기에, 사람 사귀는 데 굳이 범위를 한정하지는 않는다. 장소막론 어디나 맞는 사람과 안 맞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친구와 나는 꽤 오랜 기간 잘 지냈고, 직장얘기를 하며 서로 공감대도 많이 쌓였다.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이야기의 흐름이 무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화'라는 건 말을 서로 주고받는 일인데, 내가 무언가를 말하면 그 친구는 거기에 대한 조언을 하기 바빴다.
궁금하지 않거나 조언을 구하지 않는 질문에도 나는 언제나 긴 조언을 들어야 했고, 분명 쌍방으로 시작한 대화는 마치 선후배의 대화처럼 흘러갔다. 나이도 어리고 직장 경력도 나보다 짧았으니 우리나라에서 보면 신입이 과장한테 조언을 하는 것과 같았다.
해외, 특히 서양권에 살다 보면 나이를 잊고 산다. 20대와 40대가 친구가 되기도 하고, 30대와 60대가 가족 못지않은 돈독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나이가 차고 경험이 많다고 무조건 성숙한 건 아니므로, 그 친구가 나에게 조언을 해주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먼저 그 친구 부서의 도움을 구한 적도 있으니까.
문제는 '원하지 않는 조언'이었다.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조언을 구한 것도 아닌데 마치 나를 도움이 필요한 대상인 듯 대하는 태도는 나와 그 친구의 관계를 불편하게 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그 친구는 내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남의 조언이나 충고 듣기를 '꽤 좋아하는' 성격이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는 내가 겪지 못한 세계가 있고, 연륜 깊은 분들의 이야기 속엔 세상의 지혜나 일상의 꿀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언을 들을 준비가 안 된 상대에게 하는 조언은 그저 불필요한 간섭에 불과하다.
간섭이라고 느낀 횟수가 쌓이면서 나는 그 친구와 자연스레 연락을 끊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연락하기 전 몇 번이고 고민하고 결국 연락하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고, 굳이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관계를 정리하며 혹시 나도 지금 누군가에게 원치 않는 조언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과거 언젠가 그렇게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과거에 저지른 실수 혹은 비난했던 부분은 언젠가 본인에게 돌아오는 게 인생의 진리라 생각하며 산다.
그러므로 손절하려고 마음먹은 대상을 굳이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냥 '안 맞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면 된다. 누구든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맞지 않는 관계를 억지로 끌어갈 필요도 없다.
제목 사진출처: copi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