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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Jan 24. 2024

독일에서 함 파는 소리를 들었다

"함 사세요!"


요즘은 거의 사라진 풍습이지만 우리의 전통 결혼식 절차엔 신랑 측 친구들이 혼수예물을 함에 담아 신부 집으로 보내는 '함 팔기' 풍습이 있었다. 함 안에는 혼인 서약서, 집문서, 두 사람의 궁합을 본 사주지 등이 들어있고 함진아비 역할을 하는 사람이 얼굴에 숯을 칠하거나 마른오징어를 쓰고 '함 사세요'를 힘차게 외쳤다.


동네가 떠들썩해지니, 요즘 시선으로는 소음공해지만 온 동네 이웃들이 결혼을 함께 축하해 줄 수 있다는 데서 정겨운 의미도 있던 것 같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독일의 주말, 대낮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함성과 음악소리가 들렸다. 스피커로 튼 음악이 아니라 누가 들어도 직접 악기를 가져와서 연주하는 생생하고 큰 울림이었다. 거기에 사람들의 함성소리까지 더해졌다.


독일살이 연차가 쌓이니 이젠 소리만 들어도 그 정체가 짐작이 간다.


'터키인의 함파는 소리구나.‘


아니나 다를까, 정장을 멀끔히 차려입은 터키인 일행들 약 20명이 한 아파트 건물 앞에 모여있었고, 건물 입구 외벽에는 터키 국기가 걸려있었다.


아파트 앞에 모인 터키인들과 음악과 함성 소리에 창문 너머 구경하는 이웃들 (출처=직접촬영)


누구든 독일에 산다면 터키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나라다. 독일에 사는 터키 출신 인구는 약 280만 명으로, 이민자 배경을 가진 외국인 전체 중 독보적 1위 무려 25%에 가까운 사람들이 뿌리를 둔 나라이다. 터키인들도 우리와 같이 1960년대부터 독일에 오기 시작하여 이미 2세의 대부분이 사회에 진출하고도 남을 나이이기에 뿌리가 깊고 활동분야도 넓다.


개인주의가 약하고 가족중심, 공동체 중심에 기반을 둔 터키문화 및 종교적 특성으로 인해 독일에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전통 풍습을 굳건히 지키려는 모습이 보이며 그중 대표적인 예가 결혼이다.


Gelin Alma를 마치고 차로 돌아가는 사람들 (사진=직접촬영)


이렇게 결혼식 날 밖에서 터키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것을 Gelin Alma(겔린 알마)라고 하며, 신랑은 가족 및 절친들의 환호 속에 신부를 데리러 간다고 한다. 즉 사진 속 아파트가 신부집이었던 것이다. 음악 및 악기 소리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커서 밖을 내다보지 않을 수 없는데, 이웃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겔린 알마의 일부라고 한다. 결혼한다고 일부러 동네방네 떠든다는 소리.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면 다 같이 차를 타고 식장으로 이동한다. 내가 본 겔린 알마는 약 30-40분 정도 지속됐다. 갑자기 조용해서 밖을 보니 신부를 데리고 다 같이 우르르 차로 가고 있었다.




이밖에 터키인들의 결혼을 알 수 있는 시그널이 하나 더 있다.


대낮(거의 주말 낮시간)에 갑자기 고급 승용차들 여러 대가 줄지어 가며 경적을 멈추지 않고 울린다면 - 십중팔구는 터키인이 결혼한 것이다. 신랑신부가 탄 차는 흰색 리본을 달고 있으나, 두 사람이 직접 운전을 하지는 않는다. 차의 경적을 울리는 이유는 경적소리가 불운, 악령을 쫓아낸다는 터키의 미신 때문이라고 한다.


망치질 시간도 계약서에 적는 법과 규칙의 나라 독일에서 이런 시끌벅적한, 그것도 '타국의 풍습'이 허용된다는 게 의아하지만 실제로 결혼의 기쁨으로 인한 경적은 교통법 처벌대상이 아니다. 다만 너무 길게 지속하거나 교통에 영향을 준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타국에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끝까지 지켜내는 게 현지인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 정도의 뚝심이 있어야 지켜지는 게 문화이자 풍습인 것 같다. 게다가 이 정도 인구면 독일에서도 절대 무시 못할 규모이니 머릿수가 곧 권력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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