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벌써 두 번째
독일에 살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보험 리스트가 있다. 의료보험, 치아보험, 손해보험, 자동차보험(차주라면), 집보험 - 여기에 더하여 변호사 보험이 포함된다. 살면서 변호사를 찾아가고 소송 걸 일이 얼마나 되겠냐 싶겠지만, 독일에서는 일이 터지면 인정(人情)에 기대어 해결하기보단 법대로 하는 게 철칙이다. 그래서 변호사 상담을 받거나 소송하는 경우를 상당히 흔히 볼 수 있다. 독일생활 좀 해봤다는 분들은 모두 변호사 보험을 갖고 있다.
나도 그중 하나이며 2024년 새해 1분기 현재 소송을 준비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독일에서만 두 번째 소송이다. 첫 번째는 사기피해였고, 이번에는 보증금 미지급 피해 건이다. 크게 보면 둘 다 사기의 연장선이니 결이 비슷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사건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상할 때마다 단전부터 열이 올라오는데, 이번 사건은 뒷목에서부터 뒤통수까지 저릿해오는 느낌이다.
이전 스토리에서 한차례 독일 월세집의 보증금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다. 독일 월셋집의 보증금은 3개월치 찬월세(난방비와 관리비를 제외한 월세)다. 월세가 1000유로(140만 원)가 넘는다 해도 보증금은 300만 원 남짓이니, 한국에 비하면 굉장히 부담 없는 금액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액수가 적다고 스트레스까지 적은 건 아니다. 이 보증금을 돌려받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잘못 걸리면 월세 들어오기 한참 전에 있던 집의 하자부터 다 뒤집어쓰고 보증금을 한 푼도 못 돌려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독일에선 이사 들어오는 날 집안 구석구석 사진 수백 장을 찍어둬야 한다.
독일생활에 도가 튼 나도 여태 못 받은 보증금이 있다. 독일에서 이사 9번 하며 그동안 수 십, 수 백유로 정도는 눈감고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면 안 될 액수라 소송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집 뺀 지 2년이 다 돼가는데, 보증금 380만 원 중 여태 돌려받은 건 고작 150만 원이다. 관리회사에서 80만 원은 아무 이상도 없던 주방 싱크대를 교체하고 화장실 타일의 석회를 제거하겠다며 가져갔다(이마저 계산이 틀렸으나 수정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150만 원은 '예상되는 2022년 초과 난방/관리비' 명목으로 세입자인 우리와 한 마디 상의 없이 자기들 계좌에 묶어두고 현재까지 미지급 상태이다.
분쟁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이다.
독일의 모든 관리비, 난방비는 '다음 해'에 정산된다. 즉, 2022년 난방비를 정액제로 냈다가 2023년 9월이 돼서야 내가 진짜 얼마나 썼는지 알 수 있다는 소리다. 덜 썼으면 돌려받고, 더 썼으면 Nachzahlung(추가지불)을 하게 된다.
첫째, 그들은 이미 초과 난방비 및 관리비 인상 명목으로 우리에게 2년 동안 각 90만 원(2020년 추가지불), 250만 원(2021년 추가지불), 총 340만 원을 가져갔다. 이건 보증금이랑 별도로 계좌이체했다. 회상해 보면 2021년에 엘리베이터는 몇 달씩 고장 나있고, 계단이나 쓰레기통 청소도 잘 안 되는 엉망 그 자체였는데 영수증을 보니 관리비가 천정부지로 올라 있었다. 또한 그 해 우리는 집에서 난방을 거의 하지 않고 다운점퍼를 입고 지냈다. 하루 5분 샤워하는 게 난방의 전부였는데, 그 대가로 250만 원을 지불해야 했다.
둘째, 우리는 2022년 한여름에 그 집을 나왔기에 그 해에는 정말 난방을 단 하루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2022년 추가지불 금액이 140만 원이란다. 도대체 어떤 계산법을 썼기에 난방비를 이미 받아 가고도 140만 원을 더 청구할 수 있는가? 영수증을 달라고 하니 메일에 3주째 답장을 하지 않고 있다.
즉 우리는 여태 보증금 350만 원, 추가지불 340만 원 총 690만 원을 냈고, 150만 원 돌려받은 게 전부다. 그들의 근거없는 셈법에 의하면 여기서 우리가 더 받을 수 있는 금액은 10만 원 남짓이다.
독일 난방비 비싼 건 워낙 유명한지라 일부러 점퍼 껴입고 살았는데 돌아오는 건 540만 원의 마이너스가 난 통장뿐이라니. 웬만하면 지나가는데 이번 뒤통수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수준이다.
변호사 상담을 하면 보통 두세 번의 상담 끝에 소송여부를 결정하고 변호사는 다음 절차를 밟게 된다. 우리는 고민 없이 소송을 진행할 것이고, 할 수 있는 모든 문제제기를 할 예정이다.
잔잔하고 고요한 독일 생활에서 돌을 던지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이런 일들이다. 결코 가볍지 않고, 생활에 막대한 피해를 주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오늘도 지친 하루가 지나고 있다.
그 집에 살 때, 우연히 마주친 이웃 분의 말씀이 기억난다.
"여기 보증금 돌려받으려면 법정까지 가야 돼. 하루라도 빨리 도망쳐."
우리도 그때 도망쳐야 했다.
제목 사진출처: 직접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