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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Jan 30. 2024

독일서 정신적 에너지가 바닥나는 이유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정신적 에너지 고갈'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없다면, 일상에서 잔잔하고 꾸준하게 에너지 소모를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 있으니, 바로 독일에 거주하는 것이다. 


한 달 살기, 장기여행, 단기 어학연수 이런 거 말고 최소 3년 이상, 가능하다면 5년 이상의 거주가 최적이다.

되도록이면 일도 하고, 집도 구해보고, 이사도 다녀보면 더 빠르고 강하게 자주 경험할 수 있다.


고국을 떠나 산다는 게 어디든 쉽지 않겠지만 특히 독일에 산다는 것은 꾸준한 정신적 에너지 소모, 그리고 가끔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극심한 정신적 에너지 소모'를 요구한다. 이로 인해 종종 몸이 아플 수도 있다. 일상에서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활력을 준다고 하지만 그 이상의 강도와 빈도는 오히려 생채기를 낸다.  




나는 허상과 없는 얘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책, 이곳 브런치 스토리 그리고 실제 만남에서도 내가 사는 독일 그리고 넓게는 유럽에 대해 환상적이거나 긍정적인 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긍정적인 면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면에 깔린 어려움을 판타지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좋은 것 안 좋은 것 모두 그 상태로 공존할 뿐이다. 아, 물론 상대방이 현실을 알기 원치 않는다면 그들이 원하는 꿀 바른 얘기만 몇 시간이고 해 줄 수 있다. 판단은 본인의 몫이니까.


아무튼 독일에 살게 되면 내가 가진 티켓이 몇 장인지 알 수 있다. 

안 맞는 사람과 손절하기 전 몇 번의 기회를 주듯, 독일생활은 그 자체를 견디기 위한 '인내의 티켓'이 필요하다. 내 절친들이 '너는 누구랑 손절하기 전 티켓이 100장은 있는 것 같아'라고 하듯, 나는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기에 웬만해선 한 번 맺어진 인연을 끊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나와 독일과의 인연도 인생에 새겨진 인연이라 생각하고 참고 견뎌온 부분이 많다. 견딜 수 없을 땐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는 주문으로 눈을 감아왔다.


그런데 5년, 7년, 10년.. 연차가 쌓일수록 나의 티켓은 다시 늘어나는 게 아니라 다 쓰다 못해 남은 조각까지  쥐어뜯어서 너덜너덜해진 느낌이다. 


아래 상황들을 보며 독자님들 본인은 인내의 티켓을 몇 장이나 갖고 있는지, 만약 이 상황이 단 일주일 만에 한꺼번에 발생해도 여전히 참고 독일에 남은 인생을 걸 수 있을지 판단해 보시기 바란다. 




아래 예시는 모두 '실제로 발생한 일'이며 일부는 현재 진행형이다. 상황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봤다.


-너무나 단순한 계산실수가 발생하여 몇 번이고 수정을 요청해야 한다 (마트부터 행정처리까지 모두 해당).

-마트에서 거스름돈을 던지듯 놓고 분리대를 이용해 고객을 구석으로 밀어버린다.

-외국인 고객에겐 인사하지 않고 독일인 고객에게만 인사하고 웃는다.

-상대방 실수가 명백하고 잘못된 점을 분명히 얘기했지만, 절대 끝까지 사과는 받을 수 없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데 담당자가 휴가 중이다. 메일에 쓰인 대체근무자도 휴가 중이다. 그 사람의 대체근무자는 내용을 전혀 모른다. 이 과정에서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한 채 2-3주가 지나간다.


-계약서 조건을 믿고 상품을 계약했는데 실제 기능은 1/10도 안 된다. 고객센터에 항의하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변만 반복한다.

-계약을 해지하려고 하면 의무계약기간이 걸려서 2년 내에는 해지가 불가하다. 중개사이트를 통해 가입해서 그곳에 문의하라고 한다. 중개사이트에 문의하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배송기사가 주소를 잘못 봐서 택배를 완전히 다른 곳에 배달해 놓고 내가 수령했다고 표시해 둔다. 고객센터에 문의했으나 판매자한테 말하라며 도중에 전화를 끊어버린다.

-독일은 택배기사와 1:1 연락을 전혀 할 수 없다. 개인정보 보호 + 업무에 방해된다는 이유다.

-집에 있었는데 택배가 우체국이나 픽업스테이션으로 가버린다. 기사가 귀찮아서 그냥 들르지 않은 것이다. 

-픽업스테이션으로 업무시간 겨우 빼서 택배 찾으러 갔는데 마침 그곳이 휴가 중이라 찾을 수 없다.

-큰 가전을 시켰는데 집 건물 문 앞에 놓고 가버린다(주문 시 집까지 배송옵션을 추가해야 집까지 올려준다).


-돈 받아가는 건 득달같이 Mahnung(경고장)까지 보내서 받아 가면서, 남의 돈 실수로 더 가져가거나 정당한 환불은 1유로 조차 돌려주는 데 최소 4-8주가 걸린다.

-대중교통 포함 기차, 비행기까지 시간엄수 및 서비스의 질이 점점 낮아진다. 기차 정시도착은 거의 불가하다.


-보증금 2년 반동안 안 주고 버티는데 나는 독일 체류기간이 끝나서 이미 한국에 돌아왔다 (학생때 겪은 일).

-보증금 줄 건데 해외송금은 안되니 무조건 독일계좌를 부르라고 한다. 독일계좌 없는데?

-아직 나오지도 않은 추가 난방비를 세입자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관리회사에서 '추정'하여 보증금을 2년 가까이 돌려주지 않는다. 항의해 보지만 모든 연락을 씹는다.

-사용하지도 않는 난방비가 몇 백만 원이 정산되어 나온다. 항의해 보지만 일단 돈부터 내고 하라고 한다.

-한국에선 한 번도 고용할 일 없던 변호사를 일 년에 몇 번씩 찾아가야 한다. 떠올리기도 힘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하고 내 결백을 주장해야 한다. 변호사 보험이 없다면 이조차 불가하다.


-자동차 사고 내놓고선 현장에서 피해자들한테 미안하다는 사과는커녕 입 씻고 보험사도 안 알려준다. 결국 피해자들이 알아서 보험사 찾아내고 모든 과정을 처리해야 한다. 가해차량에게 문자 한 통도 받지 못했다.


-비오면 집안으로 물이 새고, 지하실은 침수되며, 부엌에선 배수관이 역류한다. 수해로 집은 온통 엉망이 되었으나 관리회사에서 어떠한 조치나 답변도 하지 않는다. 변호사를 고용하니 그때서야 대응한다.

-도둑이 득실거리는데 감시카메라 달자고 해도 찬성 안 하는 사람이 반이 넘는다. 다들 뭐 연예인인가 보다.

-내집 현관문 열쇠 바꾸려고 해도 다른 거주민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집 내부만 내 것이지, 외부에 조금이라도 노출된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발코니 차양 색깔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자기 시끄러운 건 괜찮고 남 시끄러운 건 항의한다. 단톡방에 올려도 사과는 커녕 절대 자기라고 말 안 한다.


-아파서 병원 가려고 문 닫기 전 전화했는데 본인 10분 뒤에 퇴근하니 오지 말라고 한다. 더 아프면 밤에 응급실 가라는 고마운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응급실 가면 3시간, 4시간 기다리다가 치료 못 받고 집에 온다. 받아도 진통제 줄 확률이 높다.

-집 바로 아래층에 병원이 있는데 안 받아줘서 30분 넘게 떨어진 병원에 가야 한다.


-인종차별인 게 다 보이는데 끝까지 아닌 척한다.

-인종차별의 근거를 요구하면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답변하지 않는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터줏대감들의 텃세, 놀림거리가 된다. 여러 명이 둘러싸고 위협적인 상황을 만든다.

-마음 쓰고 돈 써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는데 고맙단 말은커녕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문자 한 통도 오지 않는다. 너 참 뻔뻔하다고 하니 그제야 바빴다는 말뿐, 사과는 없다.

-아프다는 소식을 들어서 신경 써서 메시지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자기 급할 땐 세상친절, 내가 급할 땐 답장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사람은 어디나 있다).


-사실에 근거하여 리뷰를 적었더니, 거짓정보라고 댓글을 달고 지우라고 협박한다. 

-사실에 근거하여 적은 리뷰를 구글에 부당리뷰로 신고하여 증빙과 함께 리뷰가 사실임을 입증해야 한다.

-불친절한 판매자에게 중간평점을 주니 부당리뷰로 신고하여 증빙과 함께 불친절이 사실임을 입증해야 한다.




다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이 정도로 적어본다. 

어떤 일은 장기전을 치러야 하고 어떤 일은 갑자기 터지기 때문에, 독일에선 365일 중 언제 어디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과 전투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들을 가만히 있으면 바보취급하는 곳들이 적지 않다.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독일에서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체력적으로 자주 방전되는 가장 큰 이유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으로 방전'되어 몸이 버티질 못하는 것이다. 


그냥 다 내려놓고 편하게 지내라고 조언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당연히 그래도 된다. 

가끔 몇 십 유로씩 뜯기는 거 내버려두고, 차별받을 때마다 알아도 모른 척하고, 계약서 이행 안돼도 내버려 두고, 보증금 떼여도 언젠가 주겠지 하면서 기다리고, 1-2년에 한 번씩 부당하게 몇 천 유로씩 뜯어가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몇 천유로 사기당해도 고소하지 말고 그냥 액땜했거니 하고 넘기면 된다. 그러면 편하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꼴을 못 본다. 여긴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는 곳이다.


차라리 독어를 못하고 성격이 둔감해서 편지도 메일도 읽지 못하고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조차 들지만, 실제로 그랬다면 어떻게든 언어를 배워서 읽어내려고 했을 것이니, 나는 태생부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저 나에게 스스로 위로의 말을 던질 뿐이다. 이게 바로 해외 사는 업보라고.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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