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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Feb 26. 2024

국경을 넘나드는 엄마의 내공

독일생활 언 십 년이 넘었는데, 솔직히 7년째 까지는 집에서 혼자 김치 담가먹을 생각을 못 했다. '김치'하면 일단 한국에서 겨울에 온 가족이 모여 수 십 포기씩 담던 게 생각나서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음식이란 고정관념이 있었다. 


결혼하고 '김치정도는 혼자 담글 수 있어야지' 하는 생각에 내심 자존심이 상해서 언젠가 혼자 만들어내리라 다짐했지만 괜히 덤볐다간 죄 없는 배추만 생을 마감할 것 같아 의지는 매번 작심삼일로 끝나버리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척박한 독일 날씨와 땅에서 나는 재료들을 사서 해봐야 얼마나 맛있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엄마가 독일에 오셨을 때, 김치를 해보자고 하셨다. 한국에서 썼던 재료를 완벽하게 구하진 못했지만 엄마는 말씀하신 바로 그날 독일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서 슥슥 김치를 만들어내셨다. 독일생활을 오래 한 나도 김치 만들 생각을 안 했는데 엄마의 눈에는 언어와 국경, 그리고 날씨는 아무런 장애물이 아니었나 보다. 심지어 '소량이라 너무 간편하고 쉽다'는 코멘트도 덧붙이셨다. 


한 이틀이 지나니 김치는 먹기 좋게 익어 식탁을 훌륭하게 채워주었다. 기분 좋은 마음에 사진을 찍어 '독일에서 한국음식 만드는 모임' 그룹에 올렸다. 그러자 다음날 나에게 레시피를 달라는 독일인들의 메시지가 수 십 개 와있었다. 레시피 원작자인 엄마는 '간소화된 레시피라 진짜 김치라 할 수 없다. 주지 마라'라고 하셨으나 결국 내 부탁에 못 이겨 허락하셨고, 나는 독어로 번역하여 레시피를 공유했다. 


엄마랑 같이 처음 제대로 만들어본 김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엄마가 한국으로 가신 뒤 나는 아기 걸음마 하듯 레시피를 따라 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레시피 안보고 딴짓하면서도 슥슥 김치를 만드는 수준이 되었다. 희한하게 똑같이 하는 것 같은데 엄마가 했던 맛에 비해 아직은 조금 부족한 것 같지만, 이젠 '김치정도는 혼자 담그는 사람'이 되어 뿌듯하고 주부로서도 자존심이 서는 것 같다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그냥 혼자 신경 쓰였다).


가끔 한국 이웃분께서 감사하게도 직접 만든 김치를 나눠주시는데, 이 김치도 내공이 상당하다. 역시 살림경력이 오래된 '엄마'가 만드는 김치라 그런지 맛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더니, 음식도 때와 장소를 타지 않나 보다. 



제목 및 본문 사진출처: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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