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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Mar 16. 2024

미친 듯이 매운맛이 그리운 날

스트레스가 심한 날이면 간절히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마라탕(麻辣烫) 혹은 쑤안라펀(酸辣粉).


어릴 적부터 나는 유독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매운맛은 대체로 '맛있는 매운맛' 즉, 고추장 베이스의 달달함이 가미된 매운맛이기에, 오직 매움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엔 약간의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났는데 이 사람도 매운 음식을 참 좋아했다. 구남친이자 현남편인 짝꿍과 함께 몇 년간 한/중의 매운 음식을 하나둘씩 정복하다 보니 나의 매운 음식 사랑은 더욱 커져갔고, 어느새 최애 메뉴에 마라탕과 쑤안라펀이 탑 5에 들어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마라탕을 처음 중국에서 먹어봤을 시기 마침 한국에도 마라탕이 대유행을 하고 있었고, 덕분에 한국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마라탕, 마라샹궈 등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게 언 4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독일에 살다 보면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터질 것 같은 날이 있다. 

이유 없이 그런 게 아니라, 그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쌓여온 스트레스가 어느 순간 한계치를 초과하여 폭발하는 것인데, 이런 날엔 빨리 불을 꺼줘야 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으며 '어차피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변하지 않을 이 나라와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포기'를 다짐하는 일종의 의식이 필요하다. 안그러면 미쳐버릴 것 같은 날이 있다. 그것도 주기적으로.


그래서 독일에 하루라도 빨리 쑤안라펀 도입이 시급하다. 누가 제대로 된 쑤안라펀을 들여온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공항에 마중 나갈 것 같다.


충칭 면음식 전문점. (출처=직접촬영)


쑤안라펀의 매력은 '시큼하고 매운맛'에 있다. 식초의 시큼함과 마라의 매운맛이 어우러져 혀를 탁 쏘는데, 이 맛이 가히 중독적이다. 마라탕이 식상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고자 하는 분들은 쑤안라펀을 진심으로 추천한다. 면도 전분으로 만들어진 당면이라 큰 부담 없고 식사 중간에 간식으로 한 그릇 하기에도 제격이다. 


이번 길었던 상해 체류 동안 다양한 음식을 먹었지만 나의 원픽은 미슐랭도, 코스요리도 아닌 바로 무심하게 한그릇 툭 던지고 간 쑤안라펀이었다. 




쑤안라펀을 먹고 얼얼해진 혓바닥을 잠재우기엔 이 빙펀(冰粉)만 한 게 없다. 

빙펀은 얼음처럼 보이는 투명 젤리에 연유나 우유를 넣고 각종 토핑을 올려 먹는 디저트인데 마라 계열 요리와 상당히 궁합이 잘 맞아서 쑤안라펀과 함께 주문하여 먹으니 천국에 온 것 같았다.


후레이크 토핑을 얹은 빙펀. (출처=직접촬영)


그리고 마무리로 청포도와 얼음을 통으로 갈아 넣은 음료까지 마셔주면 완벽 그 자체이다.


미치도록 맵고, 알싸하고, 달달하며, 시원하기까지. 

속이 뻥 뚫리는 이 메뉴들 중 어느 하나 독일에서 제대로 맛볼 수 없어서 참 슬프다.


이처럼 먹는 것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으니 - 독일 일상에서 답답함이 밀려올 때마다 매번 이런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물이 넘치도록 꽉 찬 병에서 물을 덜어내지 않고 어떻게든 코르크 마개로 병을 틀어막으려 하고, 나는 그 병 안에서 숨을 쉴수도 나갈 수도 없는 느낌.


아직까지 그 답답함을 완전히 해소하는 법을, 나는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시원하고 청량한 청포도 음료 (출처=직접촬영).



제목 및 본문 사진출처: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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