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스위스 국경에는 Lörrach (뢰어라흐)라는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가 있다.
국경이 아니었다면 독일인들이 은퇴하고 노년을 보내는 고즈넉한 시골에 그쳤겠지만, 스위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탓에 의외로 3-40대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스위스에 별 관심 없는 독일인들은 모르는 반면, 스위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독일에 와서 장을 보기 때문에 모르기 어려운 지명이다. 주말이면 마트의 80% 이상이 스위스 차로 빼곡하고, 카트가 넘치도록 장을 봐서 택스프리를 하는 스위스 사람들로 붐비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한 푼이라도 저렴하게 사려는 사람 심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무튼 이 재미없는 동네에도 나름 멋진 건물이 하나 있는데, Burg Rötteln '뢰텔른 성'이다.
낡디 낡은 파편의 조각만 남은 이 성은 자칫 보면 폐허 같지만 알고 보면 8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과거 이 주변의 마을 이름이 Rötteln(뢰텔른)이었는데, 합스부르크 왕가가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었던 뢰텔른의 영주에게 넘겨줬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성 자체는 1250년 전후에 건축되기 시작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정확한 건축 연도는 알 수 없다고 한다.
800년의 역사적 산물을 내 눈으로 보고 있다니, 폐허로 보였던 돌덩이가 갑자기 웅장해 보이는 마법이 일어나서 올라가 보고 싶어 졌다. 마케팅이 이렇게 중요하다.
성은 뢰어라흐 시에서 최대한 망가지지 않게 보수/관리하고 있으며 일정 높이 이상(고성) 오르려면 입장권을 구매해야 한다. 인상 좋은 할아버지께서 '통행료'라는 귀여운 팻말을 달아두고 1인당 3유로씩 받고 계셨다. 아이는 1,50유로다. 물가 비싼 요즘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입장료라니, 기꺼이 지불할 만하다. 당연히 카드는 안 된다.
성은 말 그대로 '형체만 남았다'라고 할 정도로 돌덩이 뼈대뿐이었지만, 빈 공간에 상상력을 덧대어 과거에 활발히 사용했을 모습을 떠올리니 나름 웅장하고 멋있을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 고성의 꼭대기에 오르면 뢰라흐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스위스의 일자리 덕분에 도시 크기 대비 주민들의 평균 소득이 높고 집값도 나름 비싼 뢰어라흐. 이곳 어딘가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우리의 추억도 담겨있다. 할 말이 참 많은 독일 도시 중 하나다.
고성을 내려오면 할아버지가 계시던 매표소 2층에 성의 역사와 흔적을 모아둔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다. 한데 모으면 상자 하나에 다 들어갈 법한 적은 양이지만 오랜 기간 보존하고 관리하는 게 참 대단하다.
어쩌면 독일이 이토록 변화에 보수적인 이유는 흔적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독일에선 날씨가 좋으면 좋을수록 못생기고 역사 깊은 유적지에 한 번씩 다녀줘야 한다. 그러면 평소에 지나쳤던 도시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이 땅에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제목, 본문 사진출처: 직접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