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장기계약 하나를 해지해야 할 일이 생겼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기로 '정식 해지 편지'를 쓰고, 계약 정보를 작성하고 사인하여 고객센터에 보냈다. 메일로 보내도 된다고 되어있지만 영 못 미더웠기 때문이다 (전송확인 되는 메일보다 안 되는 우편이 더 정확한 아이러니). 메일로 보내면 분명 '문의가 너무 많아 답변이 지연된다'는 영혼 없는 자동답장을 받을 게 뻔했다.
하지만 3주가 지나도 해지가 됐다 안 됐다 어떠한 연락도 없길래, 고객센터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센터에서는 내 계약은 해지가 됐지만 남편의 계약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 대부분의 계약들은 해지하지 않으면 연 단위로 자동연장되기 때문에 반드시 그전에 막아야 한다. 조용해서 제대로 처리된 줄 알았더니, 역시 우편으로 쓰고 다시 더블체크 하길 잘했다.
"편지에 같이 해지해달라고 썼는데 왜 한 사람은 안 됐나요?"라고 묻자, "남편분의 사인이 없다"라고 한다.
아뿔싸.
계약이 내 이름으로 되어있어서 대표로 같이 해지하면 되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역시나 안 되는 것이었다. 이거 뭐 혼인신고서라도 보여줬어야 되나. 물론 그래도 소용없을 테지만.
독일에선 아무리 법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라도 '가족회원'이면 각자 다른 번호를 부여받는다.
즉, 가족카드를 발급받거나, 가족회원으로 신청하면 두 사람이 법적으로 묶여있는지와 상관없이 각자 개인의 고유번호를 준다. 예를 들어 부부가 가족통장+가족카드를 개설하면 메인 통장번호는 하나지만 카드번호, 카드 비밀번호, 온라인 뱅킹 아이디 등은 각자 따로 받게 된다. 우편물도 따로 보내준다.
주 계약자는 '계약을 신청한 사람' 또는 '회원비 내는 사람' 정도일 뿐, 아무리 가족이라도 당사자의 멤버십이나 카드를 해지할 권한은 없다. 결국 남편이 손수 사인을 해서 편지를 다시 부쳐야 했다.
도장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는 독일은(누구나 가져가서 찍을 수 있으므로) 이처럼 사인을 상당히 중요한 '개인확인 및 동의'의 수단으로 여긴다.
독일에 거주한 이래 한국을 방문할 때면 흠칫 놀라는 게 있다.
첫째, 직원이 고객의 카드를 가져가서 직접 리더기에 넣는 것. 둘째, 직원이 사인을 대신하거나 고객이 하더라도 성의 없이 점을 찍거나 선을 찍 긋는 모습이다. 여태 단 한 번도 카드 뒤 서명과 입력한 서명이 일치하는지 확인 한 사람은 없었다. 제대로 서명하려고 몇 초 시간을 끌면 뒷사람이 '대충 좀 하지'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개인정보를 가볍게 여기는 문화를 형성하기 쉽다. 결제하는 사람의 신상을 모르고, 심지어 서명도 안 맞는데 도용된 카드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있으랴. 등본이나 졸업증명서와 같이 담당자의 수기 서명 없이 발행되는 문서들은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수기사인을 가볍게 여기는 한국이지만, 실제 카드도용이나 문서위조율은 오히려 독일보다 낮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카드도용 신고 시스템이 실시간 작동하고 곳곳에 CCTV가 있어서 동선추적도 가능하며, 문서에는 '원본대조 일련번호'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 간단히 번호만 넣으면 원본인지 아닌지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의 범죄율이 높다고 할 순 없다.
다만, 이처럼 편리하고 고도로 디지털화된 한국문화 때문에 한국분들이 독일에 왔을 때 수기사인을 가볍게 생각하고 사인했다가 곤란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빼곡히 쓰여있는 글을 읽기 귀찮으니 '대충 맞겠지'라고 생각하고 사인하는데, 독일에선 절대 안 될 일이다. 독일에서의 사인은 '해당 내용을 모두 숙지했으며 법적 분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터지고 "나는 몰랐다"라고 하면 "당신이 사인했지 않냐. 계약서 읽어봐라"는 답변만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찝찝하면 섣불리 사인하면 안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원본문서를 제출하라는 독일 학교나 관청을 이해시켜야 한다. 독일의 시각으론 '원본'은 세상에 딱 한 부인데 이걸 여러 장 출력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독일의 원본에는 보통 문서를 발행한 담당자나 기관의 수기서명이 있으며, 없을 시 '이 문서는 수기서명 없이 유효함' 문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복제 시 효력을 잃는다.
독일생활 초기, 한국의 원본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대학에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나는 모든 한국의 서류를 인쇄하여 독일관청의 공증을 받아야만 했다(딱 한 장만 뽑아서 그걸 복사하고 복사한 서류에 공증을 받는다). 당장 집에 가서 수 십장의 원본을 뽑을 수 있는데 뭐 하고 있는 짓인지 답답했지만 어쩌겠나. 그렇게 돈과 시간을 들여 받은 공증문서에는 역시 담당자의 '수기서명'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수기서명도 비슷하게 그릴 수 있으니 복제의 여지가 있지만, 여전히 독일은 사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나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독일에서 사인을 한다면 반드시 신중에 신중을 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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