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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도 할부로 갚으라는 이 나라

by 가을밤

약 5년 전, 나는 독일에서 금전사기를 당했다. 당시 금액으로 약 1200유로, 이자까지 합하면 약 1400-1500유로(225만 원) 가량 되는 금액에 해당한다. 독일에서 중고거래만 400건 이상 해오며 모든 주의사항을 숙지하고 느낌이 안 좋으면 절대 거래하지 않는데, 그날은 모든 주의사항에 따라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당했다. 말 그대로 눈뜨고 코베인 격.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 나는 옷이 다 젖는 줄도 모르고 경찰서로 향했고, 다음날 경찰 신고서를 들고 변호사를 찾아 고소를 진행했다.


고소를 진행한 지 약 8개월 후 범인의 이름과 주소가 특정되었다. 독일로 귀화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이름으로는 아랍계 여성이었다. 그녀가 타인의 신분증을 도용해서 사기를 친거라 도용당한 신분증의 주인 역시 동시에 고소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그렇게 범인이 잡혔기에, 나는 사기당한 돈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1년 정도 지나, 변호사를 통해 "Zwangsvollstreckung(강제집행)"이 진행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강제집행은 가해자(사기꾼)가 자발적으로 돈을 갚지 않기 때문에 계좌나 월급 등을 강제로 압류하는 것이다. 그렇게 또다시 2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내 돈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거의 4년이 흐른 최근, 변호사가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가해자가 할부로 돈을 갚기로 했다고 한다. 신분까지 위조해서 범죄로 갈취한 돈을 할부로 갚아나가겠다니? 이게 무슨 핸드폰 요금이나 헬스장 회비인가?? 어째서 이런 상황이 가능하며, 그러면 돈을 잃은 피해자는 언제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되물었다.


단어부터 어이없는 <사기 친 금액 할부로 갚기>는 독일에서 가해자가 재산도, 직장도, 부동산도 없을 때 가능한 조치라고 한다. 즉, 돈이 없는 가해자는 '소득 없는 빈곤상태'이고 독일 법은 최소 생계비를 철저히 보호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수 천, 수 만 유로를 잃었어도 법적으로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고 그저 넋 놓고 기다리라는 거다. 감옥에 보내는 건 범죄자의 그 '대단하고 고귀한 인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한다.


1500유로가 적어 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한 달이 넘는 생활비 일수도,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돈일 수도 있다. 그런 남의 돈을 악랄하고 괘씸한 방법으로 빼앗은 사람도 최저 생계를 보장해줘야 한다니, 본인 최저 생계만 중요하고 피해자의 생계는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내가 속이 좁은 건지 몰라도 범죄 종류를 막론하고 인권이라는 단어 자체를 범죄자에게 사용하는 건 지금도, 앞으로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결국 피해자인 나는 가해자가 돈을 갚을 때까지 그녀(ㄴ)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지켜봐 주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심지어 가해자가 중간에 지불 불능을 선언하거나, 재산이 전혀 없다고 신고하면 추가 강제집행조차 못한다. 쥐꼬리만 한 이자가 붙긴 하지만 어차피 원금 회수조차 못하는데 이자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


상황과 법이 이러하니, 독일에서 좀도둑들이 끊이질 않는다. 큰 액수 한탕 해놓고 "돈도 재산도 없어요"라고 하면 피해자랑 법이 평생 기다려준다. 범죄자 입장에선 얼마나 가성비가 좋은가! 엄격하고 무서울 것 같은 독일이 그렇다니, 의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독일은 인권보호를 상당히 좋아하는 나라이며, 가해자의 인권도 보호해주고 싶어 한다. 또한, 다른 글에서도 여러 차례 적었듯 여긴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생계를 지켜주는 나라다. 아, 물론 범죄자의 생계도 마찬가지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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