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지 않아도, 맞지 않아도 아프다

by 가을밤

해외살이를 하면 소위 '멍청비용'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해외의 낯선 문화를 잘 몰라서, 혹은 알면서도 습관이 되지 않아 실수를 하면서 발생하는 비용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내지 않아도 됐을 돈이기에 멍청비용이라 부른다.


나는 독일이 태어나서 처음 왔던 해외이고 지인도 가족도 없이 달랑 혼자 유학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멍청비용은 거의 들지 않았다. 워낙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몇 번씩 체크하는 성격 덕분일 것이다. 심지어 대학원도 떨어질까봐 교수님들 직접 찾아가서 상담하고, 그것도 불안해서 6개월 전에 한번 예비지원 해보고난 후에 본격 지원을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멍청비용이 안들었다고 결코 돈이 안드는 게 아니었다. 내 독일생활에는 유독 '억울비용'이 많았고, 대충 어림잡아 계산해도 족히 1만유로(한화 약 1700만원)는 넘게 들었다.




첫 차를 사기 전, 어느 중고차 매장에서 시승 후 반납까지 마치고 돌아왔는데 약 이틀 뒤, 내가 차를 망가뜨렸다며 1000유로를 물어내라는 메일이 왔다. 이상없이 반납했다고 본인들이 직접 사인까지 했으면서 무슨소리인지, 증거를 내놓으라고 했다. CCTV가 없는 독일답게 당연히 증거같은건 없었다. 그저, 내가 탄 시각쯤에 차가 망가진 것으로 '추정' 된다며 무조건 내잘못으로 몰아갔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나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위협적이고 무서웠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싶어 회사 법무팀을 찾아갔지만, 나를 도와줄리 없는(도와줄 의무도 없는) 직원은 어차피 소송비가 더 나온다며 그냥 돈 주고 잊어버리라는 말을 했다. 지금 같았으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싸웠겠지만, 굳은살이 충분치 않았던 나는 결국 그 돈을 냈다.


여느때와 같이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왔는데 집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다. 그렇다. 아파트 윗집들의 모든 폐수가 우리집 부엌에서 역류한 채 3주가 흐른 것이다. 이미 거실까지 번진 폐수로 인해 벽지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거실의 모든 가구를 버려야만 했다. 냄새 때문에 하루종일 방문을 닫아놓고 집의 반밖에 쓰지 못했다. 그리고 관리회사는 연락을 씹었다. 결국 변호사를 대동했고, 그제서야 한달치 월세를 감면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그집에 도저히 살 수 없었기에 계획에도 없던 이사비용 수천유로를 쓰게 되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던 아우토반에서 대형 화물차가 1차선으로 들어오며 모든 차량이 속도를 줄였다. 나도 브레이크를 밟는 그 순간, 뒤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충격이 왔다. 4중 추돌사고. 내 과실 0%인 그 사건으로 인해 역시 전혀 계획에도 없던 차를 바꿔야만했고, 그동안 중고차 가격이 너무 올라버려 지출을 2000유로 이상 해야만 했다. 그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옅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좋은 집을 구했다며 이사갔던 신축 월셋집. 우린 그 집에서 거의 난방을 하지 않았다. 독일 난방비 무서운건 세상이 다 아는바, 한국처럼 따뜻하게 살았다간 돈을 퍼부어야 한다. 그래서 수족냉증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수면양말에, 패딩에, 담요 둘둘말고 일하며 겨울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3년 내내 매년 1000유로가 넘는 추가비용을 청구받았고 이상함을 감지하고 변호사를 찾아갔을땐 이미 3500유로 이상이 뜯긴 뒤였다.


이밖에도 중고거래 사기를 당해 약 1800유로가 뜯겼고, 몇 십 몇 백 유로씩 사용하지도 않은 서비스를 청구받은 적도 많다. 점점 굳은살이 생기면서 싸우고, 소송해서 겨우 이정도지, 만약 내라는대로 다 냈다면 만유로는 커녕 그보다 세 배는 더 썼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기간을 독일에 산 친구는 "니 얘기를 들으면 진짜 놀라워. 어떻게 그런일이 일어나."라고 할 정도로 나는 소위 '억까'하는 사건들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모두 실제 일어났고, 내가 겪은 일이기에 독일에 산다면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 안다쳤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된거다." 맞는 말이다. 나역시 이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실제로 큰 위로가 되어서 마음에 새긴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지만... 사람이 안다쳤을지언정 내 노력, 시간, 땀흘려 힘들게 번 돈이 억울하게 뜯기는 것 역시 너무너무 아프다. 꼭 주먹이 아니라 말로도 사람을 때릴 수 있듯, 몸이 다쳐야만 아픈게 아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과 잘못하지도 않은(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일에 피같은 돈이 쓰이는 것도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살인적인 소득세와 각종 세금을 떼어가는 나라인데, 이렇게 억울비용까지 내다보면 나는 이 나라에서 돈을 벌고있는건지 아니면 기부를 하고 있는건지 헷갈린다. '혹시 내가 독일이나 독일인에게 못된짓을 한게 있어서 업보를 받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도 그런 적은 없다. 오히려 외국인으로서 최대한 책잡히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작은 규칙 하나하나까지 다 지키고 세금이나 벌금 꼬박꼬박 잘 내고 성실히 살아온 것 뿐이다. 그렇게 열심히 산 게 죄라면 죄다.


제목 사진출처: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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