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독일에 살면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한국에 살 때보다 더 많이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첫째,
다르게 생긴 외모에 많은 사람들이 출신을 물으니 이 대답을 수도 없이 했다. 내가 처음 여기서 장기거주한 도시가 소도시였으니 길에 나가면 나는 관심대상 그 자체였다. 그나마 한/중/일 중 하나를 고르면 일단 30% 이상은 선방한 거다.
"Ich komme aus Korea." 나는 한국에서 왔어요.
그러면 100이면 50은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확실히 10년 전보다 질문 빈도가 많이 줄었다).
"Süd- oder Nordkorea?" 남한 아니면 북한?
처음엔 단순히 남한이라고 대답해 주다가 나중엔 북한이라면 니 입으로 북한이라고 하겠니?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출신과 국적을 수 백번 말하며 내가 한국인임을 매번 자각한다.
둘째,
나는 아시아 이름이 좋다.
나는 영어이름을 평생 가져본 적이 없다. 유학을 할 때도, 독일/유럽인들만 있는 회사에서 일하는 지금도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만 쓴다. 한국어 발음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겐 몇 번이고 발음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왜 남을 위해 내 이름을 바꿔야 하나?
특히 서양인들에게 발음이 어려운 중국계 사람들이 영어이름을 즐겨 쓰는데 나는 그들에게도 본명을 불러준다 (물론 본인이 싫어하면 영어로 부른다).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명사인 이름이 그 사람을 가장 잘 나타내는 동시에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어 이름을 사랑하는 나는 한국인이다.
셋째,
한국어가 정말 어렵지만 위대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한국어는 웃으면서 들어가서 울며 나오거나 울다가 나오지 못하고 멘탈이 나가는 언어다. 나는 언어를 공부했고 5개 이상의 언어를 배워봤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한국어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독일어보다 한국어가 더 어렵다. 타 언어와 어순도 많이 다르고 조사와 문미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는 말이 상당히 많아서 외국인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높임말의 사용은 어찌나 복잡한지, 나와 청자의 관계, 대화 속에 등장하는 제3의 주체와의 관계까지 따져야 하니 생각만 하다가 반나절 지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형용사를 가진 언어가 한국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는 아름답고 풍부하며 충만하다. 세상의 아주 미묘한 다양함과 인간 희노애락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언어이고, 그 언어가 나의 모국어인 게 참 행운이다.
넷째,
한국 음식은 예술이다.
유럽은 대체적으로 음식이 재미없는 대륙이다. 특히 독일을 기점으로 북유럽, 영국까지 음식이라고는 오븐이 해준거랑 기름에 넣다 뺀거 제외하면 요리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다. 현지식을 통달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나는 빠르게 아시아식과 한식으로 돌아왔다. 나보다 독일에 더 오래 산 분들을 보면 고향(출신국가)음식 요리사 수준이시다. 음식은 곧 소울이나 마찬가진데, 차가운 빵과 소시지, 고기튀김으로는 건조한 이곳 생활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집 냉장고에는 항상 홈메이드 김치와 장류가 구비되어 있다. 물론 청국장과 같이 강하고 특수한 음식은 구하기도 어렵고 하지 않지만 나는 한국음식을 가장 사랑한다.
다섯째,
한국은 나를 이방인으로 보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서양사회에서 동양인은 평생 외지인이다. 아무리 사람 많은 거리를 가도 외모가 다른 아시아인은 정말 많이 튄다. 극 내향의 I라도 피할 수 없는 시선집중이다. 무채색 옷을 입고 다녀도 눈에 띈다. 여권을 까기 전까지 그 사람이 실제 독일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딜 가든 일단 동양인 외모라면 외국인으로 정의되고 본다. 그래서 아무리 주류사회에 통합되었다 할지라도 채워지지 않는 1%가 있다.
해외에서 10년을 살든 30년을 살든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순간부터 내가 '한국인이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시선은 없다. 아무런 노력 없이 낯선 시선들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주류사회에 섞인다는 게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해외 취업이나 이민 혹은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독일에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설령 더 오래 살아서 누가봐도 이민이 된다 할지라도(결국 그럴 확률이 높지만), 여전히 이 땅에 '잠시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디가 되었든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어디가 되었든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려고 노력할 뿐.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