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고속도로 사고
모처럼 해가 뜨겁게 뜬 주말 아침.
한 달 전부터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 J를 보기 위해 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친구는 독일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예비신부인데 한국에서 부모님을 뵙고 얼마 전 독일로 돌아왔는 연락이 왔다.
독일에서 이렇게 날씨 좋은 날 안 나가면 죄짓는 거다.
J와 내가 사는 곳이 2시간가량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아예 다른 도시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 년에 몇 번 못 입지만 가장 좋아하는 코트도 꺼내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그날따라 왠지 핸들도 더 부드러운 것 같았다.
모든 게 이렇게 완벽할 수 없다며 여느 때와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었다.
2차선 아우토반이었고 차량도 많아서 그런지 다들 못 참고 1차선으로 넘어왔다. 추월차선이라고 하기엔 속도가 너무 안 났다. 그래도 어떻게든 50 이상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100미터 전방에서 대형 화물차가 1차선으로 들어왔다.
이거 느낌 안 좋은데.
화물차 뒤에 줄지어 오던 적어도 열 대 이상의 차들이 연달아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보통 아우토반에서 속도를 급감하면 비상깜빡이를 켜야 하는데 앞차의 신호가 없어서 눈치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 순간 앞차가 급정거했다.
나도 급정거를 했고, 차량이 닿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도한 그 순간,
쿵! 쿵! 쿵!
두 번의 충돌의 간격이 1초도 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 충돌은 밀린 내 차가 앞 차를 박은 소리다. 운전한 이래 차 안에서 그렇게 큰 충격은 처음 느껴봤다. 두통과 근육통이 왔다.
몸에 전해진 충격도 잠시, 나는 차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됐다. 내려서 누구한테 무슨 말부터 할지, 소리라도 질러야 되나 짧은 찰나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현장을 살피기 위해 나는 차에서 내렸고 사고현장을 보고 한번 더 놀랐다. 4중 추돌이었다. 내 뒤차는 앞뒤가 완전히 찌그러져서 폐차 수준이었고, 그 뒤에 오던 아우디는 보닛이 구겨지고 냉각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냉각수 색이 빨간색이라 처음엔 피인 줄 알고 흠칫 놀랐다. 사고 원인은 냉각수가 터진 아우디 운전자였다. 1차선이라 감속을 고려하지 못한 채 열심히 달린 것 같았다.
차를 훼손하고 도망간 뺑소니 접촉사고는 처리경험이 있으나, 이렇게 제대로 맞닥뜨린 큰 사고는 처음이었다.
솔직히 누군가는 아우디 운전자에게 가서 냅다 소리를 지를 줄 알았다. 아니, 아무도 안 하면 내가 나설 참이었다. 그런데, 방금 사고가 난 현장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아무도 화는커녕 서로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내 뒤차 운전자는 곧바로 사고 표지판을 세우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이토록 차분할 수가. 정말 독일 운전학원에서 가르친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을 보고 그의 침착함에 혀를 내둘렀다. 나는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면허를 땄는데 현장에서 배운 정석대로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행정처리에 그리도 굼떴던 독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구급차가 왔고, 응급구조 요원들도 운전자 및 동승자 인원(총 6명)에 맞춰 와서 모든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그동안 경찰은 운전자들의 신분증과 면허증을 스캔하고, 현장 분석과 함께 원인을 규명해 주었다. 누가 봐도 원인이 명확한 사고라도 경찰의 경위서가 있어야 보험처리가 수월하다.
내가 다친 곳이 없는 걸 확인한 뒤, 경찰이 와서 나를 안심시켰다.
"Alles gut. Sie haben alles richtig gemacht." (괜찮아요. 당신은 다 올바르게 했어요).
내 과실이 전혀 없다는 게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차량이 망가져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건 포기하라고 하여 나는 경찰의 수신호를 따라 다시 망가진 차를 끌고 아우토반에 진입하였고, 뒷 범퍼가 너덜너덜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사고 익일 오전, 주 인터넷 뉴스 및 신문에 내 사고가 보도되었고 재산피해는 약 3000만 원 이상이었다. 미디어에 나올 만큼 규모가 있었음에도 막상 현장에서는 너무나 차분하고 순조롭게 정리되었던 기억에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약 4주 뒤, 결국 내 차는 운행불가 판정을 받았고 그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첫 차를 떠나보내야 했다. 외관만 보고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뒤차 보닛이 아래에 끼이면서 차가 많이 망가졌다. 감정도 없는 고철 덩어리인데, 보낼 때 왜이렇게 눈물이 나던지. 뭐든 '처음'과 헤어지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사진출처: 엘라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