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청초호 호수공원
속초 청초호 호수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딸아이가 호수를 가리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한다.
정말이다. 거대한 호수에서는 생미역 냄새가 솔솔 풍긴다.
“이건 바다가 아니라 호수야. 하지만 호수와 바다가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지.” 아빠의 설명이 이어진다.
아이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바라보다, 곧 호수 위로 떠 있는 오리 떼에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또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물 위에 떠 있는 오리들을 보면 분명 호수 같고,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보면 또 바다 같다. 청초호는 호수인 듯, 바다인 듯, 묘한 매력을 품고 있다.
신이 난 아이 뒤를 따라 데크길을 걷는다. 걸음을 옮길수록 아이가 생긴 뒤 달라진 내 삶이 선명히 떠오른다. 특히 여행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이가 생기기 전의 여행은 특별한 날 떠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떠나는 이유가 있어야 했고, 돌아오면 삶이 조금 나아졌노라 믿었다. 여행의 속도는 빨랐고, 온도는 뜨거웠다. 넉넉지 않은 휴가 속에서 언제나 조금은 숨이 찼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특정한 날 떠나는 여행이 줄었다. 대신 일상이 여행으로 변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모든 곳이 새로운 여행지가 된다. 엄마 배 속에서 나와 세상을 처음 마주하는 꼬마 탐험가와 이곳저곳을 탐색한다.
아이의 속도에 맞추다 보면 자연스레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눈에 보일까 말까 한 개미, 무심코 지나치던 꽃 한 송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의 모양까지 새삼 또렷하게 들어온다. 아이의 호기심과 열정이 일상을 여행으로 바꿔놓는다.
다리가 아프다며 업어 달라는 아이를 달래어 그늘막 벤치에 앉는다. 청초호 호수공원엔 쉼표처럼 놓인 벤치가 많다. 빨강, 노랑, 파랑, 알록달록한 그늘막 벤치 아래 앉으면 잠시 세상이 멈춘다. 저 멀리 보이는 설악대교의 붉은색과 청초호의 푸른색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파란 도화지 위에 흰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듯, 하얀 요트들이 닻을 살랑거리며 떠 있다. 요트 타는 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언제쯤 저 배를 탈지, 사진은 어떤 포즈로 찍을지 이야기 꽃을 피운다.
데크길을 따라 줄지어 선 핑크빛 서양봉선화가 아이의 눈길을 끈다. 갑자기 주저앉아 꽃을 요리조리 살피던 아이가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꼬마 여행자의 여행메이트인 나는 순식간에 가이드로 변신한다.
“꽃은 꺾으면 안 돼. 호수 근처는 미끄러우니까 조심히 걸어야 해. 산책하는 강아지는 먼저 물어보고 만져야 해. 쓰레기는 꼭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고.”
아이의 세상에선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경험이 배우는 일이다. 부모의 역할이란 이런 여행 가이드의 일과 다르지 않다. 위험한 길을 피하도록 안내하고, 스스로의 속도로 걸을 수 있도록 옆에서 보폭을 맞춰주는 일.
물가 근처라 바람이 차갑다고 전하자 아이는 내 품에 안기며 말한다.
그 한마디에, 왠지 모를 뭉클함이 가슴 깊이 번진다.
잠깐의 휴식을 뒤로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놀이터로 향한다. 꼬마 여행자는 미끄럼틀을 여러 번 타고, 이내 모래성을 쌓으러 간다. 마른 모래로 모래성을 만드는 건 쉽지 않지만, 아빠와 힘을 모아 작은 모래성을 완성한다. 성취의 기쁨으로 얼굴이 빛난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하루가 저물어간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아이가 문득 묻는다.
공원 한켠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가리키며 묻는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설명을 찾느라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소녀상의 손을 살며시 덮는다. 그리고 싱긋 웃는다.
아이의 미소가 우리가 걸어온 여행길 위에 조용히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