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대포항의 크리스마스
*2025년 12월 크리스마스에 작성했던 글입니다.*
대포항의 겨울 바다는 지난여름의 찬란함을 잊은 지 오래다. 시퍼렇게 날이 선 파도는 빠른 기세로 덮칠 듯이 매섭게 다가오다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거센 파도는 마치 분에 못 이겨 어쩔 줄 모르는 황소처럼 날뛴다. 화려한 5성급 호텔의 앞마당을 차지하고도 성에 차지 않나 보다.
날뛰는 파도를 코 앞에서 보고 있자니 배 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뺨을 때리는 칼바람도 피할 겸 호텔 로비 방향으로 아이 손을 잡아끌어 본다. 나의 꼬마 여행 메이트는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난간 아래를 유심히 관찰하느라 바쁘다.
“엄마, 저기 아래 있는 게 바다코끼리야?”
“바다코끼리? 대포항에 바다코끼리가 출몰했나?”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니 테트라포드가 바다코끼리 무리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얼굴이 얼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순식간에 아이를 들쳐 안고 호텔 로비로 피신한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따뜻한 공기와 호텔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우리를 맞이해 준다.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대형 트리는 반짝이는 조명과 장식으로 치장을 마치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마스치고는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계단 위 빈백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는 청년들, 바다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연인들, 트리 앞에서 아이에게 포즈를 주문하는 부모님들까지 모두 자유롭고 편안해 보인다.
동행인들과 의견이 조율이 되지 않는지 서로 투닥거리다가 품에 안긴 반려견의 애교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평온하고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시간이 캐럴을 타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른다.
우리 세 가족은 올해로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를 함께 맞이했다. 아이는 1년 내내 기도했던 대로 노래가 나오는 장난감 휴대폰을 산타할아버지(?)에게 받았다.
요즘은 Chat GPT로 산타할아버지가 자고 있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고 가는 영상도 실제처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한 번 만들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동심은 지켜주되 일부러 없는 것까지 만들어 산타할아버지가 있음을 증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의 다리를 겨우 잡고 일어나던 아기는 어느새 아빠의 배꼽 높이만큼 훌쩍 자랐다. 키가 자란 만큼 생각도 많이 자랐기에 크리스마스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지만 한껏 들뜬 아이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다음 해 크리스마스로 살짝 미뤄둔다.
호텔 안에 있는 키즈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처음 보는 햄버거 쌓기 게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 밖의 바다를 바라보다 산타할아버지와 굴뚝에 대한 아이의 질문이 떠올랐다.
“엄마, 산타할아버지는 굴뚝으로 들어오시잖아. 우리 아파트는 굴뚝이 없어서 산타할아버지가 못 오시면 어쩌지? “
“너무 걱정 마.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서라도 들어오시지 않을까?"
아이의 질문은 묵호의 단칸방에서 맞이했던 나의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했다.
묵호의 단칸방은 우리 네 식구의 침실이자 거실이자 식사를 하는 장소였다. 밤에 이불을 펴고 네 명이 누우면 방이 꽉 찼다. 문풍지를 발라두었지만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한 줄기는 이불 밖 빼꼼히 내민 얼굴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크리스마스엔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못 찾으실까 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행여 굴뚝을 못 찾더라도 단칸방의 하나뿐인 문을 열고 들어 오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타할아버지가 들어오시다가 문지방 바로 아래에 있는 '내 얼굴을 밟으면 어쩌나..' 생각하면서 잠이 든 적도 있다.
일곱 살 크리스마스 날 아침 머리맡에는 색연필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아도 그건 분명 어머니가 문구점에서 사 온 색연필이었다. 그날 이후 산타할아버지는 굴뚝으로도, 단칸방의 하나뿐인 문으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 상 반짝이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어머니는 일을 하시면서도 단칸방에서 두 남매를 정성으로 키워내셨다. 고단함 속에서도 잊지 않고 준비해 주신 색연필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었다.
산타할아버지에게 굴뚝은 중요하지 않다. 단칸방에도 아파트에도 사랑은 존재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