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문학관이 내게 준 선물
서른 초반이었던 2014년 여름, 서울에서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뒤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났다. 평소 가보지 못했던 전라도를 여행지로 정하고 담양, 남원, 전주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도시는 바로 남원이다.
남원에 도착하자마자 추어탕으로 유명한 H식당에서 추어탕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내가 좋아하는 시래기가 듬뿍 들어있는 데다 깊고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한여름에 땀을 흘리면서 먹는 뜨근한 추어탕은 퇴사 후의 헛헛한 마음을 든든히 채워 주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광한루원은 남원에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달나라 궁전을 지상에 옮겨 놓은 것 같다고 하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 녹음 짙은 정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혼자서 오작교를 건널 때는 문득 이 다리를 함께 건널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광한루원을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혼불문학관이 나타났다.
잘 가꾸어진 문학관의 정원은 새벽이슬처럼 청초하고 단아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늘함이 감돌았다. 8월의 한여름이었는데도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도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 최명희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심정으로 소설 《혼불》을 써 내려가는 동안 작가님이 느꼈을 창작의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느낀 그 서늘함은 아마도 문학관 곳곳에 스며있는 그녀의 고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문학관 주변을 산책하고 있는데 한 남자분이 말을 걸어왔다. 그분은 자신을 혼불문학관장이라고 소개하시면서 정자로 나를 초대했다.
정자의 테이블 위엔 커다란 연잎 두 장이 깔려 있었다. 연잎 위 널따란 그릇에 새하얀 연꽃을 띄어 은은하게 차를 우려내고, 또 다른 연잎 위에는 새빨간 방울토마토를 소복이 쌓아두었다.
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을 대접받고 있으니,
세계 1등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도 부럽지 않았다.
잠시 담소를 나누고 일어서려는데, 고방석 관장님은 혼불 스탬프가 찍힌 원고지에 멋진 필체로 꽃심이라는 단어를 써서 내게 건네주셨다..
“관장님, 꽃심이 무슨 뜻인가요? ”
“꽃심은 소설 《혼불》 속에 등장하는 단어예요, 꽃의 힘,
꽃을 피워내기 위한 생명력, 정신 같은 것이랍니다.
기회가 되면 《혼불》 을 꼭 한번 읽어보세요. “
난생처음 만난 ‘꽃심’이라는 단어는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생명력을
내 안에 불어넣어 주었다.
퇴사 후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내게,
꽃심을 활짝 피우라는 관장님의 짧은 글은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너의 때에 맞춰, 너답게 살아가라고.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나도 활짝 피어날 때가 있겠지.
때가 되면 꽃심을 활짝 피워내겠지...라고 생각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글을 쓰며 내 안의 꽃심을 키워가고 있다.
남원에서 서울로 돌아가면 《혼불》을 읽겠다고 다짐했지만,
서울을 떠나온 지금까지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내일은 가까운 도서관에 들러
《혼불》 속 꽃심을 마주하고 싶다.
#하띠의 체력단련실
작가로서 단련해 나가는 성장 기록을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