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김지현의 글을 읽고 적은 글 1
기차 타는 걸 좋아한다. 역사로 들어가기 전 주로 역 앞 토스트집에 들른다. 마가린을 철판 가득 발라 식빵을 굽고 햄 위에 어슷 썬 양배추를 올려주는 데, 갓 구운 계란프라이로 눌러주는 맛이 그만이다. 무심한 척 쥐어주는 요구르트 한 병은 생수가 든 봉지에 같이 담는다.
해 뜨기 전 어슴푸레한 구포역 광장은 조용하다. 김해 가는 버스가 끊겨 심야택시를 탈 필요도 없으니 호객행위도 없고 그저 갈 길 바쁜 행인만 지나간다. 고요한 아침의 적막만 남았다. 후 하고 부는 입김엔 미처 뱉지 못한 어제의 내가 있다. 자주 긴장하고 제가 쌓은 성벽에 갇힌, 속수무책인 어떤 사람이 거기서 나온다.
기차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다. 내가 나를 어쩌지도 못할 때 그 육중한 탈것에 실려 겨우 일상을 벗어난다. 시간의 층위에 꼼짝없이 갇힌 퇴적암의 무게를 잠시 잊는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타인에게선 들뜬 기분이 느껴진다. 설령 출근이라도 지면을 울리며 삼킬 듯 달려오는 저 기차 앞에선, 아주 잠깐은 우리 모두 환영받는 마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종착역이 있지만 기차는 매번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것 같다. 시절을 달리는 내 인생도 덜컹덜컹 차창 밖으로 흔들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인생들의 모습은 어쩌면 내가 영원히 살아보지 못하는 삶이다. 순간 나를 내리누르는 생생한 슬픔의 무게를 느낀다. 설움이 작은 파도처럼 가슴에 들이친다. 몸을 숙여 창을 닦는다. 푸른 논밭에 띄엄띄엄 서 있는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침 댓바람부터 나와서 밭일 하는 여자들, 동네 정자 밑에 모여 대낮부터 평상에서 소주 까는 아저씨들. 그리고 어디나 비슷한 빽빽한 역세권 풍경들. 그렇게 턱을 괴고 먼 산도 보고 바람에 떠다니는 구름도 본다. 순간 다음 역에서 내리고 싶다는 상상을 종종 한다.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들을 다 지우고 낯선 곳에서 새롭게 생을 열고 싶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꼬박 앉아 있는 여덟 시간, 저녁 시간이 모래같이 사라질까봐 기웃거리는 세계들, 그리고 가끔씩 안부를 물으며 서로를 돌보는 관계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는 알기 때문이다. 내 안에 누룩처럼 부풀어 오르는 이 주저함을. 기차역이 아닌 지하철역으로 가는 출근길에서 조금은 떨고 있을 나를. 일상의 성긴 그물망을 꼭 끌어안은 체 내일도 3호선 3-2번 칸 앞에 서 있을 나를 말이다.
문득 궁금했다. 이옥림은 스스로 택했을까. 영문도 모른 체 머리카락이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듯 변해버린 건 아닐까. 사람들이 변신을 두려워했던 건 무지였다. 변신체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다. 내가 변하기 전까지 그것이 자의였는지 아니면 타의였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남은 자들은 추측이란 감옥에 평생을 갇혀 생각하는 벌을 받게 될 뿐이다. 그 또한 혼자 있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서. 글을 읽다 울고 말았다. ‘재경과 강아지가 떠나고 거실을 관통하는 바람결에 행운목이 잎을 살짝 떨었다.’(9쪽)는 부분에서. 옥림이 스스로 선택했건 ‘떨었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 아프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기(16쪽)’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인간에겐 언어가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의 언어만 있다면 우리는 각자의 내밀성을 지킬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이 모두에게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걸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유 할까. 어쩌면 옥림은 그것을 택한 것 같다. 산책할 때 말했던, 끝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을 끌어안으며.
대부분의 애독가가 그렇겠지만 나에게 산다는 것은 읽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 기차역이 아닌 지하철에서 책을 편다. 이번엔 어떤 언어로 어떻게 변신할지 기대하면서.
이 변신은 달리는 기차에서 봤던 ‘한번쯤 살아볼 수도 있었던 누군가’로 날 만들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되고 싶은 누군가’의 삶으로 조금은 날 인도해주지 않을까.
물론 그 누군가가 ‘궁극의 나 자신’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의 언어를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