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생의 이면>, 문이당, 1996
2017년 <사랑의 생애>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승우 작가의 책을 열두 권 읽었다. 아직 완독을 하려면 갈 길이 멀다. 선생님 너무 부지런히 글을 쓰셔... 또 새 책 나왔... 아무튼 적지는 않은 작품을 읽으며 거의 매번 감명을 받았는데, 최근 읽은 <생의 이면>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깊이 날 울렸다.
이승우 작가는 "이 책은 나의 숨결과 혼이 가장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려나. 작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잃었고, 작품 속 주인공도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다. 또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작품의 주인공도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대학 2학년 때 두 인물 다 본인의 첫 소설을 썼다, 창작 동기야 다르지만.
작가와 작품 속 주인공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읽는 것엔 분명히 문제가 (한계가) 있다. 또한, 종종 간과하곤 하지만, 생물학적인 "인간 이승우"와 <생의 이면>을 쓰는 "작가 이승우" 사이에도 구분이 필요하다. 가령 모두가 페르난도 페소아처럼 수십수백 개의 페르소나를 만들어서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각각의 자아는 따로 존재하면서 하나를 이룬다. 작가가 단편 <부재 증명>에서 "나는 김가을이라는 이름을 쓸 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김가을이고, 이세계라는 이름을 쓸 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세계이고, 장융이라는 이름을 쓸 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장융"이라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작가가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하고 <부재 증명>을 본인의 대표작으로 실은 게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생의 이면>의 주인공과 박부길과 이승우 본인의 거리두기를 위한 장치를 곳곳에 마련해두었다. 우선 작품의 플롯. <생의 이면>은 소설가이자 화자인 '나'가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 다른 소설가 박부길의 삶과 문학에 대한 평전을 쓴다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 사이에 박부길과의 인터뷰, 박부길이 전에 쓴 소설과 수필, '나'의 생각이 이리저리 얽혀있다. 평범한 메타픽션도 아니고, 독서 내공이 부족한 나로선 신선한 구조. 덕분에 (자전소설임에도) 자신의 타자화, 거리두기가 가능해진 동시에 (자전소설 다운) 깊은 내면의 탐구가 가능해졌다.
한편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독서 방식이다. 작가는 그것을 전제하고 견제하는 말을 거의 네 쪽에 걸쳐 전했다. 이런 식으로:
"물론 나는 한 편의 소설을 회고록이나 자서전과 분간 못할 정도의 맹추는 아니다.
...
사실 그대로 쓴다고? 누가 그럴 수 있을까? 기억되거나 말해진 사실은 결국 발췌된 사실일 뿐이다. 선택과 배제를 통해 '사실'이 구성된다 거기에 굴절과 왜곡이 끼어든다. 그것이 작품이다.
...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굴절과 왜곡은 그의 선택과 배제이고 그의 굴절과 왜곡이다. 그가 선택하고 배제한다.
...
삶의 파편들은 때로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고, 더 자주는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기도 한다. 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파편들 속에 감추어 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이지 파편들을 꿰맞춘 사실의 복원이 아니다."
(196쪽)
작가의 소설론이기도 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이승우와 박부길의 교집합을 찾으려는 초점 나간 돋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작가론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독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작품과 나의 교집합을 찾는 걸 더 즐긴다. 아니 즐긴다는 말은 틀렸다. 나는 집착한다, 작품과 나의 교집합에.
책이 내게 주는 가장 큰 가치는 재미도 깨달음도 아니다. 위로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고 나만 쓸쓸한 게 아니구나.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구나 하는 영혼의 동질감, 연대의식. 살아있는 그 누구도 주지 않는 것을 (대부분) 죽은 작가와 허구의 인물들이 준다. 그래서 기형도 시인이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라 쓴 것처럼 나도 책을 습관처럼 읽는다.
내가 좋아한 작가는 대체로 정신질환을 앓았다. 시인 중에 정상인을 찾기는 원래가 어려운 법이고, 꽤 많은 소설가 역시 건강한 심리 상태를 갖진 못했다. 마치 많은 고통과 생각이 창작의 재료가 되는 것처럼.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23쪽)
"죽은 이들을 동경하는 건가요?" 책을 볼 때마다 작가들의 연보와 사망 경위를 반드시 확인한다는 내 말에 누군가 그렇게 물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아니다. 죽음을 동경하진 않는다. 다만 느끼고 생각할 뿐. 그 느낌 알아요, 당신도 힘들었겠네요, 하고.
문학 작품이란 사실의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을 통해 만들어진 것임을 안다. 그러나 사실적 사건은 감출 수 있으되, 내면의 고통을 숨길 수는 없는 게 또한 문학이다. <생의 이면>의 주인공은 폐소 공포증 혹은 어떤 다른 불안장애를 갖고 있다. 어둠과 고독에 대한 묘사는 나를 많이 울렸다. 이런 건 겪어보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거다. 이런 건 자연스레 느끼게 되는 거다. 쓰는 사람도, 주인공도, 읽는 사람도. 고통을 공유하며 말없이, 글 속에서, 연대하게 되는 거다.
"나의 작고 어두운 방은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나는 내 자아의 지하방 속으로 자꾸만 숨어들었고, 그곳의 어둠 속에서만 평화를 느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질감이 매우 깊고 끈적끈적한 외로움에 시달리곤 했다. 그 외로움은 동형의 형질을 가진 누군가를 갈구하는 내 욕망의 이면에, 또는 그 변두리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방 안의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을 때 불쑥 쳐들어온 그 외로움에서는 이상하게 성욕의 냄새가 났다. 감상이 아니라 육체가 외로움을 타고 있다고 느꼈을 때의 그 난감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감상은 언제든지 사치스러울 수 있다. 감상으로 라면 얼마든지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육체는 징그럽다. 육체적 외로움은 슬프고 욕스럽다. 그것은 성인의 외로움이었고, 그것이 내 몸에서 발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끔찍했다."
(131쪽)
책을 왜 읽는지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보긴 했어도, 이렇게 그 이유가 내게 와 꽂힌 적은 없었다. 박부길이 갖는 외로움과 고독, 불안- 나는 문장 하나하나에 공감했다. 그건 깊은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가까운 이에겐 알려주기 싫다. 내가 왜 이 책에 공감하는지 알려주고 싶지가 않다. 나에게도 가면이나 미로 장치가 필요하다. 이승우 작가가 <생의 이면>에 부여한 복잡한 플롯처럼. 그러니까, 나는 -
이 책은 1993년에 나왔는데, 이승우 작가는 아직도 글을 쓴다. 트라우마와 불안장애를 (추정컨대) 겪고도 아직도 글을 쓴다. 아니 작가와 작품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작품의 주인공 박부길은 본인의 과거를 잉크로 써 작품 활동을 계속 해온 작가라는 설정이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것도 상담도 아니고 약도 아니고 독서나 운동도 아닐지도. 나는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위해 당분간 기형도와 심보선은 멀리하기로 결심했다. 책을 그만 읽고, 쓰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기는 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비기기라도 하길 바라며.
"그의 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지금은 얼굴도 선명하지 않은 국어 선생이나 윤리 선생의 경고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잠재된 죄의식이었다. 그는 그 죄의식을 노출하여 공식화함으로써 아버지를 인정하고자 했다. 부재였을 때 아버지는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이해했다. 어떤 몸부림과 부정의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 안에 살아 있었으므로.
...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310쪽)
+
아버지의 부재, 이거야 너무나 보편적인 오이디푸스 모티프라 치더라도. 이승우 여러 작품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아니 발견이란 말도 너무 거창하다. 굳이 찾으려는 의도가 없어도 그저 보이는 것들이라. 가령 트라우마로 인한 집착, 에로스적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는 인물들의 모습. 1993년 작품 속 박부길은 2017년 <사랑의 생애> 속 영석과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 정신병에 걸려 혹은 다른 이유로 일찍 생을 마감하는 아버지는 너무 많은 작품에 나오고.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과 어머니 본인의 죄의식도. 이 부분을 여기에 인용해도 될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히 사실적인 진술이 사람들의 정신에 충격을 안기고, 상상력의 폐해를 우려하게 한다는 알아차림은 자신의 환경, 또는 운명의 남다름을 재삼 확인하게 했다. 그것은 '그들'의 넓고 당당한 세계와 자신의 좁고 허름한 세계 사이에 견고한 담쌓기를 촉발시킨다."
(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