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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Aug 29. 2015

무한히 가변적이다

2015.07.28-2015.08.29 하늘 구경기

지난 한 달동안 매일 하늘을 찍으며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다. (나름 역사적이었던 하늘 기록의 시작)



첫째, 구름없이 맑고 푸른 하늘은 사실상 드물다. 내 사진첩 속에는 구름이 복잡하게 엉켜붙어 태양의 존재조차 알 수 없는 하늘이나, 듬성듬성난 구름이 한구석씩 차지하고 있는 하늘이 대부분이다. 문어머리처럼 맨질맨질한 하늘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게 여름철 장마, 태풍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도 아닌 것이, 지난 봄을 떠올려보자면 황사와 미세먼지로 눈조차 뜨지 못했던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색 역시, 소위 말하는 "하늘색"보다는 회색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비구름이라도 몰려온 날이면 그린티라떼같은 색까지. 게다가 더 다채로운 색을 보여줬던 것은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은 결코 까맣지 않았다. 남색, 보라색, 회색 등 - 구름의 농도와 전봇대의 채도에 따라 매일 다르게 섞였다. 심지어 달도 매일 다른 색이었다. 밤하늘의 연금술이 놀라워 몇번이나 하늘을 쳐다봤는지 모른다. 관념으로 존재하던 "맑고 푸른 하늘"을 지우니, "복잡하고 깊은 색의 하늘"이 내게 다가왔다.


필터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일출을 보는 것 같았던 어느 늦밤


둘째,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보다는 구름 낀 하늘이 더 반갑게 느껴졌다. 처음에 구름 하나 없이 푸르른 하늘을 마주했을 때, 나는 설렜다. 애국가의 학습효과일 수도 있고, 워낙 지난 여름에 맑은 날씨가 드물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태양을 등지고, 햇빛을 피할 곳을 찾아 헤맸다. 강렬한 햇빛으로 인해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 눈과, 옷 속에서 흐르는 땀에 지쳤기 떄문이다. 햇빛을 좋아하지만, 햇빛이 구름과 함께 있을 때 더 반가웠다. 구름이 주는 바람과 그늘의 감사함을, 온종일 건물 안에서 있는 (회)사노비 주제에 느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구름이 더없이 반가웠던 때가 또 있다. 천지사방을 회색으로 뒤덮는 태풍, 장마가 물러간 다음 날이면 하늘의 가장 먼 바깥에 구름이 나있었다. 마치 퇴각하는 비바람의 말꼬리인마냥. 그런 구름을 만나는 아침이면 출근 버스가 조금은 늦게 도착하길 바랐다. 그 모습을 일 분이라도 더 보고 있으려고. 이렇게, 지난 여름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모로 구름 덕이 아니었나 싶다.


먼데 구름이 달려가던, 폭풍우 다음 날 출근길


건물에 비치는 구름을 좋아한다. 퇴근 후라 더 그렇기도 했지만.



셋째, 하늘은 매일같이, 곳곳마다 다른 생김새였고, 그 모양새는 단 한번도 그대로 멈춰있지 않았다. 오전 일곱 시 집 앞에서 올려다본 하늘과, 점심 시간 길을 건너며 본 하늘, 그리고 밤 열시 호수공원에서 본 하늘은 모두 달랐다. 하늘은 일분 일초 숨쉬고, 변모해갔다. 그 무한함을 핸드폰 사진기로 다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하늘을 그릴 때 "하늘색에 뭉게구름 몇점"으로 퉁쳐버리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일전에 작가 한강이 '가로수의 나무잎 하나하나의 얼굴을 모르고 지나쳐간다' 뭐 이런 내용의 시를 낸 적이 있었는데. 나뭇잎도 그렇고 하늘도 그렇고, 내 얼굴 잔주름 하나는 그렇게 잘 알아채면서 저 거대한 하늘의 생김새 하나 모르고 살았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하늘의 얼굴이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사실은 내게 부끄러운 일이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꿉꿉한 습기로 가득 찬 구름이든, 아니면 피할 데 없이 뜨거운 뙤양볕이든 며칠 내내 지속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결국엔 습기를 이겨낼 햇빛과 폭염을 잠재울 비바람이 돌아왔으니까.

하늘이 연주하는 "여름장단"에 맞춰 나의 날들도 널을 뛰었다. 지옥 같은 날을 지나고 나면 행복한 순간이 왔고, 또 행복에 취해있다가 위기에 발을 헛딛기도 했다. 물론 힘든 시간이 너무 길고 깊어 괴롭기도 했지만... 그게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무한하되, 영원하지 않은 하늘 덕분에.


(그동안 이런, 저런 기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이 영원하지 않는 무한의 얼굴을 보여줬기 때문. 아쉽게도 깨달음도 항상 찰나여서 뒤돌아서면 바로 까먹었지만)


J. M. W. Turner - Snow Storm - Steam-Boat off a Harbour's Mouth , 1842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볼 때, '스산한 영국의 하늘스럽다'라고 생각을 했을 뿐,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그가 눈보라나 비바람 휘몰아치는 바닷가를 많이 그리기도 했지만, 관념적이지 않은 그의 그림 속 하늘이 어딘가 어색하게만 다가왔다.

그런데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보면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의 하늘이 많았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나는 그런 하늘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하늘이 시시각각 무한한 얼굴을 뽐내주어, 그 다양함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동안 윌터너 그림에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하늘색의 하늘이 제일 이상적이고 예쁜 하늘이다"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 아니었나-하고.

나의 고정관념을 깨준 이 작은 취미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한달로 끝내지 말고 계속 찍어야겠다. 가을하늘은 정말로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는지, 겨울하늘에서 눈은 어떤 모습으로 내리는지 빨리 만나보고싶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달이 붉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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