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28. - 속초의 땅바닥으로부터 듣다
일산신도시(一山新都市)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8.23㎞ 떨어진 곳에 있는 신도시이다. 행정구역 상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와 일산서구에 속해 있다. 신도시는 새로운 도시를 뜻하는 개념으로, 1992년 이전의 고양군 신도읍과는 관련이 없다.
본래 일산신도시는 1988년 노태우 정권의 아파트 보급 공약에 의해 건설된 지구로, 서울 서대문, 은평구, 영등포 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의 주거 도시 개념이었으나, 점차 인구가 증가하면서 1995년 무렵부터는 자체적으로 행정, 문화 기능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고양시의 일부였음에로 따로 일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으며 이는 구 일산읍, 송포면 이외의 지역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으로 통칭되었다.
- 위키피디아
내가 사는 일산은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이 나라 지도에 등장했던 최초의 도시 중 하나이다. 서울로 밀집되는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계획된 까닭에, 흠잡을 데 없이 잘 정비되어 있다. 널찍한 도로와 시원시원한 크기의 건물들,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는 인공호수, 그리고 구석을 찾기 어려운 골목들. <스텝포드 와이프> 속 완벽한 아내들의 도시 버전이랄까. '일산에 없는 건 대학뿐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생활이 편리한 곳이다.
1994년 일산에 정착했으니 햇수로만 벌써 22년째. 하지만 나는 일산의 모든 편의를 누리고 자란 '일산키즈 1세대'임에도 이곳에 그다지 애착을 가진 적은 없다. '생각 없이 생각하면서' 걷고 싶어도 신호등 때문에 늘 멈춰야 하는 '분절의 도시', 오래된 맛집보다는 페인트 냄새 나는 체인점만 많은 '프랜차이즈의 도시'. 이런 인공도시를 받아들이기에는 이물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도시 키즈라는 것은, 고향 없는 세대임을 뜻하기도 했다. 문학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실향민의 아픔, 향수 같은 것은 느껴볼 틈도 없이 나에겐 고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유랑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딘가에 속하길 바라지 않고 떠돌고 싶어 하는 것도 내가 신도시 키즈로 자라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사이 일산이 내게 크게 자리 잡은 것일까- 다른 도시에 가면 나는 일산과 다른 것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산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전봇대 전깃줄이 어지럽게 엉켜있는 서울 하늘이라거나 (일산에는 전깃줄이 다 땅 속에 있다) 신호등은커녕 보도블록도 없어 갓길을 걸어야 했던 구례의 둘레길이라거나(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일산은 분절의 도시다) '대충스럽게' 생긴 펍이 군데군데서 빛을 발광하던 부산 광안리 뒷골목이라거나(프랜차이즈의 도시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고백이지만, 다른 도시에서 일산과의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일산이 뒤진다고 불평했다. 역사도, 영혼도, 낭만도 없는 무향무취의 도시라는 생각에, 집에 돌아가는 길 발걸음을 더욱더 느려져만 갔다.
이번에 한나절 속초와 강릉을 다녀오면서 발견한 일산과의 차이는 “보도블록”이다. 속초 시내에 도착해 해수욕장에 이르기까지, 길은 포장되어 있었으되 보도블록은 없었다. 일산에는 어딜 가나 예의 그 보도블록이 정갈하게 깔려 있는데. 보도블록이 없다고 길 걷는 게 더 어려울 건 없고, 마찬가지로 보도블록 덕분에 더 잘 걷는 것도 아니다. 길을 포장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니까.
다만 나는 그 정성에 대해 생각했다.
대화역부터 백석역, 다섯 개의 전철역을 등줄기로 삼고 넓게 펼쳐진 이 도시의 바닥. 어떤 이들이 무릎을 꿇고 등을 굽히고 앉아 블록을 하나 하나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가지런히 전봇대와 가로수를 심고, 또 그 바깥쪽으로는 널찍하게 아스팔트를 펴 바르고 학교앞천천히 따위의 말들을 하얗고 노랗게 써 넣었다. 결코 길지 않았을 그 시간 동안에.
도시가 태어나고 20년이 넘게 흘렀다. 군데군데깨지고 갈라진 찻길과 높이 자란 가로수, 그리고 수만 개의 껌딱지가 들러 붙은 보도블록. - 그렇게, 장년이 된 도시의 얼굴.
이제 이 도시도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세월의 흔적을 군데군데 새겼다. 신도시라는 닉네임이 다소 민망하게 느껴지는 이제야, 신도시키즈였던 나도 이 도시에 향수와 정을 느낄 수 있게 됐다.
먼 훗날 돌아가고 싶을 고향을 나도 이제야 갖게 된 것 같다.